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7화
“어…… 어어어?!”
마족들 사이에서 당황한 음성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사방 지면이 뒤집혔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토병들은 하나같이 용맹했고 기습적이었다.
별것 없어 보이던 토병의 무기를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막아보지만.
쩌억!!
마족의 방패는 마치 맹렬한 톱날에 갈린 것처럼 잘려나가며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으악! 바, 방패가!!”
그리고, 그렇게 노출되어버린 이를 놓치지 않고 토병은 우악스럽게 마족의 멱살을 낚아채 그를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화력!
순식간에 밀어닥치는 토병의 군세는 언뜻 보아도 이미 마족의 숫자를 압도하는 양이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마족, 마수, 그리고 잠식된 몬스터들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그들의 공격성은 실로 우수했다.
“노, 놈들을 막아!”
당황한 마족의 지휘관인 크리드의 외침이 급박하게 울려 퍼졌지만, 마족도 자신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위력을 지닌 적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포위한다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어어어어어!!!”
그래도 정신이 지배된 몬스터들의 경우는 나은 편이었다.
온몸에 검은 문신이 새겨진 오우거 한 마리가 몽둥이를 사방에 휘두르며 토병들의 접근을 막아선다.
잠식된 탓에 겁이 없는 몬스터들의 맹공에 그나마 버텨내는 듯싶었지만…….
지잉…… 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샛노란 광선이 일순간 일대를 휩쓸며 미친 듯 몽둥이를 휘둘러 오던 오우거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아니 반으로 가른 게 아니라 중앙을 증발시켜버린 것과 비슷했다.
실제로 광선이 지나간 지면은 새카맣게 익다 못해 고열로 흙이 변질해 크나큰 흉터를 남겨놓았다.
“미, 미쳤어……, 이게 뭐야.”
뒤이어 등장한 것은 땅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10여 미터에 달하는 거석상들이었다.
황색의 동공을 빛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벽처럼 보일 만큼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태에 당황한 것은 마족뿐만이 아니었다.
저항군으로 추측되던 남녀들 앞에는 갑작스레 나타난 나와, 내 명령에 따라 나타난 존재들의 모습에 공포를 넘어 경악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군……. 내 왕국민들은 이곳의 존재이지. 저들은 자네에게 자유를 선사 받았지만 스스로 빚을 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
저들은 이제 자유의 몸으로 나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사멸할 수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남아 나를 돕기를 선택했다.
결국, 대신 싸워줄 수 있는 이가 있는가였다.
솔직한 말로 내 존재 자체가 가져오는 영향력이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 행동으로 인해 파생된 것들이 변화를 가져오면 아무런 제약이 없다.
퍽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밋밋한 시스템이 아닌가.
관조자의 말대로라면 내가 영향력에 상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날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이 시간만큼은 소중하게 써야 했다.
슬리지아가 이번 일을 단순 유희 거리로 생각했다면 그녀는 한동안 스스로 나서지 않고 간만 볼 테니 말이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정리를 당하자 토병들을 베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리던 지휘관 크리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리아를 등에 업고 있는 나는 처음부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네놈……, 네놈이구나!!”
급기야 내 존재가 이 사태의 원흉이라는 것을 알아낸 그는 손등에 장착된 단검으로 내 심장을 찌르기 위해 빠르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그극 카앙!!
그가 내 지근거리에 닿기도 전에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손이 그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대로 그의 손을 낚아채 그의 움직임을 봉쇄시켰다.
“이깟 돌덩어리 따위가!”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그가 오러블레이드를 뽑아낸다.
순식간에 거석상의 팔이 잘려나가는 듯싶었지만, 아주 짧은 틈 사이에 이미 결판은 난 후였다.
신의 저주를 받아 약 오천 년 가까이 증오와 고통을 쌓아온 그들은 망자이면서 초대 리치 닉스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 할만큼의 상위 망자가 되어있었다.
하나하나가 괴물 같은 존재라는 소리였다.
푸욱!! 푹푹!
순식간에 다가온 왕관을 쓴 섭정 토병이 흙으로 된 장검으로 그의 심장을 뒤에서 찌르자 뒤이어 토창들이 일제히 날아들어 그의 몸을 관통했다.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굳어버린 크리드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할 정도였다.
보는 놈이 없으면 암살이라고 했던가. 제법 싹수가 좋은 마족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순식간에 마치 해일이 밀려오듯 적들을 쓸어버린 토병들은 곧 내게 다음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 시선을 모아 보냈다.
하나같이 지하유적에서 자유를 얻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리가 끝난 마당에 더 시킬 것도 없었기에 나는 돌아가라 명령을 내렸고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던 그들은 마치 온데간데없어진 것처럼 그대로 바스러지며 다시 지면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당분간은 나를 대신해서 손발이 되어줄 그들의 존재는 지금으로썬 상당히 고마웠다.
이후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족들에게 제압당해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익스퍼터가 셋, 마스터급이 하나.
그래도 실력가들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당신은 대체……”
굳은 듯 중얼거리는 여성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녀가 유리스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건 그것이고.
“은신처로 안내해.”
“뭐, 뭐라고요?”
“목숨 구해줬으니까 빨리 보답하라고.”
뻔뻔함의 극치!
내 협박 아닌 협박에 여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 * *
본래 목표였던 악명높은 마족 지휘관인 살수 크리드.
그를 죽이기 위해 몇 달을 걸쳐 공작을 준비했다.
소드마스터급의 힘, 거기에 은밀함과 더불어 상위 마족에게 받은 아티펙트 때문에 보통 소드마스터들도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악랄한 존재가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유리나는 자신의 팀장이었던 사내가 매번 하던 말인 그를 죽여야 한다는 입버릇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크리드라는 마족은 다른 병단을 이끌며 저항군들을 토벌하는 마족과 다르게 거의 단일행동을 자주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그는 혼자라는 이점을 이용해 수많은 공작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유리나의 고향 또한 그러했다.
유리나가 따르던 단원의 단장 또한 소중한 아내를 그에게 잃었다는 모양이었다.
딱히 아녀자를 욕보이는 성미를 가진 마족은 아니었지만, 그가 휩쓸고 지나간 뒤, 뒤따라 뒷정리를 하러 들어온 마족들이 생존해있던 아내를 발견해, 그 결과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는 모양이었다.
고작 이 작은 상자에 목이 잘려 들어가고 있다니, 허탈하게만 느껴져 왔다.
대체 저 남자는 무엇일까.
유리나는 시선을 힐끗 돌려 자신을 따라오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겉보기 외형은 인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소년의 몸 안에선 어떤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어떤 힘도 없는 일반인이다.
어떻게 이런 일반인이 이 위험한 대륙을 홀로 돌아다니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소년을 호위하듯 나타났던 그 수많은 토병들.
사령술사의 마법과 비슷하지만 토병은 망자가 아니었다.
골렘이라고 보기엔 너무 생동감이 넘치는 존재들이었다.
대체 그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기에 이 소년을 따르는 것일까.
무엇보다.
저 소년 같은 존재는 지금까지 없다가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것인가.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감돌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관이자 단장이었던 사내는 죽었고 이제 이 별동대의 지휘권한은 유리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개인의 판단하에 소년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가장 위급할 때 손을 내밀었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은 인간과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단장님.”
“……”
“단장님.”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던 유리나는 자신을 부르는 남성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음. 왜?”
“도착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 일단 들여보내자. 어찌 되었건 인간이고 우리를 도왔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만약 그가 정말 우리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난 그를 이용할 거야. 그리고, 저 소년이 업고 있는 수인족은 몸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거든.”
소년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하며 대화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소년의 시선이 유리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빨리 좀 들어가지? 계속해서 업혀있어서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가 있을 건데.”
정작 소녀를 계속해서 업고 있는 자신은 힘든 기색이 전혀 아니다.
워낙에 가벼워 보이니 큰 문제는 없겠거니 생각하며 유리나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은신처의 문을 열었다.
우웅.
마나석이 반응하며 마법진이 발현되고 굳게 잠긴 문이 뒤틀리며 환영이 사라졌다.
은신처에 숨어서 사는 이들은 대부분 전쟁의 피해자들이었다.
* * *
이곳에는 나름대로 볼일이 있었다. 은신처는 거대한 바위협곡 아래에 위치한 지하 동굴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굴을 잘도 발견했는지 입구부터 세심하게 숨겨둔 노력이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이곳은 아직 남아 복수하고 있는 저항군 세력 중 가장 큰 곳일세. 대부분이 이곳과 연이 닿아있지. 자체적으로 무기를 수급하고 약초와 식량을 재배하거든.]
‘제법이네요. 기술자가 남아있었던 겁이니까?’
[운이 좋아서 목숨 몇 년 연장한 꼴이지.]
인간, 드워프, 수인, 오크 등등.
이외에 여러 이종족들도 보였다.
마족이 대륙을 침공했을 때.
마족에게 맞서서 싸우겠다며 힘을 합쳤던 종족들이었다.
“어이 유리나, 살아 돌아온 걸 보니 반갑구만.”
“그렌 아저씨.”
반들반들한 두상을 가진 거구의 오크가 다가와 유리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크들은 민머리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모습인데, 새삼 저들은 탈모 저주가 완전면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리나는 그의 떡 벌어진 녹빛 가슴에 주먹을 가볍게 치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살아서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게요. 살아 돌아왔네요.”
유리나의 대답에 그렌이라는 오크는 말없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혀를 찼다.
“벨치스는 떠났나 보군.”
“낙원으로 말이죠.”
신을 찬양하지 않는다. 유리나와 그렌의 대화에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보아하니 생면부지 처음 보는 인간이 있는데.”
“아, 밖에서 구조해온 사람이에요. 수인 한 명에 인간 한 명. 수인 쪽은 무슨 이유인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잠들어있었고요. 자세한 내용은 보고 후에 알려줄게요.”
“그래. 기대하지.”
피식 웃으며 지나치는 오크, 그렌을 향해 유리나가 실소를 흘렸다.
“다음번엔 만족할만한 죽음을.”
“네게도 만족할만한 죽음을.”
죽음을 상정한다.
이들에게 마족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죽는 순간 최대한 만족스러울 정도로 많은 적을 끌고 가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들의 단원을 해산시키고 나와 에이리아를 작은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여긴 제 숙소에요. 일단 그 수인 소녀분은 여기 눕혀주실래요? 모르긴 몰라도 일단 의원분들이……”
“아니, 의술은 나도 잘 아니까 신경 꺼.”
담담하게 말한 내가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거대나뭇잎을 겹쳐 만든 침대에 눕히자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당신 의사예요?”
“그래.”
정확히는 의사도 겸하고 있는 것이지만.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아니……, 의사가 그 토병들을 이끌고 다닌다고?”
의아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고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 됐구나.
내 생각이 맞아떨어진 듯 이윽고 잠들어있던 청록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수인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데이비님.”
데이비 님?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