제 405화
하늘의 별만큼 빽빽하게 들어찬 백염의 타원 구체들은 맹렬한 회전속도를 보이며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고 주변을 바꿔놓았다.
모든 기술 중에 가장 지옥도를 펼치기 쉬운 것이 마법이라는 학문이다.
흑마법, 사령 마법, 신성 마법, 원소 마법.
종류 자체는 다양하지만, 그 방식이 어떻게 다르건 오랜 시간 검을 수련해온 이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가르는 일격을 연습할 시간에 마법사들은 그 이상의 효능을 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단점?
준비가 오래 걸리고 지독하게 재능을 탄다는 점일까.
인간이 일생에 허락된 시간을 투자하여 늙어서 육신이 노쇠하기 전에 일정 경지를 이루어내기가 어렵다는 페널티만 제외하면 얼마든지 마법은 충분한 화력을 보장한다.
쿠웅…… 쿠우웅!!!
첫 번째 백광의 포탄이 추락했다.
그리고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백염지옥을 만들어내며 그 안에 있던 모든 존재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그들의 사이에서 나는 굳어버린 듯 멍하니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신목의 성자.
본래 내 세계에선 싸움 전에 도망쳤고 에나벨의 손에 사망한 사내였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아도 그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해보는 건 처음이었던 만큼 나는 그를 당장 죽이지 않았다.
“세계수는 아직도 구경만 하나?”
이쯤 되면 튀어나와 주실 때가 되었을 텐데.
이곳은 마족이 전쟁에서 승리한 세상이다.
오랜 시간 인간을 향해 증오를 품어왔을 마족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위기에 처해있던 달의 숲 엘프들. 유리아 헬리샤나와 그녀가 몰래 보호하고 있던 뮤우는 내 도움이 없었다면 강한 전력인 이그드라실의 가디언에게 패배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 시기를 계산하면 아무리 짧아도 이들이 이 십자가에 효수되어 시신조차 수습 당하지 못한 기간은 십여 년 정도.
혼이 떠난 육신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딴 식으로 따지면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게 이 세상일 것이다.
세상을 규정하는 규칙은 의외로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으니까.
“끄아아악!!”
“사, 살려줘!!”
아비규환의 지옥도는 다른 곳에서 찾을 것도 없었다.
쿠웅!! 쿵!!
신목의 성지 전역에 쏟아지는 백염 구체는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불태웠고 살아있는 블러드 엘프들을 새카만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이이!!”
그런 내 행동에 사내, 신목의 성자가 눈을 부릅뜨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저자를 막…… 커헉!”
아직 사태파악을 못 하는 놈이 있다.
신목의 성자는 내게서 뒷걸음질 치면서도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가디언들을 부단히 불러 모았다.
물론, 현재 전역에 폭격 되는 백색의 폭염 구체로 인해 아비규환이 된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한 수준을 지닌 가디언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설사 이 무차별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놈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 행동을 막을 요소가 되진 않는다.
콰직……
“으, 으으, 으으으으으으!!”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그대로 다리뼈가 뭉개져 버린 신목의 성자는 눈을 부릅뜨고 악을 써댔다.
목을 강하게 틀어잡은 탓에 입을 벌리지 못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좌복부에 검상이 7개. 왼쪽 허벅지에 창상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4개. 오른 다리는 절단.”
내 말에 그가 부들부들 떨며 붉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나 헬리샤나의 경우 목을 절단, 육신에는 모진 채찍과 저주의 흔적들. 이런 짓을 해놓고도 서로 간에 이해를 바랄 건 없잖아. 안 그래?”
내 미소에 그가 공포에 질린 듯 와들와들 떨었다.
“니들이 뮤우를 처참하게 죽였으면 나는 너희를 죽이면 돼. 그 외에 어떤 대화도 필요 없다고 본다.”
스릉!
“주, 죽어!!”
그 와중에 살아남은 블러드 엘프 가디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죽이면 이 지옥 같은 폭격이 멈출 줄 알았는지 가디언은 단검을 뽑아 들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 목을 향해 파고들어 왔다.
물론, 어느 정도 접근하기도 전에 하늘에 떨어진 새하얀 타원 구체가 그를 재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증발시켜버렸지만 말이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우, 우리 협상! 협상을 합시다!”
그때, 내 손에서 해방된 신목의 성자가 와들와들 떨며 내게 제안해왔다.
“무, 무엇 때문에 이리 극대노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말을 뭐로 들었나.”
“예……?”
“너희들은 뮤우를 죽이고, 아이나를 죽였다. 그건 너희들 선택이고.”
“……”
“지금부터 내가 너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엘프들을 말살하는 건 내 선택이야. 서로 간에 선택을 내렸고 거기에 서로 간섭할 명분이 있나?”
그 과정에서 현재 내 정신을 좀먹는 충동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충동에 몸을 맡긴 시점에서 대화의 여지는 없다.
천천히 그의 몸을 들어 올린 나는 무표정을 고수한 채 서서히 내 몸 안에 있는 내공, 즉 천마공과 사령 마나를 섞은 혈마공을 그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사, 살려……”
“고마워해야 할 거다. 살려두고 두고두고 괴롭히기엔 찾아야 할 놈이 있어서 시간이 많지 않거든…….”
푸스스슥…….
그 말과 함께 그의 전신에는 마치 가뭄에 갈라지는 땅처럼 검붉은 핏줄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잔혹하다고? 성자답지 않다고?
만약 주신 프리아가 내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성자의 흔적을 내린 것이라면.
주신 프리아 여신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끄으, 끄으으아아아아아아!!!!”
전신으로 퍼지는 검붉은 핏줄이 그를 장악하자 그는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그리고.
퍼엉!!!
거대한 폭음과 함께 그의 전신이 처참하게 터져나가 버렸다.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터져버린 그의 육신에서 나온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그의 몸속으로 밀어 넣은 혈마공이 게걸스럽게 그의 전신에 있는 피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태워버린 것이다.
바짝 말린 육포처럼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생명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딱딱한 육편이 흩어진다.
그에게서 터져 나온 육편이 내게 닿을 때쯤엔 마치 대기권에 충돌한 소운석처럼 순식간에 타들어 가 내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다.
계속되는 폭음 속에서 그의 것이었던 파편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 난장판 속에서도 고고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십자가를 똑바로 직시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뮤우.”
아저씨가 여기 싹 정리 끝내고 다시 올 테니.
좀 전보다 얼굴의 표정관리가 더 되지 않고 있지만 나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신목의 성지는 넓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세계수가 결계를 펼쳐둔 곳은 화이트 노바의 폭격 위력이 감소한 탓에 아직 살아남은 놈들이 보였다.
천천히 내 전신을 타고 검붉은 혈마공의 기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손가락이 뚜두둑 소리 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한발 내디뎠다.
* * *
적어도 신목의 성지는 대륙 모든 엘프들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한 곳이다.
사실 다른 곳이야 도시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마을 규모가 대부분이지만 일단 엘프들의 객체 수가 적은 탓에 도시라면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고요해진 숲은 좀 전까지 지옥도가 펼쳐지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울창하던 검붉은 나무는 모조리 새카맣게 타거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붉게 변색한 타락한 풀과 꽃들이 있던 숲길은 여기저기 흉한 곰보가 퍼진 것처럼 크레이터가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에 완전히 휩쓸리지 못한 블러드 엘프들의 흔적이 보였다.
몸 전부가 불타버렸지만, 손만은 남았는지 주인을 잃은 팔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경우는 차라리 양호했다.
대규모 초고열 마법의 폭격으로 대부분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고 증발해버렸으니 말이다.
“코, 콘대 장로!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보통의 엘프가 블러드 엘프가 된다고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엘프 특유의 평화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상당히 냉혹하게 변하며 흉폭해지는 게 사실이지만 일단은 결국 다크 엘프처럼 변화한 엘프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음침한 다크 엘프와 계열 자체가 비슷한 변화점일 뿐이니 말이다.
엘프들의 도시인 이 신목의 성지에는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 전대 신목의 성녀인 에밀리아 이 전대부터 만들어진 피신처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피신처에 있는 엘프는 대부분이 노령의 엘프들이었다.
침입자가 발생했다. 문제는 그 침입자가 상당히 강한 존재인지 순식간에 척후병과 선발대를 전멸시켜버렸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곳, 숨겨진 피난처로 몸을 숨겼다.
마나의 차단. 기척의 차단.
완벽한 차단이기에 적어도 척후병들을 몰살해버린 그 인간이 혹시라도 자신을 헤치진 못할 것이다.
신목의 성자께서도 계시고 신목의 어머니도 곧 깨어나니 조금만 숨어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했다.
제깟 놈이 무슨 수로 엘프들의 숨겨진 피난처를 찾아내겠는가.
근 십여 년간 모든 게 완벽했다.
가장 큰 기둥이었던 저항군이 무너지고 전쟁의 판도가 마족에게 우세하게 돌아갔지만, 소수의 저항군이 남은 탓에 마족들은 신목의 성지를 건드리지 못한다.
정령왕의 제물로써 유리아 헬리샤나가 죽어가며 신목에 저주를 퍼부은 탓에 신목의 엘프들이 블러드 엘프로 변하긴 했지만, 마왕 페르세르크의 침식을 신목의 어머니가 걷어내기만 한다면 신목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역자?
동생을 구하겠다고 돌아온 더러운 다크 엘프가 있긴 했지만, 그녀가 죽은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모든 게 완벽했는데.
그 완벽한 흐름에 이물질이 끼였다.
묘한 불안함에 잽싸게 이 피난처로 들어왔지만,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은 아직 그 추악한 인간 침입자와 자랑스러운 신목의 엘프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증거로 보기에 충분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곧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시오. 신목의 어머니께서 곧 잠에서 깨어나실 때가 되었소. 어디서 저런 추악한 인간이 나타났는지는 모르나 고작해야 인간 하나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외쳐보지만, 그와 마주 보고 있던 장로 엘프들이 조용하다.
그 싸늘한 침묵 속에서 콘대 장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아닌 뒤쪽을 보고 있는 장로들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뭐요. 대체 왜 그러는……”
그렇게 고개를 돌린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엘프 하나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쥔 채 질질 끌며 숨겨진 이 피난처로 유유히 들어오고 있는 한 인간을.
“무, 무슨?!”
“콘대 장로. 여기서 또 보니 감회가 새롭네.”
그땐 내가 직접 죽인 적은 없는데.
섬뜩하게 웃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인간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인간과도 달랐다.
강적, 독기 가득한 적, 여러 종류를 봐왔지만, 저 인간의 눈빛은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가 내뿜는 광기였다.
정상적인 범위에서 아득히 벗어난 그 시선에 콘대 장로는 본능적으로 온몸이 쪼그라드는 듯한 공포심을 느꼈다.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존재도 저런 섬뜩한 느낌을 풍기지 않았다.
실제로 엘프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던 마족들이 엘프의 성지인 이곳으로 들어와 불가침 조약을 맺을 때도.
대공이라 불리던 아스타로트와 그를 포함한 다른 대공급 마족들, 그리고 공허한 눈을 가지고 있던 은발의 엄청난 미녀.
마왕 페르세르크와 직접 대면했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섬칫한 기분이었다.
페르세르크는 그가 생각해온 그 어떤 존재보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날려 왔던 존재였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 그녀는 대륙을 뒤흔든 마족의 왕.
마왕이니까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이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튀어나와 삽시간에 이곳까지 밀고 들어왔단 말인가.
“가, 가디언들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소리가 봉인된 것처럼, 더 이상 입을 놀렸다간 처참하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엘프 에이션트 가드들은 어디서 다 무엇을 한단 말인가!!
속으로 그리 외치던 그는 곧 추악한 인간이 내던진 피투성이 엘프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쓰러진 엘프는 다름 아닌 신목의 최대 전력인 에이션트 가드 중 한 명이었다.
에이션트 가드가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는 멀쩡하다.
분명 혼자서 침입했을 진데.
굉음이 멈추고 돌아보니 그는 멀쩡하게 피투성이가 된 신목의 최대 전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쳤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굳어있던 그는 곧 눈을 한번 깜빡이기가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변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 숨는다고 숨었는데 미안해서 어쩌나, 나는 이미 거길 몇 번이고 들락날락한 경험이 있거든. 마침 당신을 좀 찾고 있었는데. 이그드라실 그 망할 년이야 어디 있는지 뻔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인간의 목소리에 눈을 부릅뜬 그는 굳어버린 몸 대신 눈동자만 천천히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숨겨진 피난처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탁 트인 폐허의 한복판이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폐허 속에서도 유난이 멀쩡한 세 개의 십자가가 보였다.
“이, 인간……”
“하고 싶은 말이 있나?”
“……”
굳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진짜로 죽을 것이라는 압도적인 공포에 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소년의 등 뒤로 검붉은 무언가가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여기 매달린 세 명을 보고 조금 충동적으로 변한 거 같은데. 후회는 하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 소년의 등 뒤로 나타난 것은 거대한 악마의 형상이었다.
“니들 앞에서 나는 알량한 성자가 아니라 악마가 될 생각이니까.”
아주 기꺼이.
그 말과 함께 기절할 듯한 공포를 전해주는 거대한 괴물이 눈을 떴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무릎이 구부려진 그가 무릎을 꿇은 채 파르르 떨었다.
그저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 수많은 엘프들을 학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저 마왕보다 더 지독해 보이는 악마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소년의 얼굴에 새겨진 광기는 그야말로…….
파괴를 위해 내려온 악신의 형상 그 자체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마 같은 새끼들에겐 악마같이 대해주는 게 맞겠지. 다른 놈들은 깔끔하게 죽였지만, 저 세 사람을 저 꼴로 만든 직접적인 원흉인 당신은 아니야.”
동시에 하늘에서 몇 가지의 빛이 번뜩이더니 천천히 원운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원이 그려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놀라울 정도로 압도되는 장관에 콘대 장로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콘대 장로는 자신의 로브 아래로 뜨끈한 액체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다른 장로와 다르게 콘대 장로는 미치지도 못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실금을 지리면서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만들어내는 종말을 말이다.
소년의 뒤에 나타난 정체 모를 악마의 형상이 바닥을 한번 내리치기가 무섭게 흙바닥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시뻘건 마그마가 일렁이며 지옥도를 연출해내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인간 소년이 정말 인간인지, 정말 인간이라면 엘프들이 겁도 없이 무엇을 적대한 것인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소년이 무심결에 내뿜는 힘은 고작 마족들이 풍기는 어두운 기운과는 급이 다를 만큼 깊고 무거웠고.
죽음 그 이상이 가져오는 공포는 원초적이었고, 어두컴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