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8화
위험한 직감이 울린다.
나는 낭랑하게 나를 바라보는 에이리아의 얼굴에서 의문을 느꼈다.
의문.
그러니까.
“저……, 뭔가 머리가 울리는데 잘 된 건가요?”
본래대로라면 그녀는 이 말을 해서선 안 됐다.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
쓴 표정을 숨긴 채 천천히 묻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려 했다.
툭…… 투둑…….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영문 모를 눈물이 전부였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또 눈물이.”
손등으로 투명한 눈물을 닦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은율의 솔방울은 면역의 힘을 지니고 있다.
관조자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기억은 삭제가 아니라 봉인이니 면역이 되는 순간 갇혀있던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변화는 없었다.
관조자가 거짓말을 했는가.
[아닐세…… 거짓말은 아니야.]
‘그럼, 기억이 그냥 삭제된 겁이니까?’
[그것도 아닐세. 본래대로라면 되어야 해.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관조자는 짧게 신음한 후 조용히 대답했다.
[모종의 힘이 그녀의 정신에 락을 걸었어. 이 경우……]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나로서도 지금은 모르겠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보시게. 내 방법을 찾아볼 터이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잔뜩 굳은 얼굴로 내가 쏘아붙이자 근처에서 나를 바라보던 유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 정신은 멀쩡하죠?”
“적어도 시체보단 멀쩡해.”
내 비아냥에 그녀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그녀가 내게 주먹을 뻗어왔지만, 그녀의 주먹이 내게 닿기도 전에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토병 하나가 그녀를 점하고 뒤에서 포박하여 그녀를 제지했다.
[위대한 지배자시여, 죽일까요?]
섬뜩한 질문을 해오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으, 으읏! 이, 이건 또 어디서 나타난……”
당황한 그녀가 털썩 주저앉자 토병은 말없이 그녀를 보다 한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한번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건방진 인간, 위대한 지배자께 두 번의 무례는 없다는 걸 알아둬라.]
“저, 저 토병이 뭐라고 말한 건가요?”
“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
그 말에 관조자의 설명이 돌아왔다.
[자네는 내 덕에 언어가 통역되고 있지만, 저들은 고대의 언어를 모를 수밖에.]
그렇구나. 결국, 토병들의 말은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 언어체계. 제게 양도 좀 해주세요.’
[자네. 내가 어디까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슬슬 알아채고 있구먼.]
‘그거면 됩니다.’
돌아가서도 써먹어야지요.
“이 은신처를 관리하는 이들은?”
“원래 저항군은 5원로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전 대규모 참상 이후 지금은 두 분이 전사하시고 한 분은 행방불명이 되었구요. 지금은 2원로분만이 남아 이곳으로 피난 왔죠. 다들 그래요. 하나같이 언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씁쓸한 말에 나는 담담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왜 싸우나?”
“네?”
“무기를 들어봐야 무슨 의미냐고. 당장 튀어나가서 마족에게 목만 내밀면 알아서 날려줄 텐데.”
“당신……,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거에요?”
꽈아아악.
“꺄악! 자, 잘못했어요. 이거 놔주세요!”
순식간에 튀어나온 섭정 토병이 기묘한 자세로 그녀를 제압했다.
분명 코브라 트위스트.
[건방지다! 이년!]
“꺄아아악!
섭정 토병의 외침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나의 행동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
내게 반항하는 존재만 생기면 곧바로 튀어나와서 저렇게 응징을 가하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됐어, 물러나 있어.”
[하지만, 지배자시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말에 그녀가 눈물 고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흙으로 만들어진 골렘에게 이렇게 치욕을 당하다니…….”
“죽고 싶으면 그냥 그대로 반항했어도 될 텐데.”
“……죽을 거예요. 언젠간 죽겠죠. 하지만, 그렇게 죽더라도 나는 마족과 싸우다 죽지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완전히 희망 줄이 끊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그 원로라는 양반에게 안내해.”
“대체 뭘 하려고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쓰읍! 아, 알았어요! 일단 물러나요!”
당황한 그녀가 다시 나타난 섭정 토병을 경계하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작은 지하오두막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두 명의 노인이 조용히 보드게임인 [올드]를 두고 있었다.
“3팀 유리나 복귀했습니다.”
“흐음……, 돌아왔구나. 헌데 벨치스가 아닌 유리나 네가 보고를 올린다는 건……”
“네. 전 단장인 벨치스는 만족할만한 적들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축복할 일이구나.”
상당히 뒤틀린 대화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나는, 유리나가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하고 나서야 한발 나섰다.
“흐음, 믿기 힘든 이야기군. 솔직히 너무 믿기 어려워…….”
나를 바라보는 두 노인의 눈에 의문과 경계가 어린다.
“자네 같은 존재가 이제 와서 나타났다는 것도 솔직히 믿기 힘들어. 내 입장에선 마족이 우리를 말살하기 위해 암살자를 만들어 보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성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어쩐다라…….”
쓰게 웃어 보인 그가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목재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복수를 하고 죽는다. 세상은 이미 마족의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 희망은 남지 않았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면 차라리 검이라도 휘두르고 죽겠다는 게지.”
그런 주제에 왜 이길 생각은 하지 않는가.
“싸울 의지는 있다 이겁니까?”
내 물음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묻는 의도가 무엇인가.”
“적어도 시체와 연합해서 큰일을 쳐볼 생각은 없어서 말입니다.”
에이리아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짜증이 솟아있던 참이라 나는 상당히 공격적인 언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안 그래도 일이 꼬여서 지금 상당히 기분이 저조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마족을 몰아내고 당신들의 삶의 터전을 유지할 힘을 빌려주겠습니다. 따를 겁니까. 아니면.”
다 죽을 겁니까.
이어지는 내 말에 그가 침묵하며 나를 바라본다.
“다 죽을 겁니까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유리나의 말을 들어보면 토병을 다루는 자라고 하였는가. 그 재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네만, 자네가 죽인 크리드는 마족들 사이에서도 상위 강자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존재일세.”
“압니다.”
“안다고? 그렇게 잘 아는 인간이 그런 무모한 발언을 하는가? 눈이 있으면 오는 길에 보았겠지. 어린아이도 힘없는 여인도 있었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생각하나.”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까 그렇겠지요. 인간의 수는 극도로 줄어들었는데 마족들은 아직 건재하니까.”
내 말에 그는 침묵했다.
“알고 있으면 물러가게. 자네가 인간이라면 적어도 이곳에서 머무를 수는 있게.”
“이길 수 있게 해 드리죠.”
“뭐라……”
내 말에 그가 멈칫하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눈빛은 의심이었다.
“자네.”
“나는 두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선택권을 줄 때 잘 생각하세요. 노인장의 말대로 아이와 여인들도 있는 이 마당에 그렇게 시체마냥 살다가 죽어 나자빠질지.”
“자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나를 도와 발악이라도 한 번 더 해보다 죽던지.”
무언가 쏘아붙이려던 그가 다시 침묵했다.
내가 다시 그의 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복수라는 일념하에서 살아가는 당신들이라면 적을 알고 나를 알고, 준비해서 끌고 가더라도 최대한 많이 지옥 불구덩이에 처박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말입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저 묵묵히 나를 지켜보았다.
“가능성이 있다? 자네는 지금 적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자네는 이 대륙의 현실을 본 적이 있는가? 그걸 보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게지!”
“기가 막히는 건 이쪽입니다. 어차피 뒤져 나자빠질 목숨 그냥 최대한 적을 많이 쳐 죽이는 데 쓰시지요. 그럼.”
“이봐! 원로님께 무슨 말버릇이야!!”
참다못한 유리나가 씩씩거리며 내게 화를 내고 다가왔다.
하지만 일정 거리까지 다가오자마자 무언가가 떠오른 듯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왕관을 쓴 섭정 토병이 그녀의 행동이 불순할 때마다 나타났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던 그는 곧 눈을 천천히 감았고 이내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이 암담한 판도를 엎을 수 있다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인가?”
“제가 다루는 이들이 좀 유능합니다.”
그것도 많이요.
닉스도 죽었고, 남은 최대 전력 중 하나인 페르세르크도 현재엔 슬리지아의 힘에 제압당해있다고 한다. 남은 마족들은 현 마족대공 아스타로트와 급진파 뱀파이어의 수장인 글러트니가 전부.
마족을 장악한 슬리지아는 전쟁유희에 빠져 마족들을 이용해 나를 압박하는 데에 재미가 들렸다.
관조자의 말대로라면 여태껏 봐왔던 심연들과 다르게 그녀는 다른 무언가를 강제로 잠식하고 강화하는 힘은 없다는 모양이었다.
우연히 마족들 틈에 숨어서 목숨줄 연명하고 있는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선 그녀가 펼쳐둔 게임판 위에서 신나게 그녀를 털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전략 전술.
그것도 어떤 의미로 보면 보드게임과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대륙의 황제나 대현자 조차 손도 못 쓰고 백기를 들어버린 전략 전술의 수 싸움일 뿐이다.
첫 말의 시작은 왕의 일보로 시작되리라.
모든 것은 이끄는 자가 움직이는 대로.
물론 나는 이 되먹잖은 전쟁 놀이를 오래 끌 생각도, 내가 직접 나설 생각도 전혀 없었다.
싸우는 것은 프루그레프 왕고에서 오랜 시간 고통받아왔던 왕국민들의 혼령과 새로이 유입된 인간 연합군들이다.
계속되는 눈싸움 끝에 백기를 든 것은 노인이었다.
“자네가 원하는 바를 말해보게.”
“이곳에서 멀지 않은 마족들의 전진 요새에 인간 포로가 대량으로 수용되어있습니다. 무주구즈라는 마족이 그들을 모아두었거든요. 그 수는 약 수천 정도. 물자가 부족하긴 하겠지만 일단 그곳의 생존자들을 규합하시죠.”
“마족 전진기지와의 싸움이라……, 자네가 하겠다 이건가?”
그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누가 싸운답니까?”
알아서 말을 들어주는 녀석인데 그냥 인계받으면 되지.
단 한 명이 작정하고 간접개입을 시작한다.
나의 참전으로 인해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황이 뒤틀리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 * *
마지막 남은 저항군.
아니 저항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세력과 목표만이 남아버린 이 집단을 이끌어나가던 멜버크 아크튜러스는 고작 이틀 만에 벌어진 변화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워낙에 뜬금없는 일이었기에 사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류는 마족에게 패배했고, 저항군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를 미래만을 기다리며 그사이에 최대한 많은 마족을 길동무로 만드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단 한 명이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일주일 사이에 많은 일이 변한 것이다.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마음속에 어둠을 품고 있던 은신처 피난민들의 얼굴에는 이제는 어쩌면 정말로 마족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아주, 아주 조금씩 싹을 트기 시작했다.
쾅!!
“마족 2개 병단이 진입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소드마스터급 전력 한 명과 익스퍼터급 전력 150명! 그리고 잠식된 거대 몬스터 무리가 포착됐어요!”
“깡그리 빼고 물러나. 1번 2번 3번 요새의 물자는 그대로 두고 병력만 물린다. 뭐해. 잽싸게 움직여.”
“네?! 어, 어떻게 노획한 물자들인데…….”
“두고 보면 알아.”
저항군들의 마지막 쉼터였던 이 은신처에서 느긋하게 앉아 상황을 관망하는 데이비라는 이름의 이 어린 소년은 솔직히 무서울 정도였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변화시켜버렸다.
직접 전장에 나가지도, 직접 전장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최대 이점을 챙길 수 있는 지형과 기상천외한 전량을 보여주며 추가로 이곳에 투입되는 마족 부대들을 모조리 탈탈 털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또 어떻게 한 것인지 마족 하나를 제대로 구워삶아 그를 스파이로 써먹을 겸 본성으로 보내버리고는 수천 명에 달하는 인간, 드워프, 오크, 수인 등등 수많은 종족을 구해오기도 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가볍게 워밍업하는데 벌써 들뜨지 마세요.”
싸늘한 목소리로 일대 지형의 모형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단순한 보드게임을 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