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0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유르기안 대륙 창공 수만 피트에는 간혹 수중 공간이 존재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면 하늘 높은 곳곳에 얼지 않는 소재가 뒤섞인 물이 냉기를 부력 삼아 하늘을 부유하는 강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무거워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게를 지닌 구름이지만 그 안에 녹아든 천연자원이 그 물을 붙잡아 떨어지지 못하게 묶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범위가 마냥 넓지는 않지만 한번 발생하면 근 수십 년간 대륙 전체를 떠도는 강 구름이기에 대륙의 인간들은 그 높은 물속에 커다란 장비를 심어 세상을 관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 원리를 발견한 건 현자의 돌 그 자체 또는 연금술사의 신이라 불렸던 사내.
이바 반 호엔하임의 학술서에서 한 차례 밝혀진 바가 있었다.
이바노프는 현재 그렇게 하늘에 뜬 강 구름 내부에 설치해 둔 지상 관측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쏘아 올려진 관측기구는 본래 파라솔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지만, 너구리 도시에서 데이비가 한 차례 그놈들을 뒤흔들어놓아 버린 탓에 너구리 도시에서 해킹을 시도한 결과, 성공하는 사태까지 온 것이다.
너구리 도시는 엄청난 수의 변이체가 우글거리던 도시라 다시 수복하고 싶어도 반쯤은 거주지 측으로서도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이 그것을 바꾸어놓았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툭하면 위험 변이체들이 들이닥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정말 하나의 변이체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감염 변이체에게 당하지 않은 살아남은 야생동물만이 도시를 거닐 정도로 말이다.
깔끔하게 변해버렸다는 레온의 보고에 이바노프는 곧바로 지도자인 오쉔에게 의견을 피력해 인원을 파견.
도시의 중심부까지 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후 이바노프는 강 구름 속에 있는 관측장비를 장악해 현재 홀로 이동을 시작한 자신들의 은인.
데이비를 찾고 있었다.
“이바노프님. 대체 그는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형을 만난 건 정말 짧은 시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까칠한 성격에 비해 심성이 곧은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요.”
“그건 압니다만…….”
“오쉔 경장님, 그건 나도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바노프님? 지금은 그런 장비를 장악하는 것보다 치료제를……”
“그건 리사 쉔 씨가 이미 작업에 들어갔어요. 생명공학에 한해선 그분이 최고 권위자인 만큼 제가 가본들 방해만 될 거에요.”
“그래도.”
“아직 전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이니까요.”
그 풋내기 꼬맹이가 일찍이 유르기안 대륙에 존재하던 수많은 국가의 보안을 모조리 뚫어버리고 관측장비를 장악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뒤이어 레온이 들어오며 말하자 오쉔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만 들어선 전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라…… 단신으로 도시 내의 모든 감염체를 삽시간에 지워버렸다니 누가 그걸 쉽게 믿겠……”
“아. 반응 잡혔어요. 영상 송출할게요.”
장비를 다루던 이바노프가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커다란 수정구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마치 빔 프로젝트처럼 벽면에 영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영상에 비치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의 감염 변이체들이었다.
-끄우어어어어어!!
쿵!!!
목적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는 감염체들은 움직일 듯 움직이지 않는 듯 가만히 서서 괴성을 흘려대고 있었다.
쿠웅!!!!
이윽고 또 한 번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지면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근육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탄……”
그 모습을 본 오쉔과 이바노프가 침음을 삼켰다.
상급 무기도 통하지 않는 저 괴물은 고작 5마리만으로 중소규모 도시 하나를 초토화한 전적이 있는 악마 중에 악마였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 데다 식성도 엄청나고 활동범위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흉폭한 성질은 더 말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놈은 사람을 물어 기생체를 번식시키는 행동은 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거대한 육신을 이용해 짓밟고 부수는 데에 완전히 특화되어 있었다.
놈의 무식한 전력은 이미 몇 차례 유명하게 알려진 바 있다.
화약을 담은 폭약을 투하하는 진동 수송기를 점프만으로 낚아채 투포환 던지듯 던졌다는 그런 전례들이 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자극하는 타이탄부터 수많은 돌연변이 변이체가 드러나자 이내 감염체들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맙소사…… 이곳이에요!”
“수는?! 수는 얼마나 됩니까!”
“기다려보세요!”
파랗게 질린 이바노프가 커다란 원형 단추를 돌려 무언가를 맞추고 조절하기 시작했다.
삐릭…… 삑…….
동시에 기계음이 들리더니 이내 숫자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4만…… 저 속도라면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면 이 도시의 근방까지 도착할 거에요. 파라솔이 작정하고 공격을……”
“오…… 신이시여…….”
오쉔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직…….
그때였다.
관측장비에서 미약한 노이즈가 잡히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바노프님, 혹시 파라솔 놈들이 역으로 장악을……”
“아니에요! 거대한 전자파가 방해하……”
급히 소리치던 모두가 굳어버렸다. 관측장비의 바로 앞으로 새카만 무언가가 후웅! 하고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굳어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방금 우리가 본 게……”
경악한 듯 중얼거린 오쉔의 말에 이바노프가 식은땀을 흘렸다.
반대로 레온의 표정이 환해졌다.
“데이비!”
쩌적!!
그 외침과 동시에.
노이즈가 끼던 영상이 다시 깔끔해지며 변이체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히 도시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변이체들의 엄청난 존재감에 다시 숨이 턱턱 막히려던 찰나.
찌잉……
약하고 짧은 소음이 울려 퍼지며 아주 가느다란 빛줄기가 지면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빛줄기가 닿은 지상에서 똑같은 빛으로 된 원형 파장이 몇 차례 퍼져나갔다.
“저게 대체 무슨……”
지잉!!! 쿠아아앙!!!!
동시에 조용히 내리쬐던 빛줄기가 사라졌고, 곧이어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관측장비의 화면이 나가버렸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셔, 셨다운…… 강력한 에너지에 장비가 박살 나버렸어요…….”
기겁한 이바노프가 급히 다른 곳의 수정구와 장비들을 조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다행이다! 메인 동력은 잃었지만, 보조 동력원이 아직 무사했나 봐요! 영상 띄울게요!”
영상이 꺼지고 다시 켜지기까지 약 30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놀라운 실력으로 영상을 복구한 이바노프는 곧이어 열리는 영상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은 오쉔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봐요. 이바노프님. 지금 영상이…….”
“같은 장소를 관측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새카맣게 타버린 지면, 불타오르는 땅, 역류한 마그마까지.
변이체는커녕 지옥만 펼쳐져 있었다.
“대체 무슨…….”
“데이비가 데리고 다니던 그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용…… 그 놈의 짓이 분명합니다.”
이윽고 레온하르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용이라고?! 그런 게 실존할 리가……”
“그는 자신을 이방인이라 했어요. 어쩌면 연금술사의 신이라던 이바 반 호엔하임이 학술서에 기재했던 내용. 수많은 차원선 이론이 실제한 걸지도……”
이바노프의 말에 오쉔은 눈에 보인 장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침묵했다.
동시에 그 데이비라는 인물이 같은 편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저런 재앙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키는 인물이 파라솔과 손을 잡았더라면 저항은 의미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 * *
평온한 표정의 륀느와 다르게 페르세르크는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너무 이질적이야 이 대륙은.”
“마나가 없으니까.”
“뭔가 안정감이 없는 느낌인 게야……”
다른 에너지원 없이 오로지 연금술이라는 기술 하나로 발전해온 대륙이다.
마나가 없으니 이런 세상에 처음 도달해본 페르세르크에겐 느낌이 기묘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오래 있고 싶진 않아.”
“정리 끝내고 돌아가자.”
유르기안 대륙은 중요한 거래처다.
그런 거래처에 이물질이 끼이면 쓰나.
이미 프라운 박사인지 뭔지 하는 놈과 통신을 주고받으며 놈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후 심연의 공주가 나를 불러들이는 듯한 도발을 해왔으니.
이제 와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진 않으리라.
함정의 여부?
누구 앞에서 함정을 파려고.
후웅!!!!
[계약자, 네가 말한 좌표에 도달했다.]
“그대로 급강하. 닥치는 대로 부숴버려.”
내 말에 녀석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동시에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더니 그대로 고속 낙하하기 시작했다.
“일대만 정리하고 돌아가.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 테니.”
그 말과 함께 나는 페르세르크의 허벅지와 등에 팔을 받쳐 안아 들고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꺅?!”
갑작스런 낙하에 깜짝 놀란 페르세르크가 비명을 지르자 나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아든 뒤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5서클 중력계]
[그래비티]
내게 가해지는 중력을 수배로 늘리며 낙하속도를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그러자 페르세르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후웅…….
그리고, 내 육신이 지상에 낙하하기 직전 눈을 꼭 감는 그녀를 보고 만족감을 느끼고 난 뒤에야 나는 7서클 하이리버스 그래비티를 사용했다.
낙하 힘 자체를 완전히 제어하는 7서클 마법이 발현되자 주제도 모르고 속도를 올려가며 낙하하던 몸이 순식간에 허공에 멈췄다.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이제는 건축물 유행이 자연친화라도 되나?”
황색의 바위로 가득한 바위지대의 거대한 동굴 내부를 들여다보며 내가 픽 웃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이 나를 반기지만 목적지를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굴 내부에서 지독한 잔향이 풍겨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공주들이 지닌 특유의 강대한 힘을 말이다.
“가자! 륀느.”
이윽고 등허리에 난 날개를 펄럭이며 낙하하는 륀느에게 신호를 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까딱여 수십 수백 개의 광구를 만들어냈고 동굴 전역으로 퍼뜨린 뒤 조용히 중얼거렸다.
단순히 동굴을 밝히는 용도가 아니었다.
저 수백의 광구들은 하나같이 저서클의 마법.
하지만 그 마법을 조금만 손봐주면 이 유르기안 대륙에선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마법으로 변모한다.
시작은 거창하게 가보자.
[3서클 전류계]
[즉석 변이마법]
[EMP (Electromagnetic Pulse effect)]
연금술도 결국은 어느 정도 전기와 신소재를 이용한 기술이다.
그러니.
전자제품 어디 한번 망가뜨려 놓고 시작해보자.
피잉……
나를 떠나 동굴 내부로 쏘아져 들어간 광구들이 하나둘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마법을 가르친 건 오딘이지만 변형 법을 제시한 건 사실 이바 반 호엔하임.
바로 그였다.
그는 혹여라도 유르기안 대륙에 도달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써먹기 좋을 거라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톡톡히 보게 생겼다.
쩌엉!! 쩡!!
기이한 소리와 함께 전자기파가 퍼져나가며 닥치는 대로 여파를 퍼트려 나가자 내부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좀 전부터 아주 미약하게 동굴 일부에서 느껴지던 진동이 모조리 멈췄다.
“데이비님. 진동 수송기와 일치하는 진동파들이 일제히 작동을 중지했다고 보고.”
“그래.”
도망칠 생각은 마셔야지.
이후 나는 거대한 광구 두 개만 띄워 놓은 채 동굴 내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환한 광구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통로를 대낮처럼 밝힌다.
동굴 내부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 나는 곧 사람의 손을 탄 듯한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광구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틈은 벌려져 있지만,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 비좁게 열린 상태였다.
이에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륀느가 다가와 크로우바로 문을 강제로 틀어 열어버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 문이 강제로 열어젖히기 시작하며 그 안에서 묘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읏?”
그때였다.
내게 안겨 있던 페르세르크가 몸을 가늘게 움찔거린 것이다.
동시에 문을 열어젖히던 륀느 또한 몸이 굳었다.
미약한 향이지만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앞섰다.
말없이 페르세르크를 내려놓은 내가 바람을 일으켜 향을 모두 날려버리려던 찰나.
갑자기 크로우바를 움직여 문을 열어젖히던 륀느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털썩 주저앉은 채 몸을 바들바들 떠는 녀석은 이상을 그대로 보여주듯 푸른 눈동자에 수많은 문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데, 데이비님…… 감각회로 이상을 가…… 가가가가감…… 지.”
바들바들 떠는 륀느의 모습에 내가 천천히 다가가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흡?!”
동시에 륀느가 온몸을 크게 경련하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몸은 마치 극도로 예민해진 몸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침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륀느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내가 눈을 찌푸리고 있던 찰나.
그나마 멀쩡하던 페르세르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 이 건방진 것이 대체 몸에 무슨 짓을……”
와들와들 떠는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가까이 오지 마! 데이비!!”
페르세르크의 비명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왜 이래.”
“모, 몸의 감각이 즈, 증폭됐어……. 닿기만 해도 지금…….”
그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온몸의 감각이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민해져 버렸다 이거 아니야.
그 원흉은 문이 열리며 흘러나온 불쾌한 향이 원인이었던 듯싶다.
골렘인 륀느와 페르세르크에게까지 통한다는 말인즉슨. 심연의 공주의 힘이라는 소리인데.
그런 내 중얼거림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때, 제법 감각이 신선하지?”
“흐읏……”
신음을 흘리며 파르르 떠는 것을 보니 움직이는 것 자체도 힘들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말없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환영처럼 이루어진 야한 복장의 여성이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구나? 제법 대단한 힘이긴 한데 그래 봐야 인간이지.”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손을 가볍게 뻗어 턱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더러워져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린다.
“미치겠지? 온몸의 감각이 증폭되어서 고통스러울 거야. 몸이 예민해진다는 건 그런 거니까.”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말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오만한 인간아. 나는 심연의 근원 중 하나이니. 너희 같은 미물 수백 수천이 몰려온 들 내게는 닿지 못해.”
그녀의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이년은 내가 슬리지아와 싸운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심연의 공주가 한둘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지만.
“고통스러워 보이네? 조금 도와줄까?”
그런 그녀가 힘을 발현했다.
“대체 무슨…… 무슨 짓을 한 게야!”
격하게 소리치는 페르세르크의 외침에 그녀는 키득키득하며 말했다.
“저주를 걸었을 뿐이야.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물론, 그 감도나 부위는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는걸?”
다른 심연의 공주와 다르게 마치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 같은 그 모습이었다.
“누구도 내 저주에선 벗어날 수 없어. 나는 저주 그 자체의 존재이니까. 그나저나 너희 반응이 정말 재밌구나? 내 일을 방해한 대가로 죽이려고 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면 그냥 장난감으로 써야겠어.”
그녀 또한 페르세르크가 심연이 찾아 헤매는 존재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나를 흘끗 본다. 그리고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다시 내 뺨을 쓸어내린다.
“어때? 미치겠지?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서 화끈거리지 않아?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이토록 재미있어. 어때? 너 제법 맛있게 생겼는데. 내 소유물이 되면 극상의 쾌락을 보여줄게. 인간은 암수가 교합하는 것으로 쾌락을 느낀다고 했나? 내가 감각을 조금만 손봐주면 그 어떤 것보다 큰 쾌락을……”
그녀의 제안에 나는 굳은 얼굴로 심연의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어?”
당황한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저주를 다루는 심연의 공주라. 얄궂은 현실도 이런 얄궂은 현실이 따로 없다.
“야.”
이어지는 내 목소리에 모두가 침묵했다. 침까지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나를 바라보는 페르세르크와 륀느는 빨리 좀 도와달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체 골렘, 마왕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포괄적인 범위의 저주라니 엄청난 범위 포용성이었다.
“이거, 나도 가르쳐줘라.”
좋은 건 같이 좀 나눠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