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6화
143. 신병을 인도하겠습니다
몸을 구속당한 채 앉아있던 그녀는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손님이 많구나.”
“그냥 손님은 아니고.”
“넌…….”
나를 바라본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인간들의 경계는 이리도 허술한 건가?”
“내가 이상한 거지 세상이 글러 먹은 건 아니야.”
담담하게 말한 내가 손에 검은 기류를 피워올렸다.
“그건?!”
동시에 베르단데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네, 네 녀석! 네 녀석이 그걸 어떻게?!”
금기의 업보에 관한 지식이 있는 것일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1만 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헤라클래스의 힘을 기억해도 이상하지 않다.
“뭔지 알면 이야기가 편하겠네.”
담담하게 말한 내 모습에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구나. 그 건방진 녀석이 어찌하여 깨어났는가 했더니……, 네 녀석이 범인이었구나.”
“그건 또 무슨 소리?”
“시치미 떼지 마라. 대륙의 서부에서 느꼈던 강대한 힘의 파장, 그건 네 녀석이 보낸 것이지.”
그 말에 나는 속에서 철렁이는 것을 느꼈다.
“나뿐만 아니라 동면에든 수많은 존재를 깨웠다. 네 녀석이 말이야.”
그녀는 까르륵 웃으며 나를 비웃었다.
“꼴 좋구나. 보아하니 꽤 신임받는 인물 같은데, 이 대륙의 인간들이 네가 저지른 짓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데이비……”
그녀의 말에 페르세르크는 어깨에 앉은 채로 작은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었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금기를 어겼다라.”
“……”
“이봐, 심연의 공주.”
내 부름에 그녀가 나를 표독스레 노려본다.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아. 금기를 어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넌 잘 알고 있겠지?”
반쯤은 직감이었지만 예감은 적중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감안 했을 때, 나는 주신 프리아 여신의 성자로서 그를 그냥 둘 수 없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그, 그 무슨?!”
“지금부터 금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거하고, 이 사태를 일으킨 국왕 그리드 말론 브리우크를 처형할 거다.”
“하! 왕을 처형해? 내가 비록 인간들의 삶은 관심 없지만 그런 게 가능……”
“가능해. 지금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 말이야.”
몇 마디 말이면 대륙 전체를 뒤흔들어버릴 수 있거든.
왕은 아니지만, 폭군 놀음은 가능하다.
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내게 득이 될 게 없으니까.
“하지만 금기는 달라. 자칫했다간 대륙 자체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아.”
굳은 얼굴을 한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말해. 대체 네 정체가 뭐야. 뭘 원한 거야.”
“흥! 내가 말할 것 같……”
“가자, 페르세르크. 규정대로 일을 처리해야겠다.
“자, 잠깐!!”
비명을 지르듯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사슬 때문에 한 차례 튕겨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심연의 공주 정도 되면 단순 완력으로도 저런 건 끊어버릴 수 있을 텐데.
“말해줄 건가?”
“웃기는 소리, 나는 그 아둔한 인간 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요즘엔 아무 관련도 없는데 어머니와 자식 관계가 되나?”
내 말에 그녀는 침묵했다.
“결정해. 왕이 죽던지, 말을 하던지. 참고로 거짓말할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싸늘한 내 말투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악랄하기 그지없구나.”
“칭찬은 감사히 받지. 그래서 말해줄 거야 안 해줄 거야.”
“……”
“가자.”
“자, 잠깐!”
“뭐.”
내 물음에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인상을 더욱 찌푸린다.
“그…… 자, 자자잠깐!!”
우물쭈물하는 모양새에 말없이 몸을 돌리자 그녀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탁이다!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라! 차라리 나를 죽이면 되잖아!”
“아니. 그러면 말을 하시라고.”
“큭……”
“가……”
“마,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그녀의 외침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지 목숨을 버리려 드는 심연의 공주라니.
살다 살다 별의별 일을 다 겪는 느낌이었다.
* * *
마녀의 화형식은 집행되었다.
브리우크 수도 광장에서 거대한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 아래로 불이 타오르게 만들 장작들과 화염의 위력을 끌어올린 매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마녀가 날뛸 수도 있다는 점은 그녀가 죽어 사라지기 전까지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녀의 힘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마법서는 왕국의 보고에 압수당해 긴밀하게 보관되었다.
악마의 서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단 채로 말이다.
“죽어라! 이 마녀야!!”
“빌어먹을 내 아들 살려내라고!”
사방에서 지독한 독설이 쏟아져 내렸다.
끔찍한 저주와 날아드는 돌덩이를 맞아가면서도 로브로 얼굴을 가린 소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 마라! 이송하는 기사들이 맞지 않는가!!”
격분한 기사들의 외침에도 성난 군중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가 불러들인 괴물.
브라가의 첫 습격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으니 증오는 당연했다.
말없이 기사들에게 인도되어 십자가에 매달리자 사방에서 돌들이 더 많이 날아들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 돌에 맞아 피가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왕자는 당당하게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왕은 불참했다.
그녀의 처형 집행은 앞으로 약 한 시간 정도 후. 그동안 그녀는 수많은 저주를 받으면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후회합니까?”
불참했다 해도 국왕 그리드 발론 브리우크는 높은 첨탑의 창을 통해 왕국수도의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당신은……”
나를 발견한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크흠. 데이비 올 라운왕자 이시군. 무슨 일이시오.”
“국왕님께 할 말이 있어서요.”
담담하게 말한 내가 물었다.
“왕이 된 걸 후회합니까?”
내 물음에 그가 침묵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왕자, 아무리 왕자가 성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어서 각국에서 대접을 받는다지만 이리 연통도 없이……“
“왕이 되면 마녀를 도와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으로 마녀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후회스럽습니까?”
내 물음에 화를 내던 그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왕자.”
그의 목소리엔 노기가 어려있었다.
“대체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경우에 따라선 국왕을 모욕한 죄를 접목하겠네. 아무리 성자라도 그 피해에서 완전히 치외법권을 요구할 순 없는 법.”
“그 전에.”
내가 말끝을 흐렸다. 이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금기를 어기는 게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의 표정이 파랗게 질린다.
“그 내막에 뭐가 있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왕님이 그동안 성군으로서 수많은 이들을 어루살핀 존재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엔 말입니다.”
해선 될 게 있고 안 될 게 있어, 이 양반아.
“이미…… 알고 있었던 겐가.”
“우연찮게 알게 되었죠. 금기라는 게 막 어긴다고 곧바로 눈에 띄고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 그렇군. 업보인 게지.”
말끝을 흐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어린 것은 체념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얼굴의.
“그, 그렇다면 나를 어찌할 텐가.”
“저도 아주 곤란한 상태입니다. 하나 일이 해결되나 했더니, 또 하나가 난동을 부렸더라고요. 그래서 별수 없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앞으로 이 일이 언젠가 제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이든 제 입장에선 대출혈이네요.”
담담하게 말한 내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동시에.
어둑어둑한 석실 내부에 붉은 피가 튀었다.
그 피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피에는 핏값이 따른다더라.
* * *
마녀의 화형식이 곧 시작된다.
대륙의 최대미녀라는 존재는 칭호에 가깝다.
과거 베르단데는 지금은 6대 미녀였지만 과거엔 그보다 오래전 그 칭호의 한 축을 맡았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과거의 꽃이었던 미녀 베르단데라고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횃불은 금방이라도 베르단데를 태워죽일 것처럼 타올랐다.
다만 모두가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개처형은…… 별로 좋은 수단은 아니야. 역시.”
“하나를 처벌하여 백 명에게 교훈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공포정치엔 아주 좋은 시스템이지만…… 저런 처형식 하나하나가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는 극도의 역효과를 내겠죠.”
그 말에 일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 어딜 다녀온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흐응…… 그런데, 너 그런 옷도 입고 다녔어?”
그녀의 말에 나는 내가 입고 있는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뭐, 입을 때도 있어야지.”
내가 입고 있는 복장은 평소의 간편하면서도 깔끔한 복장이 아니었다. 외려 과할 정도로 정복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순백의 복장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내 말에 일리나와 레이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려던 그 순간이었다.
“에고고, 제가 늦었죠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소녀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에 의문이 어렸다.
리나 성녀 후보.
현시대 유일한 성녀 후보로서 조만간 성녀의 직위를 내려받는 의식을 치를 유일한 여성이었다.
“하아…… 하아…… 데이비니임~ 너무 빠르게 가신 거 아니에요오?”
특유의 말끝을 늘어뜨리는 목소리로 내게 투정하는 리나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가요오? 아 참, 앨리스님은…… 잘 계시죠?”
과거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으면서도 아직도 챙기는 걸 보면 그녀도 정상범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현재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진 중 한 사람이 된 앨리스 대주교는 그녀를 두고 머릿속이 꽃밭투성이인 멍청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저런 이타적인 성정이니 선택받은 것일 테지만 말이다.
“헤헤. 정말 멋지시네요. 의복이.”
“리나 성녀 후보님도 아름다우시네요.”
“신관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사치일 뿐인걸요오.”
그렇게 말하지만, 그녀는 옷이 날개라는 말을 입증하든 상당히 눈이 부셨다.
갑작스런 리나 성녀 후보의 등장에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이들은 곧 내가 광장으로 나가자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녀! 마지막으로 할 말을 남겨라!”
선선한 공기 속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침묵하고 있던 마녀, 베르단데가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성난 군중을 보더니 쿡쿡 웃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서 불이나 붙이렴.”
그 말에 기사 하나가 발끈하며 다가갔다.
“형을 집행하라!!”
왕자 그레이드 말론 브리우크의 외침에 기사들이 횃불을 들이밀었다.
“잠깐만요!”
그때였다.
좌중이 갈라지며 등장한 리나 성녀후보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를 호위하는 성기사들은 절도있는 자세로 도열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서 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데이비…… 왕자님?”
갑작스런 내 행동에 그레이드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이처럼 무표정으로 말했다.
“성자의 이름으로 마녀의 신병을 양도받겠습니다.”
콰당!!
“그, 그 무슨?!”
놀라 벌떡 일어나는 그레이드와 얼굴을 숙이고 있던 베르단데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마녀의 힘은 단순히 불로 태워죽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일이 심각하게 변했습니다. 왕자.”
내 말에 그가 표정을 찌푸린다.
“이대로 그녀를 죽이면 일이 더 커질 겁니다. 이미…… 브리우크 왕국의 국왕 그리드 말론 브리우크 폐하께서 마녀가 뿌려둔 저주의 잔향이 만든 여파에 휩쓸려 조금 전 서거하셨습니다.”
내 말에 광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성국의 힘을 빌려 마녀를 성지에 가두고 그녀가 뿌려둔 잔향을 모두 제거한 후 성국의 절차에 따라 처형하겠습니다.”
“거, 거짓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기사단장! 폐하! 폐하를 찾으세요!”
당황한 왕태자의 외침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선택권은 주지 않겠습니다. 왕태자. 이대로 그냥 그녀를 죽이면 이 나라의 인구 다수가 마녀의 잔향에 죽어 나갈 테니까요. 비록 성국 소속은 아니지만 성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는 이 사태에 힘입어 한사람이라도 살려야겠습니다.”
내 말에 광장에 혼란과 공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론이 들끓는다.
그래, 더욱 난동을 부려라. 그래야 일이 편해지니까.
“데이비, 아직도 그녀를 죽일 생각인 게야?”
페르세르크의 질문이 들려왔다. 심연의 공주가 불에 타 죽는 거로 해결이 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녀는 그런 것으로 죽지 않는다.
곧이어.
“태, 태자 저하!! 태자 저하아아!!! 폐하…… 폐하께서!!!”
그 외침에 그레이드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고.
그의 몸이 힘이 빠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 아바마마.”
통한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