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408화 (407/1,559)

제 408화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선뜻 손을 대기 어려운 이야기가 내 뇌리에 닿았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건 좀전의 목소리에 담긴 위압만으로 충분했다.

단순 강자가 내뿜는 위압이 아니라.

종의 상위객체가 내뿜는 위압의 느낌이었다.

비슷한 거로 그런 게 있지 않던가.

드래곤이 사용하는 종족 특유의 특권인 용언, 그리고 신이 내리는 계시.

페르세르크도, 세계수도 아닌 처음부터 관음증 환자처럼 나를 바라보던 그 목소리는 아주 조용히 내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가, 완성도가 높은 구원자여.]

“우선 그전에 자기가 누구인지부터 까놓지그래.”

[호오……. 겁을 먹지 않는구나.]

담담한 그 목소리에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세계의 경계에 있는 남은 인간에게 망각의 대가가 가해졌더구나.]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어찌하겠느냐. 나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 작은 여아에게 도움을 주마.]

“내가 당신의 뭘 믿고.”

[믿는 건 자네의 자유일세.]

속삭이는 말투는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이 가득 들어있었다.

초월적인 존재라는 건 첫 대화부터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를 특정하긴 아직 단서가 너무 부족해서 확정할 수가 없었다.

주신 프리아가 내게 내려준 칭호의 힘은 등가교환을 주로 요구한다. 특정 대가를 기준으로 무언가 기적을 발현하는 방식.

이미 에이리아는 목숨을 건진 대가로 기억을 말소당했다.

그러니 이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은 신의 뜻에 위배되는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거래는 정당하게 끝이 났으니.

이 이상은 내 재량일 뿐.

“자세히 말해봐.”

페르세르크를 압박하던 나는 일순간 그녀에게 가하던 위압을 풀어헤쳤고 그 틈을 타 그녀의 호위대가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지만 나는 구태여 쫓지 않았다.

손을 댈 수 없는 상대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 *

마족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신목의 성지는 다시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마족에겐 특별히 유감이 없다.

나는 늘 말했지만, 마족보다 귀쟁이가 더 싫었던 케이스였으니 말이다.

“우선은 모습부터 드러내는 게 어떨까.”

내 말에 깔끔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내겐 형체가 없다네. 끌끌, 이 세상 전체가 나의 눈이고 나의 귀이니 들리고 보는 거야 아무런 문제가 없음이지. 그래. 기왕이면 관조자라고 불러주겠는가?]

관조자?

생판 처음 듣는 직함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탐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것 보게. 나를 찾는 건 나 스스로도 불가능할 진데 다른 이가 어찌 찾을까.]

“관조자라……”

[일단은 그리 부르는 것뿐이네. 그래, 내 제안은 생각해보겠는가.]

“믿음이 영 가질 않는데.”

들려오는 건 목소리뿐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이와 대화할 때 섣부른 결정은 화를 부르는 법이기도 하다.

[경계심이 그리 많아서야 쓰는가.]

“무턱대고 믿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공짜는 아닐 테고.”

내 말에 관조자는 긍정을 표해왔다.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육신이 없네. 눈과 귀가 있지만, 그것으론 못 하는 것들이 있지. 그러니, 나를 대신해 무언가를 좀 찾아주었으면 하네.]

그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는 짧게 고민한 뒤 메가로드리아를 불러 그 등위에 올라탔다.

“돌아가자. 여기 볼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내 말에 메가로드리아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는지 천천히 네 쌍의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전에 자네가 이곳에서 명심해야 할 사안을 먼저 말해주는 게 좋겠군.]

목소리는 제법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자네는 외부인일세. 그것도 위대한 의지로 온 것도 아닌 불청객이지. 그런 점에서 자네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영향력 행사는 한계가 명확하네.]

그 말을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세계수의 일로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영향력인데 거기에 마왕까지 건드린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밖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가?”

[십중팔구는 그러하겠지.]

“확실하지는 않고.”

그렇게 중얼거려보지만 나 스스로도 알고는 있었다. 실제로 레이나의 경우를 봤으니 말이다.

그녀는 주신 프리아 여신의 의도로 이세계에서 내가 있던 세계로 넘어온 케이스이지만 그럼에도 영향력 행사에 한계가 생겼고 그녀의 존재 자체가 옅어져 갔었다.

“손을 대지 말라라……”

애초에 멀쩡한 세상이 아니니 이런들 저런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리아 황녀의 기억을 어떻게 도와줄 거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창공을 날아 벌써 동대륙의 남부까지 날아왔다.

거대한 대륙을 대각선으로 횡단한 꼴이지만 메가로드리아는 창공의 폭풍 용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환수답게 그만한 속도로 날아오고도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마족들과 흑비룡을 만난 해상도시 발카스에 착지한 나는 메가로드리아를 다시 카드에 넣은 후 그대로 균열을 넘어섰다.

[그 전에 맹세해주지 않겠는가. 도와준다면 자네 또한 나를 도와주기로.]

살릴 방법을 말해줬는데 거기에 대고 뒤통수를 맞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의 그런 제안에 나는 잠시간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리고 에이리아가 잠들어있을 거대 선박의 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나는 잠들어있는 에이리아와 그녀를 둘러싸고 무언가를 하는 미친 광대 놈들을 볼 수 있었다.

“동작 그만.”

내 목소리에 기이한 웃음을 터뜨리며 씰룩거리던 녀석들이 멈칫거렸다.

그리고는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고개를 천천히, 뻑뻑하게 움직여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조용히 지키라고 했을 텐데.”

내 말에 두 녀석이 기겁하며 물러난다.

하지만 한 녀석은 끝까지 내 시선에서 에이리아를 숨기려 했다.

내가 사라진 사이에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욕망에 충실한 놈들이라도 분별이 아예 없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간 나는 필사적으로 에이리아의 얼굴을 가리는 광대 놈을 바라보았다.

“좋은 말 할 때 비켜라.”

“화…… 화하하하하하!”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상황을 무마시켜보려 하지만.

이미 내 손은 놈의 어깨를 붙잡은 뒤였다.

동기화는 장막을 다시 넘어오며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힘으로 돌아왔다 해도 이놈들 하나하나에 밀릴 만큼 약한 내가 아니었다.

쿠당탕!

거칠게 녀석을 떨쳐낸 나는 그대로 에이리아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재밌는 영혼체들이로고.]

그런 상황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곳까지 따라온 관조자는 대놓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런 웃음을 터뜨리는 노인네가 초월적인 존재, 즉 신급의 존재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 손으로 눈을 꾹꾹 지압하며 중얼거렸다.

“셋 다 대가리 박아.”

에이리아의 얼굴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숯으로 기괴한 낙서가 되어있었다.

눈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뽀얗던 코 부분은 새카맣게 칠해져 있었으며 뺨엔 수염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 * *

따다다다다닥!!

“20미터 전진.”

이런 상황에서도 깨어나지 않는 에이리아의 얼굴을 물로 적신 천으로 닦아주며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자 한쪽에 원산폭격 자세로 머리를 박고 있던 놈들이 낑낑대며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한다.

“제일 느린 놈은 40미터 추가.”

내 말에 가장 우측에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가진 광대 놈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더니 옆에 놈들을 그대로 밀쳐버렸다.

쿠당탕!!

우악스런 소리와 함께 동료의 배신으로 쓰러진 놈들이 황당한 듯 바라보지만 이미 바스타드 소드를 가진 광대 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전진한다.

어차피 머리도 빠질 대로 빠진 놈들이다.

머리로 전진 좀 한다고 탈모가 올 일도 없으니 나는 개의치 않았다.

뒤이어 견제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 녀석이 쫓아가지만 한번 벌어진 거리가 다시 좁혀지긴 쉽지 않았다.

아등바등하며 경쟁하는 놈들을 뒤로한 채 조심스레 에이리라의 얼굴을 닦아주던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아가 소중한가?]

“……”

단순 의사와 환자 사이였을 텐데.

실제로 그녀와 나눈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혼자 둘 수 없는 아이를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쯧쯧 머릿속에 잡념이 가득한 게지. 장막을 넘기 전에 보여주던 끝도 없던 힘과 공허함, 광기는 다 어디로 가고.]

“힘에는 대가가 있는 거고.”

내 말에 관조자는 껄껄 웃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기억을 되찾는지 말해줬으면 하는데.”

[그 전에 약속을 해야 하지 않겠나.]

“구두 약속은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게 인간인 걸 모르나?”

[적어도 자네는 다를 거라 보는데.]

눈치도 빠르다.

“내게 피해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야.”

[맹세컨대 그런 건 아닐걸세.]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긍정했다.

“좋아. 한번 찾아보자고. 이틀 정도 남았으니.”

내 말에 그는 침묵했다.

[좋네. 그 정도면 충분해. 찾는 건 지금이 아니라도 상관없네. 어차피 자네는 48시간가량 후 이곳에서 강제로 쫓겨나겠지만 내 눈에 띠인 이상 다시 돌아올 방법은 있으니.]

그는 미련 없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보류시켰다.

[그 아이의 혼은 기억을 대가로 다시 안착하였겠지.]

조용히 설명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으음……”

짧게 신음하는 에이리아의 목소리에 관조자는 설명 대신 침묵을 택했고 나는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를 끌어안듯 받친 채 물었다.

“정신이 듭니까?”

“꺄악!!”

그리고 들려온 반응은 평소와는 달랐다.

깜짝 놀라 버둥거리며 내게서 빠져나간 에이리아는 기겁한 얼굴로 내게서 물러났다.

“누, 누구세요!?”

그녀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한차례 기절 이후 그녀는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을 대가로 완전 지불했고.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망각했다.

그녀는 이 현실을 절대 겪고 싶지 않다고 절규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실제로 보니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내가 무언가 대답하려던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에이리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툭하고 흘러내렸다.

“어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녀의 입에서 이해 못 할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