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4화
133. 유아독존
“처음부터 이래야 했소.”
아스타로트의 말에 거대한 비룡의 등에 앉아 제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슬리지아가 고혹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재미는 천천히 즐기는 거야.”
대군의 진군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중압감을 선사했다.
아스타로트는 오랜 시간 쌓여온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못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당신이 힘을 빌려준 덕에 그 거슬리던 흙더미들을 치워버릴 수 있었으니.”
“정말 너희가 그것들을 없앤 거 같아?”
마치 놀리는 듯한 그 물음에 아스타로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의 힘을 빌렸다곤 하나 그들을 죽인 건 우리 자랑스러운 마족 군단이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렇다면, 저들이 스스로 없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듣다못해 글러트니가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급진파 뱀파이어의 수장인 글러트니는 아스타로트와 상당히 밀접하게 손을 잡은 세력의 수장이었다.
이에 슬리지아가 글러트니를 말없이 직시한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자 글러트니는 재빠른 눈치로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다.
“어흠! 우리 연합군의 공적이오! 누가 뭐라 해도!”
“쿡……, 그러던지. 너흰 참 마음에 들어, 한결같이 순수하거든. 그 목적은 추악하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며 낄낄거리던 도중이었다.
“대공! 그 인간입니다!”
죽은 듯 고요하던 요새에서 한 소년이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 높이에서 그냥 뛰어내리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보통 놈은 아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전진하는 군단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뭐지? 혼자서 이 대군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그건 불가능할 테지.”
강한 힘도 한계가 있다.
40만에 상위 존재들이 다수 섞인 병력과 싸워 이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때, 천천히 걸어오던 소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하! 이제 와서 항복하려나 봅니다. 대공! 하하하하하!”
“흐음…… 이미 늦었지.”
이미 저들은 협상을 위해 보낸 사절단을 죽였다.
물론 사절단의 제의를 받아들여 항복해도 결과는 똑같겠지만 말이다.
“저 인간도 깨달은 겁니다. 도저히 이길 적이 아니니까요.”
글러트니의 말에 아스타로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항복을 위해서일까.
그때였다.
벌떡.
몸을 기대듯 누워있던 슬리지아가 굳은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소년의 주변에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섬뜩한 존재감을 풍기는 거대한 존재가 나타나 천천히 소년의 곁에 앉았다.
“세, 세상에 저게 대체?!”
그랜드마스터급 환수, 그것도 환수의 왕인 메가로드리아였지만 이들은 그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닉스 이상급의 힘을 내뿜는 거대한 용의 존재감은 피부가 저릿저릿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스타로트는 슬리지아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저 용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약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의문은 곧 소년이 천천히 꿇고 있던 한쪽 무릎을 펴고 일어섰을 때 알 수 있었다.
소년의 손에 검이 변하기 시작했다.
두 자루의 검은 1미터 10센티에서 20센티 정도 되는 검으로 변했고 이내 검신이 투명한 검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면 무형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투명한 검신 안으로 마치 잉크가 물 위에 퍼지듯 푸른빛과 붉은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검을 쓰다듬은 소년은 곧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신의 위로 묵빛의 검집이 생겨났다.
저벅…….
한걸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소년의 몸에서 미묘한 힘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마나였다.
분명 마나가 없었을 텐데?
소년의 한 손이 검집을 쥐고 나머지 한 손이 그립을 쥐었다.
아주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립을 두드리며 고쳐 쥔 소년이 한발을 끌 듯 내밀며 손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의문을 품고 있던 아스타로트는 본능적인 위험을 깨닫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쩌억…….
섬뜩한 절단음과 함께 아스타로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정신이 나갈 정도로 두려운 무언가였다.
* * *
40만에 달하는 적과 상위의 마족, 그리고 최종 목표인 슬리지아.
슬리지아를 처리하기 위해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곳의 모든 마족을 몰살시켜야 한다.
이들은 대륙의 균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 자.
미안하지만 여기서 내 손에 좀 죽어라.
[신기한 검이군. 놀라울 정도의 힘이야.]
당황스런 목소리로 말하는 메가로드리아의 말에 나는 청단이와 홍단이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검, 초단이의 검집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뽑는 자세를 취했다.
광기가 전신을 지배한다.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을 해제하자 그동안 익숙하지 않았던 광기가 다시금 내 몸을 지배하려 들었다.
여태껏 풀어놨던 광기와 충동과는 격이 다르지만 나는 이미 이놈들을 몇 번이고 제압해본 바 있다.
억지로 광기를 짓누르며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힌 내가 냉정한 눈으로 적들을 바라보았다.
새카맣게 몰려오는 적들.
[자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네.]
관조자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정말 고마웠네.]
그 말을 끝으로 내 주변에 거대하고도 특이한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이내 자물쇠가 열리는 듯한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는…… 덧없이 부서져 나갔다.
고요한 침묵 끝에 나는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고 힘을 모조리 끌어냈다.
우선은.
베고 시작하자.
[초 중검]
검신의 중검과.
[팔라디아식 행성 분열창]
정복왕이라 스스로를 칭하던 창술의 대가, [아스트레아]가 가르쳐주었던, 묵직한 창술을 병합하여 손에 머금는다.
원하는 바는 필요한 만큼의 한방이다.
그리고 검신과 정복왕 아스트레아는 검술에 한해서 가장 파괴적인 검술을 추구하는 또라이들이다.
[신검발도]
[외핵 적출]
아주 순간.
거대한 섬광이 지형을 갈라냈다.
그그그극!! 쿵!!!
두꺼운 지면은 마치 할퀴어진 것처럼 사라졌고 마치 세상이 절단된 것처럼 갈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베어진 검기에 그대로 노출된 이들은 소드마스터급이건 일반 마족 병사건 상관없이 증발해버렸고, 그에 휘말리지 않은 이들은 갈라지 지면 속으로 튕겨 나가며 추락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악!”
“이, 이게 뭐야!”
경악과 비명, 그리고 혼란이 가득해진 마족 진형은 아직 한참 남아있다.
단번의 공격으로 몇 놈이 사라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앞으로 3번.”
내가 기억하는 검신 하레스의 수준이라면 1번에 끝날 힘이지만 나는 그들의 힘을 대부분 받아들여도 그들만큼의 수준까진 이르지 못한 게 대부분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가장 가까워던 것은 천일야장 수르트의 기술력이 전부였다.
단 한 번의 검술에 살아남은 마족들은 이제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나와 내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검의 흔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상황은 당연히 저 멀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요새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체력도 좋은지 기절시켜두었던 유리나가 병사에게 부축을 받은 채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메가로드리아, 움직여.”
내 말에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는 말없이 천천히 날아올랐다.
[셰인의 제자라고 했었나.]
“일단은.”
“그는…… 네놈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아니, 그 인간도 더럽게 강했어. 결국은 환수의 힘을 몸에 받아들이는 경지까지 갔거든. 그래 봐야 첫 타겟을 로 아이아스로 잡았다가 피떡이 되어버렸지만.”
이래서 적을 잘 골라야 하는 거다.
괴물 중에서도 최상위 괴물을 건드리면 쓰나.
[정말 경악할 힘이군. 딱히 걱정할 것도 없겠다. 나는 가도록 하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와.”
그 말과 함께 내 전신으로 보랏빛의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후좌우 상하에 생겨난 마법진은 곧 원형태의 다차원 마법진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 방향에서 봐도 하나의 마법진이 완성될 것 같은 엄청난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기상예보 받아라. 오늘은 뇌우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질 예정이니.”
[자연재해 시리즈]
[날벼락 부르기]
쩌엉!!
이전 오르뎀 영지에서 링튼 백작이 내보냈던, 키메라들을 청소하던 벼락과는 크기부터가 다르다.
마치 싱크홀을 만들 듯 내리치며 깡그리 태우고 지워버리는 벼락 속에서 두꺼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뇌우에 있던 뇌기가 사라지지 않고 지면을 타고 더욱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대학살.
아비규환이 된 마족들은 진군한다는 전제도 잊고 내게서 도망치려 발버둥 쳤다.
그러기에 줄을 잘 섰어야지. 저딴 늙은 영감 말고, 새파랗게 젊고 예쁜 마왕님을 말이다.
실제 나이는 페르세르크가 더 많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고.
“그아아아아!!”
그때였다.
내 일검에 당황해 끝까지 당하기만 할 줄 알았던 것과는 별개로 군단에서 이탈해 내게 빠르게 도달한 이들이 있었다.
그 수는 대략 10명 남짓.
운이 좋아 휩쓸리지 않았던 상위 마족이었다.
거대한 벼락은 정작 내 주변엔 내리치지 않았기에 그들은 차라리 벼락에 죽느니 나를 공격하는 것을 택한 듯했다.
“이노오옴!!”
거구의 체격을 지닌 마족이 내게 거대한 해머를 휘둘러 들어왔다.
분명 마족 본성에 갔을 때 내 멱살을 잡았던 그놈이렷다.
그는 제 몸을 돌보지도 않은 채 내게 계속해서 덤벼들어 왔다.
가볍게 한발을 튕기듯 돌아 그의 공격을 빗겨낸 내가 손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재차 덤벼드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자 그가 그대로 허공에 굳어버렸다.
“커헉?! 이 무슨?!”
“단순한 염동력이야. 마기를 다룰 줄 아는 너희들도 어렵지 않게 쓸 텐데?”
그 염동력이라는 게 보통 가벼운 물건을 옮기는 거지 수백 수천 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묶진 않는다.
마왕 유르그의 군중 제어기.
핵 딱밤.
이윽고 완전히 굳은 그에게 물 흐르듯 접근한 내가 오른손을 들어 중지를 둥글게 말았다.
퍼어엉!!!!!
그리고 뒤이어 일대 수십 미터의 지면이 모조리 뒤집히며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직격한 거구의 마족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음 타겟?”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쓰러져 나를 괴물 바라보듯 바라보는 마족들은 어느덧 내가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대공 아스타로트.
제법 강한 힘을 지닌 그지만, 운이 너무 없었을 뿐이다.
“이, 이 괴물 놈,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아직 반응 없는 슬리지아가 있던 방향을 흘끗 바라보았다.
일부러 첫 공격을 그녀에게 그대로 날려 보냈는데, 선물은 마음에 들려나 몰라.
갈라진 땅은 척 봐도 수십 킬로미터 이상 지하로 떨어지게 파헤쳐졌지만, 그녀라면 그런 높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균열 속에서 제법 상당한 힘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굳어있는 아스타로트를 향해 다가간 나는 검을 심드렁하게 옆으로 한번 그어버렸다.
쩌억!!!
처음과 같은 재앙의 흔적이 또 한 번 생겨났다.
40만의 적이라 해도 3분이면 충분하다고 했지.
마족 얼마가 모여오건 막아낼 수단이 없으면 애초에 숫자는 의미가 없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생겨난 끝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를 묵묵히 바라보던 나는 전의를 잃은 채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했다.
“1000년 정도 괴물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면 그렇게 돼.”
그놈의 빌어먹을 완전 기억능력 때문에 실질적인 기억의 양은 훨씬 많은 편이지만 말이다.
일반인이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근 수만 년에 달하는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다.
“무슨 헛소리를……”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말했지. 전쟁을 멈추라고.”
내 말에 그가 굳은 얼굴을 했다.
“시작은 너희가 했지만, 끝은 내가 내주도록 하지.”
“네놈은 괴물이다! 괴물이란 말이다!”
“이 세상을 사이좋게 말아먹고 있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내 말에 그가 눈을 부릅떴다.
“무슨 뜻이냐!”
그냥 끝내버려도 될 텐데 괜히 수다스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와버렸다.
“이 세상은 마족도 인간도 한쪽이 완전히 이기면 안 되거든.”
그건 본래의 티오니스 또한 마찬가지다.
내 말뜻을 이해 못 한 그는 무엇이 되었건 오랜 시간의 계획이 단번에 물거품이 된 것을 보고 괴성을 내질렀다.
“네 마왕님은 내 위험성을 잘 알고 큰마음 먹고 리콜까지 사용했는데. 이래서 모든 생명은 적당히 욕심을 부려야지.”
“그아아아아아아!!”
내 말에 그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염동력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친다.
이에 염동력이 그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지 않는 심연의 힘을 받아들인 것치고는 제법 강하긴 하다만, 이지 난이도의 몬스터가 울트라 나이트메어 난이도를 클리어하고 있는 고렙 고인물에게 닿을 리가 있나.
내가 말이야. 이 땅에서만큼은 속옷만 입고 마을 한복판에서 잠수를 타는 골수 고인물 RPG유저 수준이란 말이다.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분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목에 초단이를 걸자 내 등 뒤로 10대 중반의 청초한 이미지를 지닌 소녀가 천천히 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말없이 아스타로트를 노려보며 환영으로 만들어진, 나와 똑같은 검을 쥐고 나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초단이의 검신 자체에 막대한 힘이 감돌며 내 등 뒤로 길이만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일 법한 가닥가닥의 날개를 만들어냈다.
한 쌍의 날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을 내게 전해주었다.
이게 단순히 검이 만들어내는 힘의 여파라고?
이 정도면 칼디라스가 아니라 초단이가 진짜 신검이라 불려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초단이는 본래 신검급 검에 내 힘이 섞여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형태였다.
[초단이는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릴 거에요.]
어리고 귀엽던 청단이 홍단이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초단이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홍단이 청단이와 다르게 초단이는 10대 중반에 종아리까지 오는 적청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 상이었다.
그 목소리가 퍽 고맙게 느껴진다.
이에 나는 아스타로트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초단이를 향해 말했다.
“초단아.”
[네?]
“아바마마라고 해보렴.”
촤아악!!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아스타로트와 반대로 나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초단이를 놀려먹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