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9화
피조물에게 내려진 금기.
그것은 예로부터 전해져온 절대 범해선 안 될 영역이었다.
[신의 이름 아래에 저주를 내리노라.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며, 영원히 그곳에 갇혀 고통받으리라.]
신에게 도달하고자 한 오만했던 인간.
그들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고, 급기야 신의 분노를 사 저주를 받았다.
산자들은 산채로 신의 힘에 의해 세상에서 지하로 격리되어 망자가 되었으며, 갈 곳을 잃고 영원히 치유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아갈 운명에 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왕은 탄식을 흘렸다.
처음엔 순수한 탐구욕과 문명을 부흥시키겠다는 욕심이었다.
은율의 솔방울 복제만 성공한다면 반드시 문명은 수세기를 발전할 테니까.
하지만 그 결과, 아끼던 왕국민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니 허망함만이 가득할 수밖에.
저주를 받은 그들은 왕국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끝없는 고통 속에 신음했다.
홀로 저주에서 빗겨나간 건 왕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절망했다. 원인은 자신인데, 왜 죄 없는 왕국민이 고통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슬픔에 갇혀 살아가던 그의 앞에 기회의 빛이 닿았다.
그는 꿈에서 어떤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왕국을 떠나 동쪽으로 향하라. 그곳에 대답이 있을지어다.
어떤 방법을 써도 신의 저주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받는 왕국민들에게 약속을 했다.
반드시 돌아와서 그대들을 구원해주마.
그렇게, 동쪽으로 떠났고, 5천 년이 흘렀다.
그러니까, 그는 실패한 것이다.
[동쪽, 그래. 지금은 성국 발샤스가 있는 곳이겠군. 나는 그곳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네. 금기를 어긴 존재에게 내릴 자비는 없으니. 영원토록 눈이 되어 세상의 흐름을 지켜보라. 그 모든 게 신벌의 일종이었던 게지.]
그렇게 프루그레프 왕국, 혹은 문명은 저주를 받아 모든 세상에서 기록이 삭제되었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잊힌 문명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 육신이 바스러진 그곳에 성국이 세워졌다네. 본래라면 나는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것과 왕국민들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런 것치고 지금은 잘도 말을 걸고 있네요.”
[나도 모르네. 무슨 이유인지 간섭할 수 없게 막던 신의 힘이 약해졌음이니.]
그러니까.
내가 금기의 업보를 발현시킨 탓에 신의 영향력이 세상에 약해진 게 기회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본래 세상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지만, 평행 세계에선 신의 영향력이 말도 못할 정도로 약해졌고 그 덕분에 고대의 왕이 이렇게 내 곁에 올 수 있었다.
“날 속인 겁니까?”
[아니, 나는 자네같이 현실적인 성격을 지닌 이가 그들의 고통에 교감하여 그들을 구원해버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지.]
문제는 은율의 솔방울을 가지러 이곳까지 들어온 내가 그의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을 저질러버렸다는 것이었다.
[신의 저주는 신께서 노여움을 거두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네. 그걸 자네가 부숴버린 게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관조자의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에이리아 황녀님이 흡수한 건.”
[은율의 솔방울, 그 원본이네. 저 솔방울을 복제했던 것들은 모두 나의 명령에 따라 파기 되었으니. 세상 그 어디에도 또 없는 진귀한 물건일세.]
현재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물이라는 소리였다.
[신은 내게 저주받아 죽어가는 왕국민을 바라볼 뿐 다가갈 권한을 주지 않았어, 그렇기에.]
“그렇기에?”
[주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네. 죄를 뉘우치고 필사적으로 기도하였네, 그렇게 약 4천 년이 흘렀을 때. 나는 기회를 얻었지,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면 신께서 노여움을 풀 것이라고. 웃기지 않는가?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내게 균형을 맞추라니. 기만이었지.]
저주를 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지만 정작 그는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어떤 간섭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기회가 생겼고.
[그렇네, 갑자기 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이렇게 목소리로나마 간섭할 수 있게 되었네. 그리고 자네를 발견했지. 세상 바깥에서 온.]
그는 왕국의 보물이었던 은율의 솔방울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내 힘을 빌려 신과의 거래를 완수하려 했다.
결코, 이런식의 무식한 방법으로 저주를 해결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대체……, 자네의 정체가 뭔가? 도대체 무슨 수로 신의 저주를…….]
“내가 좀 숨긴 게 많습니다. 그럼, 이제 균형을 맞춘답시고 날뛸 필요도 없겠네요.”
내 말에 그는 침묵했다.
[많은 죽음이 있었네. 그들 또한 소중한 생명 아닌가. 긴장감이 차라리 증오와 복수심으로 점철된 지옥보단 나을걸세.]
오랜 시간 세상을 바라보던 그는 의도하지 않게 세상을 사랑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왕국민들의 저주가 사라져 그들에게 안식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음에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아아…… 아아…… 지배자시여.”
아직 토병의 몸에 깃들어있는 왕관을 쓴 섭정이 내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를 배신한 왕과 다르게 우리를 구원한 위대한 존재시여.”
왕국민들은 결국 프루그레프 문명의 왕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또한 그것을 알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왕국민들에겐 오랜 시간 고통을 받게 해온 자신이었으니까.
“비록 위대한 존재의 도움을 받아 이리 윤회의 길에 오를 기회를 얻었사오나.”
그의 말과 함께 거석상들이 움직이며 거대한 체격을 숙여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수많은 토병들 또한 내게 몸을 숙여 보였다.
“위대한 존재의 은혜를 갚지 않으면 떠날 자격조차 없음이니……”
처음 증오와 광기로 가득하던 목소리는 사라진 청명한 목소리였다.
“부디…… 저희에게 위대한 존재께 도움이 될만한 기회를 하사하시옵기를.”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에이리아에게 필요한 은율의 솔방울은 모두 챙겼다.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간이 없네. 엄한 생각하지 말고 돌아갈 생각만 하게.]
“안 그래도 돌아갑니다.”
[신께서 자네가 이 세상에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다시 부르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그저 우연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
신은 의도적으로 이곳에 나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이곳에 온 것을 확인하고 나를 제재하지 않고 이용했다.
뭐, 결과론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이용 덕분에 나는 더 큰 것을 얻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성불이나 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이.”
“아…… 아아…… 지배자시여.”
고개를 숙이는 그들은 내가 가는 길을 막지 않겠다는 듯 엎드린 채로 내 길을 텄다.
그런 그들을 무시한 채 나는 천천히 에이리아를 안아 들고 던전을 빠져나갔다.
* * *
에이리아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율의 솔방울은 면역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가해진 페널티를 무시할 힘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잠든 에이리아를 등에 업은 채 유적을 빠져나온 나는 유적의 입구까지 와서 나를 바라보는 섭정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다시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내 코로 묘한 냄새가 지독하게 퍼졌다.
무언가의 탄내였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고 숲 저편을 보던 나는 익숙하게 마나를 끌어올려 공간을 그대로 전이시켰다.
콰앙!!!!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거대한 폭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타난 곳의 바로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검은 비늘의 거대한 존재였다.
거대한 괴물, 아니 흑룡은 입에 작은 돼지 한 마리를 물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입을 쩍 벌리고 포효를 흘렸다.
“크아아……”
퍼엉!!!
하지만 놈의 포효는 얼마 가지 못했다. 내가 놈을 지나치기가 무섭게 무언가 뒤틀린 듯 놈의 육신이 그대로 무너져 내려버린 것이다.
“흑룡 헤츨링? 마족이 작정하기라도 했나?”
말끝을 흐린 내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무도 모른다메.”
[그, 그것은……]
“관조자의 시야로 보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알 텐데. 끝까지 중요한 것도 말하지 않으시겠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네.]
촌락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하늘을 메우는 새카만 연기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막냇동생 에오니샤가 있다.
비록 이 세계의 에오니샤는 나와 큰 연관점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오니샤가 에오니샤가 아니게 될 순 없는 법이다.
촌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화마에 휩싸인 촌락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 말에 그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습…… 격…… 하늘에서…… 마족이…….”
그 말을 끝으로 그가 힘이 다한 듯 추욱 늘어졌다.
“말 안 끝났는데 누가 멋대로 죽으래.”
우웅!!!!!
[은총 일시불 부탁합니다. 빌어먹을 여신님.]
[9위계 성마법]
[하이 리커버리]
멋대로 죽지 마라.
순식간에 대규모의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검은 비늘을 지닌 헤츨링급 흑룡들이 날아오르며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흑룡 헤츨링들은 기존의 헤츨링과 다르게 성장이 멈추는 마법이 가해져 있다. 그 탓일까.
새끼임에도 불구하고 새끼답지 않은 힘을 내뿜는 것으로 과거 유명한 전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름은 그림갈. 흑룡부대라 부르며 제법 위명을 떨쳤으니 말이다.
“으읏…… 윽……”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던 사내는 따스한 빛에 휩싸여 다시 정신을 차리자 멍한 얼굴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됐고. 무슨 일이냐고. 말 다하기도 전에 누가 죽으라고 하던.”
내 말에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대답.”
“마, 마족이 습격해왔습니다! 놈들이 촌락민들을 모두 잡아갔어요!”
그의 절박한 외침에 나는 나를 포위하듯 모여드는 수많은 흑룡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해상도시 발카스로 돌아가게. 자네에게 소중한 인연이었을지 모르나 이곳의 인간들은 자네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야. 자네가 희생할 이유는 이제 없네.]
관조자의 조언을 무시한 채 나는 조용히 흑룡들을 바라보았다.
간섭을 함부로 하면 점차 위험해진다.
하지만, 갓 아이를 낳은 에오니샤가 마족에게 끌려갔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끓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 인간이로구나!”
이윽고 흑룡의 등에 타고 있던 마족 하나가 소리치자 나머지 마족 중 하나가 품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내 얼굴을 대조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마법이 풀린 탓에 현재 내 모습은 멀쩡한 본래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찾았습니다! 그 인간입니다!”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치는 그 말과 함께 흑룡들이 나를 포위하고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여기 촌락민들은 어디로 데려갔나.”
내 물음에 마족이 싸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 인간 놈! 네놈에게 말해줄 건 하나도 없다! 다들 브레스를 장전해라!”
그 외침과 함께 흑룡들이 입에 검은 냉기의 브레스를 머금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냉기를 다루는 블루드래곤에서 흑룡이 된 케이스였던 모양이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를 포위한 흑룡 십수 마리와 하늘을 배회하며 빙빙 돌고 있는 흑룡의 수가 수십.
작은 촌락 하나를 밀기 위해 찾아온 것치고는 굉장한 양이었다.
그 말인즉.
이놈들은 나를 찾아왔다는 뜻으로 통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나는 우선 품에 안은 에이리아가 냉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옅은 장막을 펼쳐 그녀를 보호했다.
아무런 대처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내 행동 때문일까, 마족들은 곧 내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는지 멍청하게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참모장께서 네놈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사로잡으라 하셨다. 지금 당장에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 외침에 몇몇 흑룡들이 마치 나를 도발하고 위협하듯 머리를 들이밀고 굉음을 내질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는 흑룡들이 모여들어 있는 이 사태에 절망감을 느꼈는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 끝이야…… 다 끝이라고……”
비록 소드마스터를 개 패듯이 팼던 나라도 이제는 수단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창 다른 힘에 짓눌려 위축되어있을 마기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목숨을 구걸하라고.”
짧게 중얼거린 나와 눈을 마주친 흑룡 한 마리가 굳었다.
“왕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이래 봬도 일단은 마왕이다.
그림갈은 마왕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흑룡들이고.
그러니까.
너희들 다 내 거라는 소리다.
“모두 조아려라.”
조용한 내 목소리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 끝에 흑룡들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크아아악!!!
등에 타고 있던 마족들을 튕겨내 물어 뜯어버린 흑룡들이 가지런히 내려와 얌전하게 내 앞에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남은 마족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경악한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흐, 흑룡들이 어째서……”
“어째서긴. 왕이 명령하는데 제깟 놈들이 무슨 수로 거절해.”
내 말에 그들의 얼굴에 혼란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