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2화
오합지졸, 농기구를 들고 농성하는 농민만도 못한 전력.
이런 주제에 소드마스터도 가볍게 씹어 먹는 존재들이 드글드글한 마족을 이기겠다니.
내 기준에 서 볼 때 이곳의 적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니 적대세력이라고 하기도 모호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였던 마족들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8서클 마법사는 엄연히 대륙에서 재앙 급의 존재이지만, 그 위 단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영웅 회랑이라는 곳의 영웅들은 모두가 회랑에서 오랜 시간 살며 극도로 강해진 이들이었다.
생전과 비교?
어림도 없는 소리.
정확한 판단이지만 세상에 간섭할 수 없는 그들 중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가 하나라도 강림하는 순간.
이딴 세계의 기준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리라.
심연의 경우는 놈들이 나를 모조리 들여다보지 못한 것처럼 나 또한 그들을 모조리 바라본 것이 아니기에, 조금 복잡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내게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이 세상에 속한 이들에겐 달랐다.
만렙 유저에게 초보자 사냥터의 필드 보스는 지나가면서 툭 건드리면 그냥 죽어버릴 잡몹이겠지만, 게임을 새로 시작한 뉴비들에겐 어쩌면 생사대적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나서면 다 해결된다.
하지만 관조자는 내게 이 이상 과도한 개입은 절대 불가하다 외쳤다.
이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세상을 생각하는 의지체라면 당연, 이세상이 우선일 텐데, 그는 내게 최소한의 조력으로 희망이라는 불씨만을 지펴주고 내 존재가 과도한 영향을 끼치기 전에 떠나기를 바랐다.
[그만!]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한걸음 내딛다가 멈췄다.
[멈추게! 저 여아에게 자네의 존재를 온전히 들켜선 곤란하네! 자네뿐만이 아니라 자네 곁에 있는 저 수인 여아 또한 마찬가지!]
나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게 하라 이건가 싶었다.
“거 요구하는 것도 많네.”
그는 침묵했다. 그러니까 요지는 내가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것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 아니야.
확인을 구하듯 물어보자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오래전 이곳에서 신의 시선을 받은 한 아이가 사라졌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자네도 잘 알 거로 생각하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와 연결된 레이나의 존재를 내게서 어렴풋이 느낀 듯 보였다.
[그 아이가 어찌 되었던가.]
“과도한 개입, 그리고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수명이 다해 사라졌다.”
[자네도 그리되고 싶은가?]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레이나와 내가 위치만 바뀌었을 뿐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레이나의 경우엔 과거로.
나의 경우엔 현재로.
이미 한차례 전례를 봤는데 멍청한 짓을 할 순 없었다.
이에 나는 품에 안겨있던 에이리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모르면 된다 이거잖아, 요지는.
“왜, 왜 그러세요?”‘
당황한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그녀의 전신에 환각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뒤이어 내 몸에도 똑같은 환각 마법을 걸었다.
이제 입고 있는 로브를 벗어도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이는 그녀가 전부이리라.
“절대 제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마세요.”
“이름을요?”
“네.”
“……알겠어요.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를게요.”
나는 나지막이 충고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잔뜩 긴장한 이들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뱃속에 든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는 알아야 했다.
[알면 어쩌시게.]
‘뼈를 분질러야지.’
천마조차 기함을 토했던 개방식 개조형 분골착근의 오의를 보여주리라.
물론, 나라는 걸 들킬 생각은 없다. 동시에 이세계의 물건에 함부로 손댈 생각도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데우스 액스 마키나, 그리고 수르트의 유산에 잠겨있는 청단이와 홍단이였다.
이외에 닉스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화살 등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나는 몇 가지를 걸러낼 수밖에 없었다.
청단이나 홍단이, 혹은 륀느 같은 경우를 말이다.
나는 무조건 이곳을 떠난다. 에이리아 또한 마찬가지. 그렇기에 만약 내가 청단이와 홍단이, 그리고 륀느를 깨우면 그들은 내게서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가치는 단순히 여길 문제가 아니지만 레이나의 꼴을 보고도 그렇게 할 순 없다.
세계를 이루는 규칙은 한번 내게 속았지 두 번은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다른 방식이라도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같은 방식을 신의 도움 없이 두 번?
어림없는 소리.
그뿐만 아니었다.
청단이 홍단이의 경우 이미 내 손엔 두 아이가 있다.
미완성 상태 때부터 이미 청단이 홍단이의 자아는 검안에 잠들어있었으니 지금 수르트의 유적에는 그들의 자아가 잠들어있으리라.
같은 존재가 둘이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
한가지의 소멸이 될 테니까.
륀느는 차라리 잠들어있는 것이 이곳을 떠날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긴 것과 다르게 녀석은 자신의 소유자를 굉장히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누, 누구냐!”
“침입자! 마족이야!”
“젠장 이제 다 죽었어!”
결연한 표정으로 무기를 쥐던 이들치고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다.
절망하는 이들도 있고 그 와중에 무기를 들고 싸우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진입을 대놓고 막는 이는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 때문에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렸다.
관조자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나와 에이리아는 단둘이고 체격도 큰 편이 아니었다.
무기 또한 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극도로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인간인지 마족인지조차 알아보려 하지 않고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마주치면 죽음, 혹은 그에 따르는 끔찍한 미래라는 결정이 내려진 건 아마 저들의 마음속에 있던 저항 의지가 완전히 꺾여버렸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관조자가 내게 부탁한 게 이들의 구원이 아니라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달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걸 이틀 만에 다시 갱생시키라고?’
[자네의 존재는 빛이 되고, 그 빛은 마족과 대칭하는 인간의 마음에 아주 작은 저항의 불씨를 지펴줄 게야.]
모든 일은 머리로 구심점이 되어 모이니까.
혁명의 불씨가 타오른다면 가능하긴 하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한숨을 내쉬자 관조자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울려 퍼진다.
관조자는 내게 인간을 구원하라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과 마족, 그 외에 얽히고설킨 수많은 종족의 밸런스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마족 쪽이 너무 우세.
그렇다면 조금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세계에선 반대로 압도적이지 않나?’
오만하다 할 수 있지만, 마족은 쇠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재 티오니스가 아니던가.
[유일하게 밸런스를 붕괴시키는 자네가 대적자이면서 마왕이기 때문이지. 양측 다 해당하니 밸런스 논할 게 있는가. 자네의 말대로 황금 밸런스가 따로 없군! 허허허! 아주 개판이야 아주!]
내가 온전히 대적자였다면 그쪽 세계의 관조자가 각성하여 밸런스를 맞추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마왕의 위를 먹어버림으로 인해 둘 모두의 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웃긴 노릇이다.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며 내게 가장 익숙한 만삭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두려운 눈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 쥐는 그녀는 파르르 떨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에니!”
이윽고 젊은 한 사내가 후다닥 뛰어와 만삭의 여성, 에오니샤 올 라운을 감싸고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사내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나마 이들 사이에선 재능이 있어 보였다.
눈빛에 여지가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겉보기엔 꾀죄죄해도 어디 상당히 높은 직위에 있던 귀족이나 왕족 출신 같다는 느낌이 든다.
침묵 속에서 나를 경계하는 그들의 행동거지에 나는 말없이 그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에 침을 발랐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데엔 많은 게 필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구라].
혓바닥이 제격이리라.
“자자, 진정들 하고, 무기부터 내려놓읍시다.”
최대한 그들이 진정할 수 있게 나름대로 존대를 해가며 입을 열지만, 불신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짓말! 마족이더냐?! 아니면 마족에 빌붙은 배신자더냐! 우린 네놈의 말을 듣지 않는다!”
배신자야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생각보다 인간들끼리도 골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마족도 배신자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들을 도와주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참을 인(忍)을 한 번 더 새긴 뒤 내가 조용히 말했다.
“웃기지 마라!!! 더러운 변절자 놈! 우리가 또 속을 줄 알고?! 뭣들 하는가! 여자와 아이들을 지켜!!”
또 한 번 새긴다.
스스슥…… 스슥.
그때였다.
나는 빠른 속도로 숲 내부로 진입하는 일련의 무리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콰르릉!!!
동시에 큰 소리가 나며 사방으로 촌락을 가려주던 나무들이 무너져 내렸다.
“꺄아아악!!”
“아, 안돼! 이제 끝이야!”
처절한 비명 속에서 모두가 절망에 빠졌다.
숲에서 이들을 포위하듯 나타난 이들은 상당한 숫자의 마족, 그리고 그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몬스터나 마수 군단이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이들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 쥐새끼 같은 인간 놈들, 여기 숨어있었구나.”
낄낄거리는 마족을 시작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인간들이 와들와들 떨었다.
“임무 중인 터라 모두 지쳐있었는데 아주 잘 되었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서 거대한 늑대에 올라타 있던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족이 소리를 질렀다.
“약탈이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라! 술과 고기는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그가 뽑아 든 검에는 놀랍게도 오러블레이드, 즉 마스터의 상징인 검강이 맺혀져 있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아온 마족들은 전투력 평균치가 확실히 대륙보단 높았다.
무력충돌은 없었다.
애초에 이 촌락을 방어할 병력 대부분이 내 앞에 있기에 그들의 진입을 막을 이들은 없었다.
“데, 데이비님……”
겁에 질린 듯 에이리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파르르 떨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손에 정령의 힘을 조금씩 끌어모았다.
미약하다 해도 자신이 어떻게든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진정시킨 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모른다메.”
[……]
이 망할 관조자는 입이 없는 게 분명하다.
“꺄악!!!
마족들은 당장 죽일 생각이 없는지 촌락민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 중 몇몇은 내게도 창을 겨눠왔다.
“인간! 다치기 싫으면 안으로 들어가라!”
방금은 다 죽인다더니?
나는 등을 쿡쿡 찌르며 나를 위협하는 마족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놈들이 나를 쫓아온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우연이라는 건데, 참 타이밍도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꺄악!!”
공포에 질린 비명에 고개를 돌리자 고작 열네 살 정도 된 아직 어린 소녀가 덩치가 큰 검은 마족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흐. 이년은 내 거요! 건드리면 다 죽여버리겠어!”
그 외침에 다른 마족들은 관심 없다는 듯 하나둘 사람들을 조여왔다.
“키히히히! 이년 보게?! 이런 보석이 아직 남아있었구나!”
그때였다.
명령을 내리던 마족이 시선을 돌리던 중 에이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계급으로 치면 최소 후작급.
다른 마족들은 별 볼 일 없지만, 그만큼은 확실히 실력이 있다.
아마 마족 군단이 대륙 각지로 보낸 사냥꾼들이리라.
와들와들 떨면서 내게 더 달라붙는 에이리아는 상당히 겁에 질려있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할 법도 한데, 그녀는 내게 폐가 될까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다시 관조자에게 쏘아붙였다.
“아니 입이 없어요? 아무도 모른다메.”
[……]
침묵은 금이라는 듯 행태를 고수하는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로브의 후드를 넘겼다.
그리고 내가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촌락의 주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도 무시한 채 나는 에이리아에게 손을 뻗는 마족의 손을 잡았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던가.
세 번째니까 살인을 면하진 못할 것 같다.
“아주 신이 났어.”
우드득!!
그리고는 늘 그렇듯.
익숙하게.
에이리아에게 손을 뻗는 마족의 팔을 으깨버렸다.
단순히 부순 게 아니라고?
아니, 그냥 힘 조절이 쉽지 않아서.
* * *
침묵은 한순간이었다.
“커헉?!”
처참한 비명과 함께 주변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주민의 숫자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마족의 수는 더더욱 많아 보였다.
마족이 무조건 인간과 반목해야 한다는 규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마족은 마족이고, 인간은 인간이니까.
서로 다른 종족일 뿐 태생부터 앙숙일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달랐다.
“이봐.”
내 말에 뼈가 작살이 나버린 마족이 비명을 지르자 나는 거침없이 그의 팔을 잡지 않은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철썩!!!
그리고는 이번엔 적당히 힘 조절을 해 그의 뺨을 쳐올렸다.
“꾸억!!”
처참한 비명과 함께 마족의 입에서 새하얀 이빨 한 개가 튕겨 나갔다.
모두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철썩!!!
이번엔 조금 더 쎄게.
두 개의 이빨이 튕겨 나간다.
“야 인마.”
철썩!!!
이빨이 또 튕겨 나간다.
“아으아아……”
퉁퉁 부어버린 볼과 입으로 무언가 웅얼거리는데 들릴 리가 있나.
나는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그는 내 앞에 힘없이 쓰러져 몸을 웅크렸다.
그런 황당한 상황 속에서 나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마스터급, 그것도 후작급이면 공작 위의 바로 아랫급 마족이다.
강자라는 소리다.
그런 강자가, 이런 촌구석에 숨어있는 인간에게 뺨 몇 대를 맞고 겁먹은 아이마냥 웅크린다고?
마족들의 얼굴엔 얼이 빠져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관조자의 말대로 그놈의 희망의 불씨인지 나발인지 한번 켜보자는 심정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를 주기적으로 짓밟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어?”
퍽!! 퍽!!
아아, 가오가 몸을 지배한다.
[미, 미치광이로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왔냐고.”
퍽퍽!!
“아악!! 그, 그만해!”
상황 판단 전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가 웅크리던 팔을 번쩍 뻗어 내 다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소드마스터고 뭐고 그는 눈앞이 핑핑 도는 이 구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처참한 구타에 방금까지 약탈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던 마족들의 몸이 크게 움찔거린다. 개중 몇몇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이라고?”
“제, 제발…….”
“부대 관리 똑바로 안 하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퍽퍽!!
“그, 그걸 왜 당신이……”
“대꾸 나온다. 아직 덜 맞았구나.”
퍼억!!!
복부를 후려쳤는데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지 그의 입에서 이빨이 또 하나 튕겨 나간다.
숨을 헐떡거리는 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무조건 빌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라고 어깨가 좀 넓어지신 모양이다만 하늘 위에 우주가 있는 법이다.
“죄, 죄송……”
“죄송한 놈이 옆구리 표정이 왜 그러나.”
퍽!! 퍽!
“끄으……”
“끄윽거리면 마족 생활 끝나나?”
“아, 아닙……”
“억울하면 네가 강자 해라.”
“커헉! 죄, 죄송……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달라는 놈이 왜 까불었나.”
퍽퍽!!!
“으어어으어어!”
그가 필사적으로 무언가 외치지만 그는 계속되는 구타에 말을 하기도 힘든 상황까지 내몰렸다.
쾅!!
결국, 피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린 그를 걷어차 날려버린 나는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드마스터란 전략 병기급 취급을 받을 만큼 강하다. 그건 지금 마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움찔거리는 마족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쉽게 쉽게 가자. 남자는 겁탈하고, 여자는 죽이라고?”
[반대로일세! 겉멋이 몸을 지배하더니 아주 막 내뱉는군!]
관조자의 목소리 따윈 내 귓가에 닿지 않는다.
천천히 다가간 나는 평범하게 키가 작은 마족 청년을 향해 슬쩍슬쩍 걸어갔다.
본능적인 공포에 와들와들 떨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손에 쥔 검을 냅다 던지며 도망치려 했다.
스슥…….
“흐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와 거리를 벌리고 있던 내가 일순간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 지근거리에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다음은 네 차례냐?”
동시에 나는 그가 떨어뜨린 검을 천천히 맨손으로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검이 맨손에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리자 그의 눈에는 공포로 인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입에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공포에 절어버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마족도 한 종족일 뿐이다. 마족 병사들과 인간 병사가 다를 건 종족 하나뿐.
그런 그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반대로 아군의 사기에 자립심의 장작더미를 던지는 행동은 간단하다.
상대가 의외로 별거 없다는 걸 보여주면 되거든.
와들와들 떠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내가 천천히 고개를 90도로 살짝 꺾었다.
동시에 내 시선과 마주친 모두가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광기와 충동으로 휩싸여있던 내 몸이 멋대로 한가지 힘을 공명하고 방출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벨리얼을 죽이고 그에게서 양도받은 모든 권능중 내게서 빠져나가지 않고 남은 마왕의 힘이었다.
마왕의 마기는 마족이 금방 눈치챌 만큼 어둡고 강렬한 임펙트를 가지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마기의 반란이다.
내 몸 안의 마기는 선배격인 마나, 신성력, 그리고 사령 마나에 짓눌려있다.
그러다 보니 신참 견습 기사놈이 선임들의 갈굼을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소원수리를 써서 날려버린 것 같은 파장을 불러왔다.
태생적인 문제로 마기를 다뤄본 적이 없기에 아직 마기는 내가 쉽게 다룰 수 없다.
그 탓에 아주 잠깐 세어나간 마기는 이미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다.
순간적으로 새침한 성격의 마나를 이용해 마기를 억눌렀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마, 마왕……”
“마왕님의 힘이다!”
“서, 설마! 마왕이시여!!”
“마왕이시여! 어찌 이, 이이, 이곳에 계시나이까!”
마족들과 내 힘에 휘말려 복종하는 마수, 잠식된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내 힘에 굴종하듯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 뒤에 있던 에이리아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듯 귀엽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주 짧은 침묵 끝에 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뒷짐을 졌다.
“그래, 내가 니들 왕이시다.”
써먹을 땐 써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