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1화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저주라니.
이렇게 효율 높고 제멋대로인 저주는 내 흥미를 강렬하게 끌었다.
이거 한방이면……, 꼼짝을 못해.
어떻게든 내게 복수하려 하는 페르세르크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불만이 있을 때마다 아닌 척 사고를 치는 륀느에게도 먹힌다는 말은 굉장한 칼자루 손에 쥔 셈이었다.
“너, 너 뭐야.”
내 손에서 벗어나 한차례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난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분명 움직일 수도 없을 텐데?”
“아니, 살려줄 테니까 그거 좀 알려달라니까?”
“데이비?! 장난치지 마라!”
“아니, 심연이고 뭐고 앞으로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넌 모르고 있다.”
강하게 의견을 피력한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심연의 공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내게 손을 뻗었다.
“저주가 먹히지 않았나? 그럼 이건 어떨까?”
그녀의 손이 허공을 휘젓자 검은색 바람이 강하게 한차례 나를 덮쳤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극한의 고통을 맛볼 수 있을 거야. 어디 그것도 버텨봐!”
뭔가 거북한 기류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건 확연히 느껴졌다.
처음과 마찬가지.
하지만.
쏴아아아아……
내 몸 안에, 아니,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어딘가에 심어진 어둡고 음습한 것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온 그 불쾌한 기류를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여긴 내 집이야. 당장 꺼져.’
마치 그렇게 말하듯.
영혼의 내부에서 흘러나온 새카만 손이 기류를 움켜잡아 비틀기 시작했다.
급이 다른 어둡고 깊은 기류로 불청객에 불과한 불쾌한 기류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내 몸 안에 새겨진 유일한 저주. 세계의 근원 급에 해당하는 흐름 거부의 저주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스스스…….
“뭐, 뭐야…… 너 뭐냐고!!”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심연의 공주가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아니, 도망가지 마라니까?”
유쾌하게 웃으며 다가가는 나와는 별개로 그녀의 표정은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파랗게 질려있었다.
저주 말고 다른 힘은 없는 모양이네.
이전에 만났던 거인족 리치, 8서클의 저주 흑마법사인 클레르 오르판의 경우 저주의 질이 너무 낮아서 반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금에 이르러 확인한 저주를 다루는 심연의 공주.
심연의 공주는 내가 본 이들만 해도 하나하나가 세상을 지워버릴 힘을 지니고 있었다.
베르단데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지만 실제로 슬리지아나 울드의 경우는 세상을 지워버릴 충분하고도 남을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저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저주는 제한이 없고 한계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런 만큼 수천수만이 몰려와도 그녀가 저주를 뿌리는 순간 모조리 지옥도가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무엇하는가.
그 심연의 힘조차 무시하는 급의 저주가 이미 내 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흑마법사이자 제대로 된 데스로드 로 아이아스는 그런 여인이었다.
회랑 내에서 존재하는 영웅 중 무력만으론 최상위급.
단순 규격만 놓고 따져볼 때 그 궤도가 다른 헤라클래스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영웅이 성질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강자였다.
그녀가 이룩한 깨달음은 지금의 나로서도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었고 그녀의 손짓 한번이 가져오는 여파는 같은 인간 출신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건 변함이 없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내 몸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손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경우 처음이겠지. 솔직히 흐름 거부의 저주가 이렇게 작정하고 반격을 하는 건 나로서도 처음 보았기에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힘인 저주가 내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계한 그녀는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 했다.
무슨 방법으로 실체가 아닌 환영을 통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콰직!!
로 아이아스의 저주는 나를 보호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내 마나들이 각기의 성질머리를 지니고 본체인 나를 지키고 있다면 흐름 거부의 저주는 후에 들어온 최종 보스나 다름없는 철옹성이라는 소리였다.
“가는 거야?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끅!?”
기겁하며 물러나는 그녀를 향해 내가 음산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고. 네가 사용하는 그 감각 증폭 저주. 그것만 가르쳐주면 돼.”
“미, 미친 인간!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지독한 저주를 품고도 살아있는 거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거겠지.”
저주는 어떤 존재건 한가지 절대 법칙을 적용한다.
상위 저주 앞에 하위저주는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그것은 심연도 다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한차례 흐름 거부 저주의 손에 물렸으니.
멀리 도망가진 못하리라.
심연의 공주 후퇴로 인해 저주에 시달리고 있던 륀느와 페르세르크가 헐떡이던 숨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륀느가…… 이것을 낮게 평가…… 하아……”
무표정을 고수하는 륀느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순간 일그러질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반사적으로 장난기가 돋은 내가 륀느를 향해 손을 뻗자 녀석이 기겁하듯 물러나며 저항 의사를 보여왔다.
“뤼, 륀느가 데이비님을 낮게 평가…….”
“아깝네.”
효과는 확실하다는 게 느껴졌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흰 손으로 자신의 추태를 숨기며 땀을 뻘뻘 흘린 페르세르크에게 다가가 손을 뻗은 나는 그대로 힘을 발현했다.
“여기서 기다려. 저주를 쓰는 년이면 몰려가 봐야 소용없으니.”
그렇게 말한 나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륀느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뒤쪽으로 돌아가. 도망치는 놈들이 있으면 겸사겸사 처리해버리고.”
“륀느가 명령 인수.”
짧게 대답한 녀석이 크로우바를 향해 손을 뻗자 금속 크로우바가 허공을 날아 그녀의 손에 안착했다.
이후 그녀는 등허리의 날개를 파르르 떨더니 이내 천천히 날아올라 페르세르크를 부축하고 동굴 입구의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쓰읍.
자, 그러면.
“우리 정중하게 거래를 해보자고.”
과거 지구에서 유명한 비 폭력주의자였던 위인이 그런 말을 남겼다.
순순히 넘기면,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쯤 되면 그 비폭력이라는 단어가 비(非)폭력인지 be 폭력인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지만 말이다.
“거기서 기다리라고.”
음산한 웃음을 지어 보인 나는 아공간에서 청단이와 홍단이를 뽑아 들고 걸음에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심연의 공주에게 닿는 길에 분명 방해가 있을 테지만 그거야 장애물일 테니 내 손에서 처리되어도 문제는 없으리라.
* * *
따다다다다닥…….
“이건…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콰앙!!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근처의 사물들이 일제히 허공을 날아 분자처럼 쪼개졌다.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도 물질을 분해하는 그녀의 힘은 섬뜩할 정도였다.
세계를 부술 수 있는 재앙.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명의 인간에게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인간의 몸에 품어진 저주는 그녀가 보기에도 처음 느껴보는 섬뜩한 힘이었으니 말이다.
“대체 뭐야……, 어떻게 인간이 그런 저주를 품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거야.”
그 전에.
어떻게 그런 저주를 품고도 아직 주변에서 그를 기억하고 있는가.
저주에 관해서 그녀가 모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이런 끔찍하고 어두운 저주는 처음이었다.
“있을 수 없어……. 우리 심연보다 더 어둡고 깊은 저주라니……. 그딴……”
와장창!!!!
유리창이 박살 나며 그녀의 분노가 터져나갔다.
“무슨 일입니까. 베르샤님!”
그 소란을 듣고 찾아온 몇몇 사내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사내들은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 주변을 에워싸는 검은 무언가에 휩싸여 멈춰 섰다.
“꺼져, 버러지들!”
“무, 무슨?! 으아아아아악!!!”
처음엔 얼굴의 살점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내들의 눈알이 마치 힘을 잃은 액체처럼 흐느적거리며 빠져나왔고 이내 전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질병이 일순간에 저주가 되어 사내들에게 쏘아진 것이다.
곧이어 악취를 풍기는 액체가 되어 무너진 사내들을 노려보던 그녀는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안돼…… 안돼…… 저주가 통하지 않는 괴물은 내 손으로 처리하기 힘들어……. 그렇다면 슬리지아! 슬리지아의 힘을 빌리자!”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는 급히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차원을 다루는 힘을 지닌 슬리지아의 힘이 있는 한 그녀들은 얼마든지 마크가 된 세상과 자신들의 고향을 오갈 수 있다.
실체가 아닌 허상으로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려워야 하는데 실체로 만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힘을 발현하는 순간 그 괴물 같은 인간의 몸에서 그 끔찍한 손이 다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극도로 상성이 나쁘다는 말을 절실히 느낀 베르샤는 곧 있으면 열릴 차원 균열을 기다렸다.
하지만.
“왜……, 열리지 않는 거야?!”
비명이 섞인 외침이었다.
그놈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심연의 공주로서 미물 같은 벌레에게 도망친다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슬리지아! 어째서 열리지 않는 거야!”
열리지 않는 균열을 향해 소리치는 그녀였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격이 괴팍해도 이 모든 루트는 슬리지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응답을 해야 할진대.
“죽었으니 대답이 없지.”
그때였다.
그녀의 뒤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인간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저 인간이 품고 있는 검은 저주는 그녀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와들와들 떨며 물러난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여길?!”
“로 아이아스의 저주는 한번 물어뜯으면 절대 안 놔주거든. 네가 어디로 도망가건 무조건 찾아가서 널 찢어놓을 거다.”
소년, 아니 남성의 말에 베르샤의 얼굴에 그 끔찍한 어둠의 공포가 전해져왔다.
“살고 싶나?”
그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힘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를 향해 저주를 쓰는 순간.
그 끔찍한 손이 다시금 튀어나올 테니까.
“아아아아악!!!”
결국, 악을 쓰며 그녀가 육탄 돌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저주의 힘이 봉인되어도 고작 인간 따위에게 육체 능력에서 밀릴…….
콰드득…….
소년의 손에 잡힌 그녀의 팔이 기괴하게 뒤틀리자 그녀의 얼굴에 경악성이 어렸다.
“슬리지아, 울드, 베르단데. 내가 지금까지 심연의 공주만 몇 번을 만났는데 힘 조절도 못할까.
보통 심연의 존재, 그것도 상위의 괴물인 심연의 공주는 어지간한 물리력으론 치명상을 입히는 게 쉽지 않지만 내게는 심연 자체에 치명적인 힘이 존재한다.
미물이라 여겼던 인간이 이토록 쉽게 방어를 뚫고 치명상을 가해오는 게 베르샤에겐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좋은 건 나눠 써야지.”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듯한 그 말에 베르샤의 동공이 끝도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 인간은 더 이상 그녀에게 미물이 아니었다.
엄연히 그녀를 이 자리에서 찢어놓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
“살고 싶어? 그럼 네 힘의 근원을 내놔.”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다.
“내, 내가 미물에게 그걸 내어줄 것…… 커헉?!”
비명을 지른 그녀의 육신이 짓눌린다.
동시에 그녀의 목에 시퍼런 검이 걸렸고 검신의 위로 검은 기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했던가.
칼을 들었으니 이젠 어림없을 뿐이다.
* * *
고요한 참상.
수많은 변이체와 그들을 제어하던 이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인간의 생명을 벌레 다루듯 다루며 악행을 저질러온 이들에게 동정심을 베풀 존재는 없었다.
륀느는 구현화한 라이트 세이버와 오함마를 분자 단위로 되돌린 뒤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페르님. 생체 신호에 이상이 있다고 륀느가 판단해.”
“괜찮아. 륀느. 그저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런 것뿐이니.”
페르세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감각 증폭, 모든 감각이 극도로 증폭되며 닿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저주라면 그런 끔찍한 저주도 없었다.
심연의 존재들이 어머니, 혹은 여왕이라 부를 만큼 그녀의 존재가 심연의 깊숙한 곳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건 그녀도 잘 알지만, 지금의 그녀는 심연의 흔적을 지녔을 뿐 그 힘을 모조리 꺼내 사용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심연의 공주 같은 강한 존재의 저주를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후우…….”
데이비는 그녀에게 걸렸던 저주를 보고 눈을 번뜩였었다.
그 미치광이 사디스트인 데이비가 그 저주의 흐름 방식을 깨닫고 응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섬뜩한 오한에 몸을 파르르 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심연의 공주가 사용하는 저주는 기존의 저주와 다르다. 그러니까 데이비가 관심이 있다고 해도 사용하진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스르륵…….
“흐끼익!?!”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그녀가 털썩 무릎을 모은 채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 섬뜩한 감각. 온몸의 신경세포가 눈을 부릅뜬 것만 같은 찌릿한 기분을 어찌 잊을까.
섬뜩한 느낌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살짝만 손봐줬을 뿐인데 이 정도 효과라……. 이거 진짜 끝내주는데?”
잔뜩 흥미가 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고 있는 데이비가 보였다.
대체 어떻게? 무슨 방식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짧은 시간에 데이비는 그 빌어먹을 심연의 공주가 사용했던 감각 증폭의 저주와 똑같은 힘을 얻은 후였다.
문제는 처음 당했던 저주는 감각이 증폭되어 몸이 저릿저릿한 정도였다. 닿는 즉시 비명을 지르게 할 만큼 예민하게 만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해내고 있었다.
식은땀이 그녀의 흰 뒷목에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기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