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8화
“우욱……. 이런 개 같은!!”
헛구역질하며 몸을 웅크렸던 그가 후다닥 달려갔다.
많은 사람의 육신을 기워 붙인 이 끔찍한 참상을 빨리 풀어내려 했던 몬미더는 단단한 강철 줄로 인해 그것이 고정되어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이깟 줄!”
이윽고 그가 강사를 내리치려던 그 순간.
륀느보다 먼저 밀피유가 스르륵 나타나더니 그의 검을 한 손으로 낚아채고 그를 막아섰다.
“뭐하는 거지? 뱀파이어. 저하의 명령대로 나는 네년을 수용했지만, 이 이상의 월권은 용납할 수 없다.”
싸늘한 그 말투에 밀피유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를 유지했다.
“함정이야.”
밀피유의 말에 륀느가 안광을 천장이 향하는 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 손에 빛의 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륀느. 이것을 매우 낮게 평가……. 매우 격렬한 분노라고 판단.”
“세, 세상에.”
몬미더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강사로 검을 내리쳤다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섬뜩한 기분에 몸을 파르르 떤 그는 한발 두발 물러났다.
“강사에 맹독이 발려져 있어. 게다가 괜한 충격을 가하면 그대로 창고가 무너지며 저 위의 것들이 떨어지겠지.”
뱀파이어 특유의 예민한 후각으로 찾아낸 함정이었다.
강사로 고정된 이 실내는 강사를 무리하게 잘라낼 시 창고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맹독으로 추정되는 액체가 흩뿌려지게 되어있었다.
“인간의 심리는 몰라. 하지만 연구 데이터를 인용했을 경우.”
“도발. 륀느가 이것을 도발이라고 명시해.”
“바로 봤어.”
대놓고 도발한 듯한 이 싸이코 같은 참상에 륀느는 몬미더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 모습에 륀느는 조용히 데이비가 했던 일을 상기했다.
“영지 관리인에게 보고, 이후 영지 내에 피해자의 여부를 조사할 것. 이것을 륀느가 높게 평가.”
“저하의 방식이군요. 알겠습니다.”
륀느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후 허겁지겁 뛰어나간 몬미더를 뒤로한 채 륀느가 입자포를 생성해 창고 전체를 부숴버리려 하자 밀피유가 막아섰다.
“이건 내가 할 수 있어.”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손끝에서 새빨간 핏방울들이 모여들어 변형되기 시작했고, 이내 거대한 나무의 가지처럼 뻗어 나가며 창고 전체를 지탱하고 유지했다.
그리고는 독액이 담긴 함정을 집어삼켜 버렸다.
“함정은 처리했어.”
“……”
말없이 밀피유를 바라보던 륀느는 다시 라이트 세이버를 뽑아냈고 그대로 강사들을 잘라버렸다.
“저 시신, 흉측하지만 추리를 할 땐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보는데.”
“륀느가 알아서 한다고 명시. 쓸데없는 참견을 륀느가 낮게 평가.”
사이가 역시나 좋지 않다.
생각해보면 퍽 웃긴 일이었다.
륀느와 밀피유는 처음부터 엮이는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지지대를 잃고 그대로 추락하는 고깃덩어리를 륀느가 받아내기 위해 손을 뻗자 밀피유가 말없이 그녀를 대신해 고깃덩어리를 받아냈다.
“키가 작아서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까? 흥미롭지만 네 키는 흥미롭지 않아.”
“륀느, 낮게 평가. 이것을 맹렬한 분노라 명시.”
짧게 혀를 찬 륀느가 돌아서자 밀피유는 말없이 창고 내부를 흘끗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륀느의 판단은 정확했다.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페르세르크는 에이미와 베르닐 시종장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영지 결계를 풀지 말게.”
“어째서죠? 그 끔찍한 살인마가 아직 이 안에 있을 텐데.”
“그래서 풀지 말라고 한 게야.”
페르세르크가 굳은 얼굴로 끔찍한 고깃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우웅…….
옅게 마기를 흘려 육신의 상태를 보던 그녀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야 도망가지 못할 테니.”
“페르님, 뭔가 알아낸 게 있는지 륀느가 해석을 요구해.”
“조금 기이한 게야. 많은 건 알 수 없다만, 모두 영지민, 그리고…… 외부에서 이곳으로 왔던 용병도 둘 정도 섞여 있는 게야.”
“……”
“산채로 사지를 잘라 붙였군. 끔찍하기 짝이 없어.”
어지간해선 생명 중시를 따지는 페르세르크지만 이건 도를 넘어섰다.
이후 말없이 시신을 보던 골고다 장로가 혀를 찼고 엘프인 유리아 헬리샤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령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참혹했던 모양이네요. 보통 어지간해선 이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는데.”
“산채로 육신을 잘랐다는 건 흑마법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커. 흥미가 떨어질 정도로 뻔한 수작이지만 깔끔해. 인간들이 말하는 쾌락살인마가 분명해.”
밀피유의 판단에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쾌락살인마에게 자비는 필요 없는 게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어두운 지하 석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굳은 얼굴로 시신을 보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공간이 열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들어오는 흑발의 소년과 그 소년에게 안겨있는 청록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데이비!”
“저하!”
* * *
영지로 돌아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돌아올 장소의 좌표 정도는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차원을 넘기 전 적색경보를 때려놓은 탓에 하인스 영지가 이 난리가 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돌아온 지금에 이르러서도 적색경보는 해제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철저하게 순찰이 강화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우리를 습격했던 그 괴물 같은 여자는…….”
가장 먼저 에이리아의 생환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카트린느 대공의 말에 나는 잠들어있는 에이리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고생이 좀 많긴 했지만 무사합니다.”
“아아…… 황녀 저하.”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에이리아의 손을 꼭 잡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는 카트린느였다.
“미안해요……, 저하. 미안해요, 저하……. 지켜주지 못해서.”
에이리아의 생환을 가장 기뻐하는 것은 린디스 제국 출신의 사람들인 것이 당연했다.
“황녀 저하의 몸에는……”
“조금 지친 것뿐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다 해결했으니 깨어나면 괜찮을 겁니다.”
내 말에 카트린느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왕자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됐어요. 감사나 받자고 한 짓이 아니니까.”
“그래도 감사는 드려야겠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고마워하세요.”
“고맙습니다.”
냉큼 감사를 표하는 카트린느의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시선은 마치 이 인간들이 대체 뭘 하는 거지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성국 출신의 앨리스 대주교, 엘프 유리아, 드워프 골고다 장로.
이외에 사용인으로서 영주성 내의 잡일을 도맡아 하던 토인족 소녀와 근위 조장 몬미더, 이외에 달의 숲에서 돌아온 타냐나 마리아 공주, 그 두 사람을 호위하는 단궁까지.
“대체 나 하나에 몇 명이 모여든 거야.”
“그만큼 오라버니의 인맥이 넓다는 게 아닐까요?”
타냐가 녹빛 단발을 흩날리며 쏘아붙였다. 그 표정이 못내 삐진 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타냐? 왜 화가 난 거야.”
“소중한 오라버니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걱정 안 하는 동생이 어디 있겠어요.”
처음 볼 때보다 상당히 활기차게 변한 마리아 공주의 말에 나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저, 저도……”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작은 소녀가 고개를 쏘옥 내밀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오니샤.”
그녀의 모습에 나는 괜스레 저쪽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았던 에오니샤의 큰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그냥 왔다 싶어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디작은 천재 연금술사 왕녀가 다른 세상에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던 그 여인과 동일인물이라니 느낌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말없이 에오니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뭐가 그리 긴장되는지 움츠러든 채로 내 손길을 저항하지 않았다.
이후 타냐가 에오니샤를 안아 들고 떠나자 유리나는 뮤우가 기다린다며 먼저 돌아갔다.
이외에 다른 이들도 대부분 돌아가고 난 후 나는 말없이 나를 직시하는 페르세르크와 대화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페르세르크.”
“무사하게 돌아온 거면 됐어, 데이비.”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내 품에 머리를 묻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그녀의 머리를 감싸듯 안고 조용히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심연의 공주……. 그대의 힘으론 벅차. 본녀는 그대가 정말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게야.”
“……”
목소리에 울음 기가 섞여 있었다.
“돌아왔으니 됐잖아.”
“그대……”
“걱정 마. 저쪽에서 아예 손해만 보고 온 건 아니니까.”
환골탈태 스택과 유전자 정보,
그 외에도 동기화 덕분에 힘의 총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적어도 이쪽도 정체되어있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였다.
“미안하지만 그보다 영지 일이 우선이야. 에이리아 황녀는 건강하니까. 나머지 린디스 인간들은?”
“시일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털고 일어날 테지.”
“그거면 됐어.”
그렇게 말한 나는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륀느와 밀피유를 바라보았다.
“그 괴물은?”
“도망쳤다. 아마 당분간은 숨어있을 거야.”
“그 괴물을 물리쳤다고?”
“일단은.”
그 말에 밀피유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당신이라는 인간은 정말 흥미롭기 그지없어.”
“그 관심 꺼라. 그보다 개 같은 상황이 벌어졌던데.”
내 복귀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문제는 이 영지 내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이 문제였다.
“무슨 일인지 전부 보고해.”
내 말에 륀느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피 냄새를 맡은 밀피유, 그리고 창고에서 발견된 끔찍한 시신.
그건 내가 영지에 돌아오기 전 봤던 그 참혹한 고깃덩어리를 말하는 것일 터다.
이후 범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영지 전체에 결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환희의 악장 제 첫 번째?”
륀느의 보고를 받고 내가 중얼거렸다.
익숙하게 육신을 줄이고 내 어깨에 올라앉은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말했다.
“뒤섞여 있지만, 산채로 육신을 절단했어. 데이비, 그리고 그들의 반수 이상이 이 영지민이고.”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사람을 건드렸다고.”
“데이비 도움이 될까 싶어 하는 말이다만……, 이거 생각보다 수법이 비슷한 게야.”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다른 이들도 페르세르크를 직시했다.
“본녀가 칼디라스에 있을 때였네, 팔란제국에서 유명한 연쇄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인 게지.”
“자세히 말해봐.”
“방식이 비슷해. 모방 살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 끔찍한 느낌은 어쩐지 본인 같아서 말이야.”
그녀는 곧 한 연쇄 살인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많은 소드마스터와 정보 길드, 그리고 제국의 추격도 유유히 빠져나가며 이 끔찍한 참상을 자행하는 미치광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부대륙에서 시작해 중부대륙, 그리고 이제는 이곳 하인스 영지가 있는 동부대륙까지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본녀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하지 않았지만, 언뜻 들은 바로는 그의 손에 죽은 희생자만 수백이 넘는다고 들었던 게야.”
그 말에 내 눈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안 그래도 저쪽 세상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생명을 죽이고 돌아왔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 끔찍한 감촉에 기분이 더러워져 있는 게 현재의 나였다.
그리고, 한 세상을 멋대로 주무르는 대규모 큰 그림을 펼치고 돌아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뭐?
유명한 연쇄 살인마?
“이 자식은 예술을 할 장소를 잘못 골랐어.”
남의 고통을 즐기는 악마 같은 놈에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 * *
“우웁!!! 우우우우웁!!!”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지만 입에 물린 재갈로 인해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지하 창고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단한 기둥에 넝마가 된 옷을 입은 여인과 기절한 남성들이 모여 팔다리를 포박당한 채 묶여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는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게. 예술은 숭고한 작업이니, 그 재료가 되어줄 자네들이 그리 떨어서야 쓰는가.”
하지만, 기이한 가면을 쓴 이는 언뜻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도 알아보기 힘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기괴한 형상에 더더욱 겁을 먹은 이들은 와들와들 떨며 자비를 호소하듯 눈물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영지민, 그리고 이곳에 꿈을 품고 찾아온 용병들에겐 그야말로 지금의 상황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천으로 피가 잔뜩 묻은 톱을 손질하던 괴인이 낮게 웃어 보였다.
“이 영지는 제법 유명하더군. 영지가 평화롭고 치안이 좋다고 말이야. 이런 곳의 사람들은 미소에 행복이 어려있지. 그렇기에 선택받은 것일세. 내 예술을 펼치기에 아주 좋은 장소라고.”
찰캉!!!
그때였다.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며 한 남자가 인상을 쓰고 소리 질렀다.
“왕자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네놈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죗값을 치를 거다! 이 괴물 자식!”
“허어, 재갈이 풀렸군.”
담담하게 말한 그가 톱으로 사내의 목에 톱날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예술작품에 필요가 없다네.”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목에 톱이 걸린 상황에 겁을 먹지 않을 이는 없었다.
이미 이곳의 이들은 한 차례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를 보았으니 말이다.
이 괴물이라면 산채로 목에 톱질해도 이상하지 않을 작자였다.
두려움이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괴인의 가면을 바라보자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 영주라……, 그래. 뭐, 예술을 위해 움직이는 나를 찾고 막아낼 수 있다면 말이네.”
담담하게 말한 그가 톱을 치웠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내 선물을 발견한 듯하니 내일이면 그 반응이 나올 테지.”
언제고 근위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아찔한 상황일 텐데.
그는 이 상황을 명백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는 섬뜩한 광기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