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2화
거대한 종양 덩어리가 만들어냈던 불에 휩싸인 갑옷 괴물.
그 괴물은 슬리지아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그런 탓인지 그 정신체는 독립적이면서도 슬리지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땅을 잠식하던 그녀의 흔적이었던 탓일까.
“음? 조금 특이한 불꽃이네?”
촤르르르르륵!!
그 말과 함께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갈색빛의 날카로운 촉수 다발이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온다.
내 손에서 만들어진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묘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일렁여야 할 화염은 마치 칼날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구체를 만들어냈고 마치 거대한 고리를 가진 토성이 자전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변신 중엔 얌전히 맞을 것이지 거기에서 반격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싸가지야.”
푸확!!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내가 놈의 몸체를 잡아 비틀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잡아 터뜨릴 듯 손을 뻗는 괴생물체를 향해 손에 머금어진 초소형 폭탄을 그대로 처박아 넣었다.
치지지직.
맹렬하게 회전하던 푸른 화염은 곧 놈의 육신으로 스며들었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놀라울 정도의 생김새와 화력을 내뿜던 것과는 별개의 결과에 변신을 계속해서 해나가던 괴생물체.
아니, 그 괴생물체에 정신을 연결하고 있는 슬리지아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 뭔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나 봐?”
“흐음…….”
“당연하지. 다른 더미와 다르게 이 육신은 그래도 제법 신경을 써서 만들었거든. 벌레들이 물어본들 아프다고 울 순 없잖아?”
그 도발에도 나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거 안 좋은데.”
“뭐?”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 것인가.
“힘 조절 실패했다.”
이러면…… 안 좋은데.
키이이이잉!!!!!!
동시에 괴생물체의 살점 속에서 푸른 빛이 회오리치듯 존재감을 흩뿌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바닥에 내리쳐 공간을 전이시켰다.
투웅!!
아주 먼 곳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이마법으로 수 킬로미터는 날아온 듯싶었는데 그 소리가 역력히 들려온다.
곧바로 바닥을 박차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자 저 멀리서 둥근 먼지 바람이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시간이 더 흐른 뒤 먼지 구체는 곧 살아있는 것처럼 뒤틀리기 시작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내 앞에 단단한 실드 마법을 펼쳤다.
쩌엉!!!
실드 마법이 펼쳐지기가 무섭게 무색, 무취, 무형의 무언가가 날아와 실드를 강타한다.
지면이 흔들리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나온 충격파는 일대의 마그마 지대를 완전히 부숴버리며 쏘아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눈을 멀게 할법한 거대한 광원과 그 빛에서 쏟아져나온 열이 일대를 빠르게 녹여 나갔다.
어마어마한 강풍과 충격파가 쉴 새 없이 실드 장막을 후려치기를 한참.
서서히 멎어가는 힘을 보며 나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가 가볍게 튕겼다.
투웅!!
동시에 공간 전이마법이 펼쳐지며 내 신형이 본래 있던 곳으로 빠르게 이동되었다.
“목숨 줄 질기네.”
내 눈앞에 보인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크레이터, 그리고 그 중앙에 널브러진 살점 덩어리였다.
8서클 화염 마법인 프로메테우스를 역회전 서클로 변형하여 만든 일격은 분명 강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름 그대로의 위력일 리는 없다.
정말로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한 인물은 내가 아니니 말이다.
이 마법의 경우 엄연히 비슷한 현상을 보고 빌려온 이름일 뿐이었다.
[놀라울 지경이군.]
“대충 이 정도면 추가적인 문제는 없겠죠.”
[일단 그 살점 덩어리는 이제 없네만, 정말 어마어마한 생명력이로군.]
육안으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공격이었지만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간 파괴력은 핵분열 수준의 위력이었을 텐데.
[그극…… 그그그극……]
이윽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살점 덩어리는 과도한 힘과 무리한 재생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침묵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또 없어요?”
다른 곳은 이미 슬리지아의 손이 닿았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안 된다.
이 세상 자체가 뒤틀려 있는 마당에 더 많은 변수가 생긴다면 단순 이쪽 문제를 넘어 심각하게 변질하리라.
무엇보다 이곳에선 슬리지아가 숨겨놓은 종양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 존재하지 않던가.
생각해보니 왜 본래 세계에서의 관조자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는가.
[자네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했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
첫 번째 조건만 따진다면 에이리아나 레이나도 같은 변화를 겪어야 한다.
그렇기에 둘째 조건이 중요했다.
“둘째 조건도 있을 텐데요?”
[자네는 운명의 흐름을 볼 수 있지 않나.]
이럴 거 같더라니.
결국, 관조자와 대화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들린 나 하나뿐이라는 소리였다.
가능한 존재라면 세계수 [알]이 만약 이곳으로 넘어온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꽝이네.”
짧게 중얼거린 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적들이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그래? 그럼 출발해.”
모조리 쓸어버려.
그 말과 함께 섭정은 사라졌고, 나 또한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리며 공간을 뛰어넘으려 했다.
쩌엉!!
갑자기 일대 공간이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하하하하하!! 걸려 넘어갔구나!”
광기까지 어린 그 웃음소리에 내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슬리지아?”
분명 주체를 날려버렸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곧 목소리가 들려온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추욱 늘어져 있던 살점 덩어리였다.
살점 덩어리는 분명 죽었지만, 그 내부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기어 나왔다.
그리고는 내 지근거리로 서서히 다가왔고 이내 녹색 빛의 체액을 뿌리며 터지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녹이는 끔찍한 산성이었다.
푸쉬이이이익!!!!
지면에 튀어나온 바위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던 내게 슬리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택해. 내 종양은 다시금 일어날 거야. 인간을 지킨다면 종양은 깊숙이 숨어 너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안착할 거고, 반대로 종양을 잡는다면, 지금 맹렬한 공세를 받는 인간들은 몰살당하겠지? 자! 너라면 어떤 결정을 내려줄까!”
마치 함정이라는 듯 말하는 그녀의 외침에 나는 살점 덩어리에 검기 다발을 먹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미안한데 난 둘 다 고를 거다.
* * *
50만이라는 대군.
그 어마어마한 숫자 속에서 모두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기본적으로 잠식된 몬스터, 마수, 마족, 뱀파이어 등등 수많은 적이다.
그 수는 무려 50만.
게다가 그 사이사이엔 희귀종이라 불리는 거대 몬스터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 몸집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 몬스터들이 거대한 공성 병기를 이끌고 오는 모습은 말 그대로 효율 최악의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괴물들을 앞세우는 이유.
압도적인 공포로 찍어눌러 버리기 위해서.
애초에 상대 마족을 조종하는 건 페르세르크가 아니라 그녀를 제압하고 마족들을 멋대로 주무르기 시작한 슬리지아다.
그녀는 이 전쟁을 그저 소꿉장난 정도로 여기고 있으니 그 과정이 비효율적인 건 당연했다.
반대로 인간의 경우는 상황이 열악했다.
각지에서 숨어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기술자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무구와 전쟁 도구를 만들어내지만 사실상 그 숫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다만 인간 측도 믿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수많은 전공의 배경인 천연요새와 압도적인 힘을 지닌 토병과 거석상들.
그들이 뭉치면 소드마스터도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제압될 만큼 강하다.
기본적으로 망자들인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도 못했고 그 움직임도 현란하기 그지없다.
이미 수차례 전공을 올리며 마족들 사이에선 미친 망자, 공포의 망자라 불릴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옵니다!”
“전군!! 화살을 장전하세요!”
거대한 성벽의 위에서 용맹하게 소리치는 유리나의 말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활시위를 당겼다.
“발사!!!”
슈슈슈슈슉!!
하늘을 수놓는 새카만 철 비가 쏟아지고 그 공세에 당한 일반 마족들이나 잠식된 몬스터, 마수들이 쓰러져 나갔다.
“기동 타격대!! 준비해주세요!”
수십만 대 수천.
아예 싸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인간들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그그그극!!
바로 요새의 앞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토병들의 존재였다.
위풍당당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적들을 바라보았고 수십 배에 달하는 적들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라! 나의 백성들이여! 위대하신 지배자께서 내리신 은총에 보답하라!!]
[우오오오오오오!!!]
묵직한 함성과 함께 토병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마족들도 반격을 개시하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토병들의 힘은 마족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있었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마족 청년 하나가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토병들의 몸 또한 무수한 공격에 부서져 내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흙더미가 뭉쳐져 다시금 일어났다.
분명 숫자는 마족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토병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들이 쏘는 화살은 토병들을 죽이지 못한다. 토병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마족들은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토병들의 공세에 맥을 못 추었다.
요새로 향하는 길목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 탓에 요새로 진입하는 적들은 그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토병들과 맞서야 했고 애꿎은 목숨을 잃어만 갔다.
구오오오오오!!!
거대한 해머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거대 몬스터, 타이탄 한 마리가 마치 물살처럼 밀려 들어와 올라타는 토병들의 공격에 비명을 지르고 무너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해머를 휘두르지만, 그 공격은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갑옷을 입은 형태의 거석상들의 힘에 막혔다.
우웅!!
쩌억!!
그리고 거석상들의 눈이 번뜩이며 타이탄의 육신이 반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아비규환에 가까운 전장이지만 누가 봐도 인간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리적 이점을 사용한 것이다.
급기야 마족 쪽에서 와이번과 흑룡을 이용해 제공권을 장악해보려 하지만 거석상과 토병들은 그런 그들의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적을 짓밟았다.
전쟁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지만 그 끝은 쉬이 나지 않았다.
근 사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족은 공세와 후퇴를 반복하며 지독하게 공격해왔다.
마족은 집요하게 공격을 퍼부었고 인간 저항군과 토병들은 그런 마족들의 공세에 맞서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빌어먹을! 상대의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선봉대로 전장에 참전했던 중상위급 마족들 다수가 중상에 가까운 부상을 입고 퇴각했다.
벌써 몇 명이나 되는 인재들이 죽고 다쳤던가.
전장을 지켜보던 아스타로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우리를 보내주시오! 저 인간 놈들의 목을 단번에 칠 터이니!”
“흥,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안 그래?”
그랬다.
초 상위 마족들이 나선다면 토병들도 지금 같은 막장 휩쓸기는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상위 마족, 즉 상위 전력들은 마족의 전진기지에서 전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족을 장악하고 있는 이 붉은 머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여성 때문이었다.
악마, 슬리지아.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 어떤 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저히 거스른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그녀가 저 토병들을 어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인간들이 지키고 있는 성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빌어먹을 토병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런 아스타로트의 외침에 즐거운 듯 전장을 바라보던 슬리지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 좋아. 그래, 알았어. 가호라도 내려달라 이거지?”
그렇게 말한 그녀의 전신에서 기이한 힘이 쏟아져 나온다.
페르세르크를 제압하고 그들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였던 정체불명의 힘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힘이 넘쳐 흐른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이해하고, 좌절을 금치 못하던 마족들은 슬리지아의 힘을 받고는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힘이 몸 안에서 솟구친다! 평소보다 수배, 혹은 수십 배는 강해진 것 같은 힘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마족들은 곧 그 힘이 반격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기라도 한 듯 괴성을 지르며 반격을 개시했다.
처음엔 좁은 협곡의 이점과 토병들을 이용해 몰아붙이던 인간진형이 유리했지만, 이제는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단단한 흙으로 이루어진 토병의 육신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전장의 판도가 또 한 번 뒤집히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마족의 변화에 인간들은 당황했고, 곧이어 하늘을 나는 흑룡들의 브레스에 수많은 인간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참혹한 전쟁의 판도가 뒤틀렸다.
강화된 마족군단은 더 이상 토병들을 겁내지 않고 싸워나갔고 점차 압도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힘이 그만큼 그들을 강화한 것이었다.
토병들 또한 마족의 변화에 당황한 듯했지만 쉽게 그 판도를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토병들은 전력을 다해서 적들의 공세를 막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하하하!! 빌어먹을 인간 놈들! 이것이 우리 마족 군단의 힘이니라!!”
전장의 판도가 압도적으로 마족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하자 아스타로트는 광소를 멈추지 않았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인간 말살의 꿈이 한 차례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점차 부서져 가는 토병들은 설상가상으로 무언가 잘못된 건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치 성불이라도 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슬리지아의 전신으로 풍겨 나오는 거대한 힘의 파장에 취한 마족들의 광기는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