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0화
메가로드리아는 훌륭한 전력이지만 이 대륙 기준으로 볼 때 녀석은 현재 신수나 골렘보다 아득히 상위의 위험 개체라 할 수 있다.
중요할 땐 도움이 되겠지만, 엄연히.
“저하! 마침 잘 오셨어요! 팔란 제국에서 일리나 황녀님이 오셨어요.”
계약을 마친 뒤 메가로드리아를 시험의 숲에 체류시키고 돌아온 나는, 급히 나를 향해 뛰어오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에이미와 일리나였다.
“에이미, 무슨 일이야. 그보다…….”
말끝을 흐린 내가 일리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넌 또 꼴이 왜 그 모양이냐.”
“그러는 왕자님이야말로 꼴이 왜 그러세요? 잠깐 못 본 사이에 폭삭 나이를 드셨는데?”
빈정거리듯 말하는 일리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빈말이라도 예쁘다 해주면 어디가 덧나?”
“뭐라는 거야, 이 호박이.”
“야!”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내 곁에 있는 페르세르크를 보더니 쓰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서 눈만 높아져서……”
툴툴대듯 말하는 일리나는 내가 한 말과는 별개로 참 요망할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청초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의 간편한 드레스가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움직일 때나 입는 팔란 제국 황족의 상징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탓에 그 매력이 더 묘하게 다가왔다.
“그 옷, 공식 석상이라서 입고 온 건가?”
“맞아요.”
“존대는 안 어울리니 때려치우자고. 보는 이도 없는데.”
“……뭐 좋아.”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나를 따라와 응접실의 맞은편에 앉았다.
“라운왕국을 보기 위해서야? 아니면 나를 만나기 위해서야?”
“정확히는 널 보기 위해서야. 다만 국가 차원의 문제인 만큼 라운왕국을 대표해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러면 여기가 아니라 라운왕실로 향했어야지. 국정을 담당하는 건 폐하와 왕태자인 바리스다.”
“지금 그런 자잘한 위치를 놓고 논하러 온 게……”
“바리스를 찾아가. 이 이야기는 더 없던 거로 할게.”
“너 지금 라운왕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네 위치를 알고는 있는 거야?”
황당하다는 듯 물어오는 그 모습에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바리스는 허수아비가 아니야. 나는 계승권을 박탈당한 왕자일 뿐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이 뛰어나다 해서 타국, 그것도 제국의 주요인사가 왕실도 아닌 이 하인스 영지로 찾아온 건 라운왕국을 개무시하는 처사라는 걸 네가 모르진 않을 텐데.”
내 말에 그녀가 샐쭉하니 입을 삐쭉였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그 정도 권력을 쥐면 뭐든 하려고 난리를 부릴 텐데 말이야.”
“지금도 충분해. 애초에 이미 이 이상 누릴 권력이 어딨어.”
내 말에 그녀가 쿡쿡 웃어 보였다.
“몸은 괜찮아요?”
“그래, 그때……”
페르세르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데이비를 살려주었다고 들었음이야.”
“아니 뭐……”
“고맙다. 본녀는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게야.”
“제가 원해서 한 건데 말이죠……”
볼을 긁적이며 일리나가 시선을 피하자 페르세르크가 쿡쿡 웃어 보였다.
“귀여운 건 여전한 게지.”
“마치 저를 오래 봐온……. 후우, 아니 됐어요. 이미 칼디라스의 안에 있을 때부터 알았겠지.”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곧이어 내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공적인 문제는 그럼 라운왕국과 마무리 짓겠어. 나중에 가서 딴소리하지 마.”
“바리스가 결정을 했다면 나는 거기에 따른다. 그거면 돼.”
“진짜로?”
왜 이래, 사람 불안하게.“
“진짜로 후회 안 해?”
그녀의 질문에 나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되었건 이 나라의 왕은 크리아네스 국왕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을 이는 내가 아닌 바리스.
바리스는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나 내가 그를 떠밀어 왕태자의 자리에 올렸으니, 그것에 대해 불이익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 뭐 좋아. 나는 네가 그렇게 덮어놓고 넘겨버릴 줄은 몰랐지만, 네가 그렇게 말했으면 됐어.”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품 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건?”
“초대장이야.”
킥킥 웃어 보인 그녀가 고개를 까딱이자 나는 그 안에 적힌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것은 초대권이었다.
“브리우크 왕국에서 주최하는 마법 대회?”
“이전에 펠리스티 공국에서 대륙 검술 대회를 주최했지? 실제로 대륙 연합은 여러 종목 분야에 한해서 실력 있고 재능있는 이들을 모아 대회를 펼쳐.”
그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번엔 마법 대회를 개최하는 거야. 우승 상품은 무려 대현자님이 준비하신 아티펙트…… 라고 하는데, 솔직히 네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내가 해줬으며 하는 건?”
“참가하던지, 참관하던지.”
담담한 그 말에 나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볐다.
“별로 관심이 안 가는데.”
구경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대륙의 문화를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리 끌리는 일은 아니었다.
“싫다면 강요는 하지는 않겠지만, 너 메아리의 정보 길드원 하나를 데리고 다니지?”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가 말한 이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었다.
에나벨과 함께 정보활동을 하는 다크 엘프, 아이나 헬리샤나였다.
세간에는 잭으로서 건장한 체격의 남성으로 돌아다니는 탓에 사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는 극도로 적은 편이다.
실제로 친동생인 괴짜 미식가 엘프 유리아 헬리샤나도 그녀의 정체를 모르니 말이다.
“잭이라고 했나? 그 사람이 메아리 길드를 통해서 내게 부탁을 해왔어. 직접 널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그게 일리나였던 모양이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게 지금 네게 중요한 문제라는 건 알 것 같아서 급히 온 거야.”
그녀가 말했다.
“타겟을 찾았습니다. 브리우크 그곳에서 샐롬을 만나세요.”
그게 아이나가 남긴 전언이었다.
그녀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타겟은 단 한 명뿐이다.
6대 미녀라 불리는 존재이며, 오래 시간이 흘러 그녀에 대한 소재를 아는 이가 극도로 줄어든 이 시대.
그럼에도 이름만큼은 알려진 인물이다.
베르단데.
이 땅에 와놓고도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심연의 공주의 실마리가 잡혔다.
* * *
밤이 늦었다. 나는 달밤이 떠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리자 와인잔을 돌리며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일리나가 보였다.
“그래서 말이죠? 제가 오라비면 다야? 맨날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푸념을 늘어놓는 건 일리나였고, 그녀의 푸념을 받아주는 건 페르세르크였다.
“데이비님, 표정 근육의 이상을 감지, 륀느가 이것을 고민이라고 판단.”
무표정한 얼굴로 륀느가 중얼거렸다.
륀느의 품에는 청단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잠들어있었다.
본인도 작은 체격이지만 두 아이는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아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단이는?”
내 물음에 륀느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내가 주로 숙면을 취하는데에 사용하는 넓은 침대의 중앙에 대자로 뻗어 쿨쿨 잠들어있는 빨간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보였다.
홍단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상당히 헤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헤…… 헤헤헤…… 마싰서!”
먹는 꿈이었던 모양이었다.
조용한 평화였다.
심연의 공주 울드의 출현으로 잠시 주춤거린 평화지만 심연의 공주중 위험수치 상등급인 슬리지아를 지워버리는 것을 기준으로 심연도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슬리지아를 죽일 정도로 강대한 힘을 내뿜는 것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리라.
뭐가 되었건 내가 손해 볼 일은 아니었기에 굳이 드러내진 않았다.
물론, 그것도 시간 벌이일 뿐이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페르세르크를 지키기 위해선 상대를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대, 본녀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할 생각이 없었으면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어.”
담담하게 말한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은발 소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뿔을 살짝 만지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살짝 찌푸려진다.
“뿔은…… 건드리지 마라.”
“……그래.”
담담하게 말한 나는 마음을 놓고 주정을 부리고 있는 일리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먹인 거야.”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게지. 제 오라비는 저를 살리기 위해 그 노력을 하지만 저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서로 참 미련하기 그지없다.
동생을 위해 스스로를 악인으로 치부하고 희생하는 오라비나, 그걸 모른 채 오라비의 독주를 막아보려는 동생이나.
퍽 우스운 일이다.
“뭐야? 뭐야! 또 뭔데 날 두고 이야기하는 거야아?”
혀가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로 일리나가 소리치자 나는 가볍게 손을 튕겨 그녀에게 슬립 마법을 걸어버렸다.
쿵!!
당연, 취해버린 일리나는 그것에 저항하지 못했고,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린다.
“대륙 6대 미녀 중 하나이며 최고의 신붓감이라 불리는 황녀님 체면이 말이 아니네.”
“쿡쿡……”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가 쿡쿡 웃어 보였다.
“솔직히, 이런 삶이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인 게야.”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아직 못해본 것도 얼마나 많은……”
장난스레 말하던 도중이었다.
투웅……
갑작스레 빛이 모여들며 내 가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자 내 시선이 닿았다.
그것은 평소의 황금색이 아닌 검은 빛으로 물든 차원 열쇠였다.
“데이비!”
“기다려.”
차원 열쇠는 검게 변질해 있었다.
이윽고 스스로 날아올라 허공에 꽂힌 열쇠는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고 내 앞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초대…… 하는 건가? 대체 누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로한 채 균열을 바라보던 나는 곧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힘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있어.”
“데이비?”
“갔다 와 볼게.”
균열 너머에서 느껴지는 느낌, 분명히 시험의 숲에서 나를 바라보는 듯하던 그 시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망설임 없이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지려던 찰나, 나는 내 손을 잡는 페르세르크를 볼 수 있었다.
“같이 가, 데이비.”
“페르세르크.”
“이번엔 본녀가 그대를 도울 테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균열은 곧 나와 그녀를 모조리 집어삼켰고.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일순간 돌변했다.
남은 시간은 160분.
그사이에 또 늘었구나.
160분, 약 2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이다.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보인 것은.
티오니스 대륙에선 볼 수 없는 고층빌딩이었다.
“데이비 여기 설마……”
“지구…… 같은데.”
문제는 그놈의 고층빌딩에 쓰인 문자들이었다. 한글, 영어 이외에 여러 지구의 문자들. 이 정도면 이곳이 어느 차원인지 굳이 꼽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괴리감도 든다.
보통 차원 열쇠는 심연의 괴물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곤 했다.
실제로 처음 이바노프를 만났을 때 그곳에 나타난 심연의 괴물을 처리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심연의 괴물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결국, 시간이 다 되기 전에 놈을 찾아내 처리하던지, 그냥 시간을 버리고 돌아가던지 양자택일일 뿐이다.
“뭐야. 뉴비인가? 파밍도 안 하고 멍때리고 있네. 어떻게 할까요? 뉴비는 봐주는 거라고 하는데, 어차피 1명 빼고는 전원 탈락이잖아.”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커다란 칼을 든 사내가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쓴맛을 보면서 크는 게 뉴비라고? 하여튼 인성들이 쯧쯧, 뭐 됐고. 킬각 보는 법 알려드릴게요. 잘 봐요, 거리 적당히 잡고.”
홀로 어딘가를 향해 중얼거린 사내가 장난스레 나를 보며 빠르게 도약한다.
“잡았네요.”
마치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말투에페르세르크가 손에 쥔 초월의 종언을 움직이려던 찰나.
나는 가볍게 손을 뻗어 사내의 팔을 부드럽게 빗겨내고 머리통을 낚아채 버렸다.
그리고는.
“엇?”
콰앙!!!!
어마어마한 폭음을 내며 사내의 머리통을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잡긴 뭘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