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3화
마치 시련을 내리듯 슬리지아는 내게 선택을 강요했다.
종양을 잡던지, 인간을 지키던지.
하지만 슬리지아는 한 가지 사실을 몰랐다.
금기의 업보.
내 전신에서 시커먼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윽……,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힘이군. 마치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심연의 괴물들은 자신들만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건 어느 세상에서나 무조건 상성 우위에 있어요.”
억울할 정도로 불합리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이유는 없다.
그녀가 불합리한 힘을 내게 들이민다면, 이쪽도 조금 손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퍼져버린 살점 덩어리에서 쏟아져 나온 애벌레들이 나를 향해 맹렬하게 기어왔고 어지간한 방어마법에도 견뎌내며 묵묵히 폭발을 일으켰다.
닿는 족족 모조리 녹여버리는 산성 폭탄이 위협적이지만 내게 닿기도 전에 마치 증발하듯 사라진다.
저벅저벅.
[지배자시여.]
그때 지면이 뒤틀리며 왕관을 쓴 토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섭정 토병이었다.
다만,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다르게 상당히 많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한계야?”
[죄송합니다.]
이미 슬리지아가 마족들에게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순간이 왔다.
선을 넘은 그 힘에 마족들은 광기로 가득 찼고 이제는 토병과 거석상들로도 상대하지 못할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 외에 마족의 상위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애벌레가 계속해서 기어 나오는 살점 덩어리에 손을 짚었다.
나를 거부하듯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애벌레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나는 금기의 업을 활성화하고 그대로 살점 덩어리를 불태워버렸다.
-끼이이이이이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살점이 불타서 사라진다.
마지막 남은 흔적이 사라졌다.
슬리지아는 내가 아무리 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어도 이것을 죽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나는 그녀가 생각지 못한 힘을 지니고 있고.
이건 본래 다른 용도였을지 몰라도 심연의 존재가 가진 메리트를 무시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방무뎀(방어 무시 데미지)이 된다, 이 말이야.
“수고했다, 섭정.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떠나.”
[하지만 지배자시여.]
“이제 됐어. 고집부리던 아가씨가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보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린다.
[왔네! 준비는 되었는가!]
기회는 한 번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페르세르크의 곁에 식신 하나를 남겨둔 게 마지막 한 수가 되었다.
[압도적으로 적은 수치로군……. 흑룡과 몇몇 상위 마족,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병사들. 그 수는 많이 잡아야 5만이네.]
50만 중에 마왕의 명령을 따르는 이가 고작 5만이다.
그 외에는 모두 아스타로트와 작당하여 마왕을 배신하고 균형을 뭉개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역시나 이곳의 페르세르크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제대로 힘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족이지만 인간이었다는 기억, 인간과 전쟁을 벌이는 존재가 다시 되어야 한다는 슬픔.
무엇이 되었건.
그녀는 이 끔찍한 참상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될지라도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마왕이 가지는 권능 중 다수는 오로지 마족을 위해 펼쳐진다.
마족이라는 종족은 마왕의 권한 아래에 움직이는 특이한 종족이니 말이다.
[리콜]
마족을 전부 죽이면 곤란하다.
인간이 모두 죽어도 곤란하다.
에이리아의 문제는 해결되었고, 슬리지아를 끌어내는데에도 성공했다.
인간저항군의 저항 의지를 불태우는 데에도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왕의 앞날에 방해되는 간신 마족들과.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슬리지아를 처리하는 일이다.
말없이 손을 들어 특이한 문양의 성호를 그은 내가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었다.
그리고는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공간을 넘었다.
* * *
곳곳에 불에 탄 흔적들이 보인다.
사방에 쓰러진 사람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이들은 사지라도 보존했지만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신체 한구석이 없거나 아예 대부분이 소실된 이도 있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벌어진 결과였다.
분명 토병들이 있을 땐 잘 버티고 있던 저항군이다.
부족한 머릿수에 군수물자로 버티는 것도 말이다.
강력한 전력인 토병이 사라지니 마족 군단의 군세를 막아줄 방패가 사라져버린 저항군은 정신도 못 차리고 마족의 공격에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 내 다리, 내 다리가 어디 간 거야!”
다리를 잃고 미쳐버린 병사, 숨을 거뒀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이들도 보인다.
말없이 다가가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병이 아닌 점은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데이비! 당신 대체!!”
요새의 성벽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 참상이 더욱 끔찍하게 보였다.
말없이 난장판이 된 요새를 지켜보던 내게 경장 갑옷을 입은 유리나가 후다닥 뛰어왔다.
“이봐요! 대체 어디를 갔다 온 거죠?!”
“중요한 일. 그보다 요새 꼴이 말이 아닌데?”
“당신이 사라지고 마족과 전면전이 시작됐어요. 처음엔 당신을 따르던 신의 군세께서 도와주신 덕에 끈질기게 버텼지만.”
고작 한 시간 전에 그 토병들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럴 수밖에 그들을 성불시킨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 말이다.
“고작 잠깐 사라졌는데 이렇게 되었다고요! 마족은 강하고 우린 약하죠. 이대로 신의 군세분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다음 전투가 시작되면…….”
그땐 상위 마족을 막을 전력도, 물량전을 이길 방법도 없다. 아무리 대단한 요새라고 해도 전력 차가 적당히 나야 버티는 법이다.
당연히 토병없이 전쟁 준비도 미흡한 저항군이 마족과 전투를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못 이길 거 같나?”
내 물음에 그녀가 침묵한다. 뒤이어 그녀를 돕는 다른 저항군 상위 지휘관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출신의 그렌, 게릴라 저항군을 이끌던 원로 아크튜러스, 그 외에 수인족들과 수염이 덥수룩한 드워프.
촌락 출신이었던 유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외에 여러 인물 모두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족을 상대로 이겨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낼 거라 외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이들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늘이 져 있었다.
적의 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은 것이다.
“말해줘요. 신의 군세들은 다 어디로 가신 거죠?”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지면에서 왕관을 쓴 토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신의 군세다! 신의 군세가 다시 돌아오셨어!”
거의 신앙에 가까운 모습을 무시한 채 나는 섭정을 향해 물었다.
“다들 떠났나?”
내 물음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지배자시여.]
“그래, 고생했다. 너도 이제 가봐.”
“데, 데이비?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내 행동에 유리나가 당황하여 내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잽싸게 내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눈치챈 것이다.
“저들은 망자야. 언제고 돌아가야 한다. 이제는 한계에 부딪혔고 더는 너희를 위해 싸워줄 수 없다.”
내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신들을 지키는 존재의 부재는 모두를 절망케 했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드워프가 당황하여 짤막한 다리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풀쩍 뛰어 내 멱살을 잡고 매달렸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적들이 코앞에 있는데 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고?! 그들의 존재가 우리를 여기까지 버티게 해주었다는 걸 왜 모르나!”
“왜 직접 뭔가를 해보려고 하진 않나.”
내 물음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말이라고!”
“맞아! 이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우리가 당신을 따라 마족과 정면에서 싸울 수 있었던 건 신의 군세분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전략은 대단해! 하지만 강적 앞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전략이라는 걸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정작 토병보다 더 강력한 존재인 내가 있지만, 이들은 내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의외로 입이 무거웠던 유리스는 닉스와 내 싸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토병들의 도움을 받아 구한 것으로 되어있는 만큼 이들은 내 일신의 무력에 대해선 잘 모르는 편이었다.
애초에 내가 드러내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말이다.
“큰일입니다! 마족에서 사신을 보내왔어요!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 외침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 * *
마족 사신은 거대한 뼈의 말, 팬텀스티드를 탄 고위 리치였다.
초대 리치 닉스가 사라졌다지만 리치화 한 전력은 마족 내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어찌 저항하여 명줄을 재촉하는가.”
“승자의 여유더냐?!”
성벽 아래에서 느긋한 말로 꾸짖는 리치의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한 유리나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크, 크흐흐. 그래, 승자의 여유라. 틀린 말은 아니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 아닌가. 압도적인 전력 차, 그저 전력 일부만으로도 이리 너덜너덜해진 너희가 우리 자랑스러운 마왕군 본대를 어찌 이기겠다고.”
담담하게 말한 그가 천천히 서신을 꺼내 들었다.
“대공 아스타로트의 명이시다. 항복하라. 항복하는 놈은 살려주마. 또한, 너희들의 생존권과 거주지를 보장하여주겠다!”
리치의 외침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살아남고 자신들의 살 곳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토병들이 사라졌다.
그런 침묵 속에서 하나둘 동조하기 시작한다.
[저런……]
“이 새끼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텁.
그의 선언에 내가 곁에 있던 병사의 핼버드를 빼앗아 들었다.
앗 하는 사이 섬광처럼 핼버드는 지상을 향해 낙하했고 곧 리치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파스스스.
옅은 빛과 함께 사라져버린 리치의 모습에 유리나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대, 대체 무슨?!”
“정신 차려, 패자에게 인권은 없다.”
내 말에 그녀가 따지던 것을 멈췄다.
감언이설이었다. 리치의 말대로 정말 목숨을 보장하고 거주지를 보장해줄 이들이었으면 이런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저건 적들의 농간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당해온 고통을 잊었나요?!”
유리나의 외침에 병사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순간 혹할 정도로 매력적이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네. 차라리 항복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싸워야죠.”
내 말에 아크튜러스가 인상을 찌푸린다.
“큰일입니다! 마족 본대가!!”
쿵!!! 쿵!!
마치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서서히 밀고 들어오는 새카만 적들을 보며 병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다급한 외침에는 공포심이 어려 있었다.
고작 일부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는데 본대가 모조리 몰려온다면 결과는 뻔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없으니 말이다.
“모두…… 퇴각하세요. 후방 3 요새에 먼저 도달해 마족들이 추격하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모두 이동시키기엔 너무 터무니없이 시간이 부족해요!”
그 외침에 유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미끼가 되겠어요. 나와 결사대가 최후까지 남아 저들의 진군을 늦추겠습니다!”
유리나의 외침에 병사들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절망에 무너질 듯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어온 사령관이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게 뻔한 자리로 뛰어들어가겠다고 외치고 있다.
“하, 하지만……”
“어서 가세요! 한시가 부족하니까!”
그렇게 외친 그녀가 내 팔을 잡아챘다.
“데이비…… 당신이라면 이들을 이끌고……”
“아니, 인간을 돕는 건 여기까지.”
내 말에 그녀가 굳은 얼굴을 했다.
“무슨……”
“이 이후부터는 오로지 스스로 해결해.”
이 이상 손대는 건 잘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다.
마족의 본대가 온다는 말은 재미를 잃어버린 슬리지아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했다.
“데이비님……”
언제 다가왔는지 에이리아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침묵하는 그녀을 향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듯 보이지만 모종의 계기만 존재한다면 분명 돌아오리라.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날.
그때를 상기시킨다.
아직 그녀와 나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 당신을 믿은 내가 멍청했어! 꺼져버려! 어디로든 꺼져버리라고!”
격분한 유리나가 내게 소리쳤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이들을 일으켜 세운 건 나였지만 마지막에 와서 내가 저들을 돕지 않겠다 말했으니 그 배신감은 지독하리라.
병사들의 시선엔 당장에라도 나를 죽여버릴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유리나는 점차 다가오는 마족 군단을 보며 이를 악물고 손을 풀었다.
“시간이 없어요! 이딴 자식은 내버려두고 이동하세요! 내가 방패가 될 테니!”
이 정도 전의면 충분하다. 균형을 잘 맞았으니 이제 머릿수만 맞추면…….
나는 그대로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챈 뒤 그대로 오금을 걷어차 무릎을 꿇리고 뒷목을 가볍게 때렸다.
“아……”
동시에 유리나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한번 둘러본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시체랑 대화하는 취미는 없다고. 시체놀이나 할 거면 당장 칼로 목을 긋고 죽어도 좋다.”
담담하게 말한 내가 주먹으로 허공을 후려쳤다.
쩡!!
동시에 아공간이 열리며 두 자루의 익숙한 검이 내 손에 안착하였다.
물질계를 베는 홍단이.
비물질계를 베는 청단이.
이때를 기다려왔다.
마족이 우세해도 안 되고 인간이 우세해도 안 된다.
인간은 의욕을 잃었고 마족은 수가 너무 많다. 그리고 내부의 세력도 너무 많다.
이런 상황에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마족은 숫자를 줄이고 세력을 지우고.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게끔 기회를 제공한다.
빌어먹게도 마족과 함께 있는 덕에 슬리지아를 건드리지 못했지만, 균형을 맞춘다는 조건이 완수된 이상.
그녀가 신의 뒤에 숨건, 마족의 뒤에 숨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이보게 자네 대체 무슨……”
내가 허공에서 검을 꺼내자 당황한 아크튜러스가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세요.”
“뭐라?”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 전부 도망들 가세요.”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다급한 외침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손을 튕겨 요새 전체에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직접 걸어서 도망쳤다간 여파에 휘말려 모조리 죽는다. 시전 시간은 약 2분 정도. 여파가 미치기 전에 모두를 피신시킬 시간은 충분하다.
숨죽이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드넓은 평야에서 홀로 걸어 나온 나는 천천히 마족이 있는 방향을 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항복하는 듯한 그 모습에 요새의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절망이 어린다.
마족 측에서도 내 모습을 발견한 듯 의아함과 조롱이 섞인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관조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영감님, 시작합시다.”
[10분…… 10분일세. 자네가 간섭에 구애받지 않고 멋대로 날뛸 수 있는 유일한 시간.]
“3분, 아니다. 5분이면 정리됩니다.”
진부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으니 이제 이곳에 남은 마족은 모두 죽는다.
그들을 조종하는 슬리지아 또한 마찬가지.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있던 내가 천천히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은총은 없습니다. 이것은 은총인가, 기적인가.]
[만물을 굽어살피는 주신 프리아 여신이시여 양질의 은총, 데이비가 높게 평가.]
본래 내 힘은 주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광기의 요소 또한, 그렇게 억누르고 있으니 겁도 없이 덤비는 모양인데.
지금까지의 내가 너희 예상과는 다른 놈이라는 걸 보여주마.
우우웅!!!
동시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카드 한 장에서 거대한 존재가 소환되기 시작했고 청단이와 홍단이가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무형의 기운에 공명한다.
이윽고 두 자루의 검이 빛을 뿜으며 모여들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훨씬 길고 투명한 청적색이 섞인 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힘에 공명한 두 아이가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놀라움을 뒤로한 채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이름은 그래, 초단이로 하자.
“가자, 초단아! 얼른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지.”
내 목소리에 반투명한 10대 중반의 소녀가 혼령처럼 나타나 내 등 뒤에 안기듯 스며들었다.
[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