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7화
“으읏……. 아, 아파요.”
당황한 그녀의 행동거지에 나는 숨을 짧게 몰아쉬며 말했다.
“황녀가 자초한 겁니다.”
“시,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이미 늦었어요.”
내 말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남은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녀 또한 옷이 달라붙어 상당히 음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런 묘하게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결국 에이리아는 두려움을 참지 못했는지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꼭 깨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텁!
그리고, 내 손은 그녀의 바람에도 무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
옅은 신음과 함께.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이 빙그르르 돌았다.
“엇?”
순식간에 내게서 등을 보인 채로 앉은 꼴이 되어버린 그녀가 순간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둔 후였다.
그리고.
우드득…….
마치 장시간 굳어있던 근육과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깜짝 놀란 비명에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크- 이놈이 손맛.
근육이 뭉친 이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풀고 싶어지는 버릇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웅들.
* * *
숨을 할딱거리며 추욱 늘어진 에이리아를 연못 바깥에 뉘인 나는 가볍게 마나를 이끌어 올렸다.
[드라이]
3서클 마법인 드라이를 사용하자 물기로 축축하던 내 옷과 에이리아의 드레스가 바르게 마르기 시작했다.
침을 흘린 것도 모르는지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에이리아는 곧 뭔가 원망스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흑……, 놀랬잖아요.”
“잔뜩 뭉친 근육을 보면, 풀고 싶어지는 게 버릇이 돼서 말입니다.”
“으읏, 처음부터 말씀하셨으면…….”
“뭐, 다른 생각 했습니까?”
“아, 아니에요!”
깜짝 놀라 그녀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스스로 놀라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몰라요……. 정말 못됐어요.”
울먹거리며 중얼거리는 그녀는 아직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문이 열렸네요.”
마나 신성수는 그녀와 내 몸에 골고루 흡수되어 효능의 끝을 보았다.
이제는 저기에 몸을 담가본들 추가적인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앞으로 한두 명 정도 더 들어가면 완전히 맹물로 변해버리리라.
발그레해진 얼굴로 추욱 늘어진 에이리아를 등에 업은 나는 곧 연못의 반대편으로 열리는 문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좀 전 무릎 위까지 올라오던 수심의 연못이었지만, 내 발이 물에 닿자 마치 바닥이 생긴 것처럼 내 몸을 지탱했다.
“앗!”
그 모습이 신기한지 에이리아가 내게 업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탄성을 흘렸다.
내 발이 닿을 때마다 연못의 빛이 더더욱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를 업은 채 나는 묵묵히 연못을 가로질러 건넜고, 천천히 열린 문 너머로 향했다.
[자네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그래, 이번 방이 마지막일세. 이곳에 은율의 솔방울이 존재할 것일세.]
그 말에 나는 거대한 공동의 끝에 환한 빛을 내뿜는 작은 보석이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솔방울 형태의 보석은 특이한 마나의 흐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기하네.”
현자의 돌이니 기계장치의 신이나 별의별 것을 다 봤지만 이런 특이하게 생긴 물건은 단연코 본 적이 없었다.
회랑의 영웅들도 이런 물건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새삼 놀라운 물건이지만 그만큼 치명적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탐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솔방울이 놓인 제단의 앞까지 다가간 나는 천천히 에이리아를 내려준 뒤 제단 위로 향했다.
에이리아 또한 은율의 솔방울을 바라보고는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름다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광채가 아주 옅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곧바로 돌아가 에이리아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놓았다.
단순 딱밤이 아닌 신성력과 마나를 섞어 그녀의 머리에 침투시킨 것이다.
“아…….”
그러자 탐욕에 순간적으로 일그러져 멍해진 그녀의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제, 제가 무슨…….”
“아름다운 건 대개 독이 있기 마련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요.”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저 솔방울에 홀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읏…….”
그리고는 입을 꼭 다물고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죄송해요. 정신 바짝 차릴게요!”
그 대답에 나는 만족스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통 어지간한 익스퍼터들도 그대로 넋을 놓고 탐욕에 휘말릴 만한 유혹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 특유의 고집과 청렴한 정신으로 버텨낸 듯 보였다.
[은율의 솔방울은 닿는 즉시 흡수가 될 거네. 한번 흡수하면 효능을 완전히 볼 때까지 정신을 잃게 될 테고. 그러면 자네가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 말에 나는 솔방울을 손에 쥐려다 멈추고는 에이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제단 위로 올라가 그녀의 팔을 손으로 잡았다.
“데이비 왕자님?”
“솔방울 옆에 결계가 있어요. 그냥 손을 뻗으면 손이 증발해버릴 겁니다.”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괜찮아요.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 나를 믿고 손을 천천히 뻗어요.”
그녀를 안심시키는 내 말에 그녀가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손을 뻗어 솔방울을 잡았다. 아니 잡기 전에 멈췄다.
휘이이이이이잉!!!!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느낀 섬뜩한 바람이 공동 전체를 감싸며 분위기를 싸늘하게 바꿔버렸기 때문이었다.
“그흐흐흐흐흐흐흐흐.”
“크흐흐흐흐”
섬뜩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이전에 겪어온 어떤 공동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이 마지막 공간 전체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에이리아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공동을 장식하던 거대한 석상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꺅!”
깜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공동의 중앙을 바라보던 거대한 석상들의 동공이 일제히 그녀와 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히, 산자가 이곳으로 왔는가!”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어서 꺼지거라!”
수백 명이 동시에 귀에 대고 소리치는 듯한 그 행태에 에이리아가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보통사람이라면 정신을 붕괴해버릴 것 같은 외침이었다.
이에 나는 빠르게 사일런스 마법으로 에이리아에게 향하는 소리를 모조리 차단한 뒤 석상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쉽게 주진 않겠다, 이거지.”
담담하게 중얼거린 나는 마치 퇴로를 차단하듯 닫히는 거대한 문과,
바닥이 뒤틀리며 일어나는 거대한 토병들을 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인간도 있었고, 수인도 있었다.
마족도 존재했으며, 엘프나 드워프도 있었다.
각기 무기와 갑옷을 입은 그들의 수는 하나둘, 수십에서 수백.
순식간에 공동 전체를 가득 메웠고 나와 에이리아를 포위한 채 일대를 새카맣게 메워버렸다.
쿵!!! 쿵!!!
그리고 그들의 뒤로 공동을 지키듯 침묵하고 있던 거대 석상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제히 무기를 겨누며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의 행동에 에리이아는 어찌할 줄을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가!”
그때, 그들의 틈 사이로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쓴 거대한 토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물건이 무엇이라고 건드린다는 말인가!!”
그의 호통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병장기를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흙더미일 텐데 소리는 마치 금속으로 바위를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대치를 지켜보던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물건 찾았으니 성질대로 엎어도 됩니까?”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가득 찬 토병과 석상들에게 포위당해있으면서도 내 목소리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대로 하시게. 하지만 이들은 이용가치가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건 내가 판단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놈의 세계는 제아무리 내가 모르는 게 튀어나와 봐야 이지 난이도일 뿐이다.
빌어먹을 심연이 간섭해서 꼬일 대로 꼬인 울트라 나이트메어 난이도인 본래 내 세상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토병들과 석상은 엄연히 영혼이 머금어진 형태였다.
즉, 네크로멘서의 죽은 자와 다르다.
보통 사령 술사나 사령 마법을 익힌 리치는 쉽게 다루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 정도에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감고 있던 내 눈이 새카만 빛을 띠었다.
동시에 사령 마나가 조금씩 방출되기 시작했다.
“육신 잃은 영혼 새끼들이 말이 많네.”
“하하하하!! 사령 술사 나부랭이가 감히 우리를 제어하려 드는가!”
“건방지다!”
그 외침대로 보통의 사령 술사들로선 저 상위 영혼들을 감당할 수 없다.
자신을 절대 불사자라 말하던 저주에 특화된 8서클의 리치 클레르 오르판이나.
9서클의 닉스조차. 이들을 다루진 못하리라.
무리하게 상위 영혼을 다루려 들다간 역으로 술자의 영혼이 찢겨 나간다.
하위 사령 술사가 고위 언데드인 데스나이트를 다루지 못하는 게 그런 이유였다.
“확실히. 보통은 다루기 힘들겠지.”
“사령 술사 나부랭이가 다룰 만큼 우리가 하찮은 존재로 보였더냐! 건방진 산 자여!!”
“네놈의 오만이 네놈을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 감히 우리를 제어하려 든 대가로 네놈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길 것이니!!!”
그들의 말을 깨달은 에이리아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들의 말이 맞았다.
보통의 경우로는 불가능한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이놈들은 한 가지를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서히 뿜어져 나오던 사령 마나가 일순간 뒤틀리기 시작한다.
보통의 사령 마나보다 더욱 짙고, 어두운 힘.
더 상위 차원의 힘이 주변을 싸늘하게 짓누르기 시작하자 호통소리가 일순간 끊어졌다.
8서클 리치 클레르 오르판? 9서클 초대리치 닉스?
그놈들과 나를 똑같이 비교하지 마라.
나를 가르친 스승은 모든 차원을 통틀어 단 한 명 존재한 전무후무한 절대자이며,
단신으로 죽음의 끝을 개척한 존재일지니.
[임퍼펙션 데스로드의 이름으로 명한다.]
비록 [로 아이아스] 급의 힘을 발휘할 순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배운 사령 술사로서,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 중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배울 만큼 경지를 쌓아 올렸다.
한때의 첫사랑에 잘 보이기 위해 영혼을 깎는 노가다를 뛴 내게 사령술로 싸움을 걸어?
쿠웅!!!!
내 말에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던 토병과 석상들이 일제히 굳었다.
표정이 굳는 것과 동시에 죽은 자의 절대자가 내리는 명령이 떨어졌다.
[눈을 낮춰라. 미천한 자들아.]
내 목소리가 섬뜩하게 다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