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1화
적색경보.
륀느는 말없이 침묵한 채 영주성의 꼭대기에 쪼그려 앉아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한사람이 없을 뿐인데 영지는 휑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이틀째.
그가 사라진 시간이었다.
자신이 사라지고 흔적이 없어지면 영지 전체에 적색경보를 때리라던 명령은 그녀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있다.
적색경보.
자신의 주인이자 소유자인 데이비 올 라운은 겉으로 보기엔 영지 관리를 대부분 에이미에게 맡겨놓은 듯싶었지만 실상 에이미가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다.
치안, 법률, 이외에 민생 안전까지.
그중에서 그가 소리 없이 준비해둔 시스템이 바로 경보 시스템이었다.
녹색, 노란색, 그리고 적색.
적색경보는 최후 수단으로 영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고대 유적의 마정석을 이용해 대규모 결계를 활성화하는 힘이었다.
특정 존재의 침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결계는 어떤 의미로 보면 굉장히 허술하지만 어떤 면에선 정말 완벽하다시피 한 결계이기도 했다.
그뿐일까.
하인스 영지가 적색경보 체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륀느는 오로지 그녀만이 알고 있던 매뉴얼을 꺼내 에이미에게 전달했고 에이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그녀가 가진 모든 권한을 이용해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데이비님의 신호가 현재 완전히 끊겼다고 보고. 하지만 사망하진 않았다고 분석해.”
륀느의 말에 거대한 홀에 모인 이들이 침묵했다.
“데이비님이 사라졌다라…….”
가장 앞서있던 대주교 앨리스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일면 목격한 바가 있었다.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20대도 되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소년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힘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런 그가, 심각한 무언가를 감지했고, 영지 바깥 홀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명령을 내리고 사라졌다.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 아니에요? 그 사람이 손도 못 쓰고 당할 정도였다면 이건 거의 대륙급 스케일의 문제인데……”
앨리스의 말에 몇몇 교수진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 말했지만, 또 다른 몇몇은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중 앨리스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낄낄대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팔란 제국의 수석 기사단이었던 올만 경이었다.
분명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교수진으로서 선두에 발탁되어 온 사내였다.
그에 대한 명성은 그녀도 어느 정도들은 바 있었다.
재능 있는 인재가 많은 린디스 제국과 다르게 팔란 제국은 신기술 및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대단한 위세를 지니고 있다.
그런 팔란 제국 내에는 린디스 제국조차 부러워할 만한 인재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 올만 경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재능을 선보였고,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제국 내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한 편이라고 했다.
제국 내에서 최고의 신랑감 후보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실력, 외모, 재력, 나이, 어디 하나 꿀리는 게 있던가.
그런 그가.
“이봐요 올만 경.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히히…… 히히히히.”
대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며칠 잠을 못 잤는지 다크서클이 가득하다. 분명 든든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본 것 같은 데 사람이 앙상하기 그지없다.
감자를 손에 쥐고 실실 웃으며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감자는 내 거야…… 내 거라고, 아무도 안 줘, 내 거야……”
멀쩡할 때도 있지만. 가끔 시동이 걸린 그는……
처참했다.
그대로 감자를 휙 빼앗아버린 앨리스가 그를 걷어차 버렸다.
“정신 차려 이 인간아! 지금 감자가 중요해?!”
결국, 앨리스는 제 성질머리대로 나서고 말았다.
언제 이렇게 성격을 대놓고 드러내 놓고 살아본 적이 있던가.
너무 편안했다.
다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아, 안 돼! 내 감자!”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그가 눈에 불을 켜며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앨리스 교수!!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당장 돌려주세요!”
“하! 정신 안 차리면 이거 내가 다 먹어버릴 건데요?”
그렇게 말하며 방금까지 올만이 조금씩 씹어 먹던 감자를 냉큼 한입 베어 무는 그녀였다.
동시에 올만의 눈에 불이 튀었다.
“아, 안돼! 내 소중한 감자! 이…… 극악무도한!”
동시에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손날을 쳐올렸다.
이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 할 속도의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거의 부모의 원수를 공격하는 듯한 그 공격에도 앨리스는 반사적으로 신성 마법을 펼쳐 그의 공격을 빗겨냈다.
필요한 부분만 강화하는 실전 기술이었다.
이 또한 이전의 앨리스에겐 불가능했다.
단 한 명.
이 모든 것이 그 미치광이 같은 왕자가 만들어놓은 결과물이었다.
“극악무도는 얼어 죽을. 지금 사태판단 못 하고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팔란 제국에 당신 꼬락서니를 그대로 보고하는 수가 있어!”
“윽?!”
움찔거리는 올만을 보며 한숨을 내쉰 앨리스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가에 묻은 감자의 흔적들을 벅벅 닦아냈다.
“사람이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이야 도대체.”
“윽?!”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가 버둥거리지만.
그도 강자이듯 앨리스 또한 강자였다.
그것도, 신의 사랑을 한 번 받은 적이 있던 강자.
올만의 반란은 금세 제압되었다.
“그래서,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이윽고 노령의 마법사 하나가 천천히 륀느에게 말했다.
교수진들은 이곳에 올 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학생을 포함해 하인스 영지에 외적인 부당한 침입이 있을 경우 하인스영지와 아카데미의 존속을 위해 힘을 빌려준다.
그 세부조항은 여럿 나뉘지만, 내전 같은 문제가 아닌 이상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현재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분석, 륀느가 부탁해.”
그 말에 다른 이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좋아요. 일단 나와 사제들은 린디스 제국에서 온 사람들의 치료 상태를 확인하고 말해줄게요. 세상에 대체 불여우 대공까지 그 지경이 되어서 날아오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륀느, 매우 현명한 판단을 높게 평가.”
그들은 알고 있을까.
대륙급 재앙이었던 울드가 나타났고, 데이비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다른 차원에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현재 이들은 삽질하는 꼴이다.
반대로 그들의 노고가 완전히 헛수고는 아니었다.
긴장 태세에 돌입한 하인스 영지의 영향과 륀느의 말을 듣고 수련을 멈추고 합류한 교수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하인스 영지에 한 가지 큰 파장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데이비가 누구와 충돌했는지 누구보다 가장 먼저 눈치챈 은발의 소녀가 적색경보가 터지기도 전에 영지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하고 있었다.
* * *
“멍청한 것!!”
페르세르크는 대놓고 화를 내며 폐허가 된 숲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그녀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그녀가 가진 특유의 힘으로 몸을 띄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폐허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흔적은 남아있었다.
하나는 데이비 특유의 힘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녀에게 익숙한 힘이었다.
밤마다 그녀를 잠 못 들게 하였던 섬뜩한 목소리가 보여주던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더욱 포괄적이고 방대했다.
정신을 침식하는 그 목소리는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고,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현재 그녀는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
마왕의 위에 올랐다면 차라리 심연은 신의 힘이 두려워서라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을 텐데.
데이비가 마왕의 자리를 강탈하고 그녀를 평범한 마족 소녀로 만들어버리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아둔한 것! 본녀가 위험하다 그리 일렀거늘……”
바닥에 쓸린 흔적을 보며 몸을 숙였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데이비에게도 준 적이 없던, 그녀만의 권능을 발현했다.
일단 심연이 뭐가 되었건 데이비가 그녀에겐 중요했다. 현재 그녀에게 데이비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이르러있었으니 말이다.
단순한 친우 문제를 떠나 매번 자신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버리겠다면서 협박하는 데이비의 행동에 그녀도 서서히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실실 웃는 데이비의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옅게 붉어진 그녀였다.
[본녀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네 모습을 모두 보일지어니.]
이윽고, 땅의 기억을 심연의 힘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그녀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동시에, 너무도 오랜 시간 잠겨있던.
또 마왕이 되었었던 그녀가 의지를 쥐어짜 내 억지로 닫아버렸던 무언가가 그녀의 내면에서 열리고 말았다.
* * *
숲 속은 지독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인간, 혹은 숲에 친숙한 엘프는 물론, 숲에서 살아가는 수인 종족들조차 꺼릴 정도로 울창한 숲이다.
어찌 보면 패잔병들이 은신하기에 이만큼 안전한 곳이 있을까.
마기를 다루는 마족들은 청명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숲 특유의 기운과는 조금 다른 역효과를 내고 있으니까.
“흐읍!”
정령 술사의 재능이 있는 것과 별개로 에이리아에게 전투적인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 자신을 향해 날아든 화살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파르르 떨면서도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억지로 이를 악물고 있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손에 쥔 화살을 가볍게 부러뜨린 뒤 조용히 눈을 번뜩였다.
경계심이 가득한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화살을 쏴?
쿠웅!!!
내 의지를 따라 흉포하게 퍼져나간 대량의 마나가 주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중력 마법인 그래비티와 매우 흡사해 보이지만 사실 마법이 아닌 그냥 마나로 짓누르는 효율 떨어지는 짓거리였다.
“윽!”
“끄윽.”
“꺄악!”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에이리아가 깜짝 놀라 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몇몇 남녀들을 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 사람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곧 자신의 얼굴이 이제 흉측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손을 치웠다.
저들은 나와 에이리아를 마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확실히 로브를 덮어쓰고 있으면 마족과 인간의 차이는 사실 그리 크지 않으니 말이다.
“큭…… 멜리사! 도망쳐! 놈들이 우릴 찾아냈다고 알리고 이곳을 벗어나!”
이윽고 한 사내가 긴장한 얼굴로 소리치며 호기롭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으, 으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이런 인간이 최후의 저항군이라고?
기가 막히는 기분이 든 나는 그대로 그의 검을 맨손으로 낚아챈다.
챙강!!!
동시에 그의 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무기부터 새로 만들어야겠네. 너무 무디고, 연약하다.
뒤이어 눈을 부릅뜬 그를 향해 내가 주먹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이 악물어.”
빠악!!
묵직한 파육음에 그는 마치 감전된 개구리마냥 튕겨 나가 추욱 늘어져 버렸다.
[자! 자네, 이제 나설 때이네. 그들을 안심시키게! 그리고 왕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양도받는 게야!]
아니, 왕고가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면서?
[에잉! 서로 좋은 일에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구는가!]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에이리아를 품에 안았다.
“꺅!”
“숲이 험난해서 그냥 못 들어갑니다. 얌전히 있어요.”
내 말에 버둥거리던 그녀가 침묵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녀의 표정은 복잡함이었다.
쓰러진 사내?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촌락을 이루고 무기를 들고 있는 일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집단 대부분이 괴멸당한 이 세계에서 이제 정말 몇 남지 않은 저항군의 상태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처참했다.
군인은커녕 피난민들이 농기구를 들어도 이것보단 상황이 나으리라.
전투력을 기대해볼 수 있을 만한 이들은 처음 나를 견제했던 몇몇이 전부였다.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던 나를 향해 관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넓은 곳에 아직 저항군들이 소수 남아있네. 내가 자네를 이리로 불러들인 것은 나의 목적과 자네의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이지. 오래 걸리지 않지 않는가.]
“이틀 남았습니다. 이 망할 영감님아.”
[가능하다고 보네.]
막연하게 부탁해오는 그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돕기로 결정을 내린 이상 도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힘을 보탠다고 될 게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돕는 것? 무에 어려울까. 그냥 과격파에 속하는 마족들 머리통을 댕강 날려버리면 간단한 것을.
하지만 실상 그게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조금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자네의 그 실력으로 상징적이고 뛰어난 무기를 만들어준다든지.]
그의 말에 내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요. 무기는커녕 싸우는 법도 모르는 약자들인 거 안 보입니까? 레일건이라도 만들어서 저들 손에 쥐여줘요?”
그렇게 말하던 내가 멈칫했다.
레일건?
뭔가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생각이 살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내 생각은 그 무리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여성을 보고 멈춰졌다.
20대 초반의 여성은 만삭의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몰라보게 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