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2화
“데이비님, 절대 접근을 금지해.”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며 절대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는 륀느는 감각 증폭의 저주가 상당히 큰 여파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맹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이토록 철통같이 거부 의사를 보이는 걸 보면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그래. 어차피 이것도 저주의 일종인데 내가 쓸 리가 있나. 그냥 필요해서 얻은 것뿐이야.”
장난이었다는 듯 내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주자 녀석이 의심스러운 듯 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지금이니!
“흐읏?!”
몸 대부분이 파손되어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던 륀느의 새된 비명에 나는 입꼬리가 귓가에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끝내준다.”
심연의 공주가 사용한 저주는 효과 자체는 깔끔했다. 저주가 가지는 뒤탈이 생각보다 없다는 소리였다.
오로지 한가지 목적을 깔끔하게 완수하는 능력.
그 부분이 끌렸다.
비슷한 저주야 있지만 그걸 마구잡이로 사용하다간 후에 어떤 후폭풍이 찾아올지 나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손에 이미 소멸해 버린 베르샤의 힘을 응축시켜내는 데에 성공했다.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구슬.
감각 증폭 저주의 힘을 내 마나와 연동시켜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살고자 악을 쓰던 그녀가 내게 스스로 건넨 것이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을 담은 그 구슬을 내게 건네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해보려 했지만, 나는 결국 그녀를 소멸시켰다.
그렇게 협조적인 그녀를 너무 쉽게 죽인 것이 아니냐고?
그녀는 자신의 저주와 다른 능력을 통해 기생체를 만들어냈고 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당연, 그녀는 저항했지만 나는 슬리지아를 처리할 때와 같이 심연의 공주 근원이 되는 핵을 금기의 업으로 찍어 눌러 터뜨려버렸다.
두 번째 심연의 공주가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 몇 명의 심연의 공주가 더 남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심연의 공주가 줄어들 때마다 심연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말이다.
내게 속아 또 한 번 감각 증폭을 당해버린 륀느가 펄쩍 뛰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나를 향해 거대한 포신을 구현화해 겨누었다.
“데이비님을 륀느가 낮게 평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당장에라도 쏠 것처럼 구는 그 모습에 나는 페르세르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효과는 어때?”
“그대는 정말 최악이야, 데이비…….”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대답을 보면 효과는 확실한 듯 보였다.
“걱정 마, 위험요소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심연의 힘은 어디에 위험요소가 있을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게 많다. 그러니 조심성은 필수요소였다.
거짓 없는 내 발언에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의심스레 바라보았지만 나는 당분간은 이 둘에게 이 힘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일리나는 어떨는지 조금 기대가 되네.”
“그 아이에게 반드시 경고를 해둬야겠어.”
“입 다물고 있으면 지금 당장 이것을 쓰지 않으마.”
“더럽고 치사한 게야!!”
보는 내내 전신 안마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엄청난 매력을 지닌 금발 검의 공주님인 일리나라면 이 구슬의 효과를 극상으로 맛볼 수 있으리라.
혀를 내두르며 손에 쥐어진 구슬을 몇 차례 쥐었다가 펴자 역겨운 심연의 기운이 구슬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일단 힘의 근원 자체가 저주인 만큼 내게 해를 가하려다가도 흐름의 저주가 힘을 가해 그것을 찍어눌러 버렸다.
“결국, 나 말고는 아무도 못 쓰는 물건이라는 소리네.”
구슬 자체는 베르샤의 수많은 저주가 담긴 핵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감각 증폭의 저주를 내가 멋대로 끌어내 사용하곤 있지만 깊게 파고들어 보면 내가 그 힘을 끌어다 사용할 때마다 구슬 내에 깃든 베르샤의 원념 깊은 수만 가지 저주가 시전자인 나를 덮친다.
흐름 거부의 저주가 없었다면 봉인 지정물로 삼아야 할 만큼 위험천만한 물건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저주가 안 통하는 내 몸에 그것은 없느니만 못한 페널티라는 점이었다.
다른 이라면 당장에 피거품을 물고 쓰러지던, 오는 길에 본 희생자들처럼 온몸이 녹아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위험한 물건이니 구슬 자체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건 절대 피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도망친 놈들은?”
“하나, 놓쳤어.”
이미 도착했을 땐 모종의 방법을 통해 이곳을 빠져나간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악역은 질기다더니.”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미련 없이 도망친 놈들을 포기했다.
동시에 내 표정이 더없이 찌푸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두통이 이제 한계치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은 나로서도 버티기 힘들다.
그쯤 생각이 미친 나는 곧바로 차원 열쇠를 꺼내 들었다.
“곧바로 돌아가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손잡아.”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륀느와 페르세르크가 다가와 내 몸에 손을 접촉했다.
스팡!!!
동시에 지독한 멀미가 몰려오며 내 정신이 어디론 가로 튕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
주원료인 플루튬을 구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추가로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선 준비단계가 더 필요했다.
원자로의 주요 에너지원으로 책정한 공허 에너지.
마계에서 내가 흘린 마왕의 권위 하나를 주워 먹고 스스로를 파괴의 마왕이라 칭하는 이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올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내 몸에서 흩어진 힘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한가지 목적 중 하나였다.
연금학파의 기술고문 에디손을 포함한 이번 대형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금속인 플루튬을 보며 매우 놀라워했다.
변온 조절이 쉬운데 그 온도 조절마다 에너지 전도율을 멋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그 외에도 플루튬은 여러 가지 요소에서 기존의 다른 금속과는 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볍다는 점, 그리고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점까지 말이다.
플루튬의 최대장점은 온도에 따른 힘의 전도율에 있었다.
나는 한차례 이 플루튬이라는 금속이 마나를 포함한 비물리 법칙계의 힘에 익숙해질 경우 마나를 전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공정하는 과정까지 이미 시뮬레이팅을 끝내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플루튬을 그렇게 정제하기 위해선 원자로의 근원 에너지가 되어줄 공허 에너지.
즉 마계에서 자리를 잡은 파괴 마왕의 힘을 구해올 필요가 있었다.
페르세르크는 유르기안 대륙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움직이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내 성격상 그녀와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문제는 마계로 가는 방향이었다.
과거 검신 하레스가 마족들을 모두 그곳으로 쫓아냈던 사실은 역사서에도 실려있다.
그렇다면 그는 차원을 갈라 그들 모두를 쫓아낸 것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차원 열쇠로 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분명히 마계는 차원 열쇠로 갈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이 티오니스 대륙 어딘가에 인공 마계로 통하는 길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건 전문가에게 물어봐야지.”
지금 나와 그나마 말이 통하면서 가장 마계의 마족들과 관련이 깊은 이가 딱 한 명.
하인스 영지, 그것도 아카데미 내에 있다.
“으우웅!! 링느!! 링느 도망가지 마!”
“뤼, 륀느의 행동 제어 회로가 과열되었다고 판단……”
“린느 아파? 처, 청단이가 호~해 줄래…….”
한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체마냥 추욱 늘어진 륀느와 그런 륀느의 곁에 앉아 장난을 치고 있는 앙증맞은 두 아이가 보였다.
륀느에게도 휴가를 줄 필요가 있었다.
“청단이 홍단이.”
“네에!”
“아빠”
내 부름에 녀석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청단이 홍단이, 친구 보러 갈까?”
“친구우?”
“그래. 뮤우 보러 가자!”
“갈래! 홍다니 갈래! 홍다니 뮤우 보고 시퍼!”
대뜸 안겨드는 두 아이를 안아 든 채 나는 영지의 서쪽에 위치한 아카데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하인스 아카데미는 이전 정식으로 개교한 이래로 상당히 활기찬 분위기를 지니게 되었다.
프루그레프 왕국의 흔적에서 저주를 받아 묶여있던 망자들의 혼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아카데미 내에서 배회할 것을 부탁했다.
내게 호의를 품은 망자의 혼들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아카데미 건물에 익숙해져 자신들의 자리를 잡은 모습이었다.
강당에 자리 잡은 영혼, 화장실에 자리 잡은 영혼, 장식된 조형물에 자리 잡은 영혼까지.
“뭘 봐! 너 내가 벽화 속에서나 사는 유령이라고 개 무시…… 흐억!”
“무시하냐고?”
늘 그렇듯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타나 고압적으로 외치던 유령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마치 사단장을 만난 이등병처럼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유령의 모습에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형체가 없는 유령이지만 나는 녀석의 실체를 고정해 붙잡는 기행까지 보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유령은 안 그래도 퍼런색을 띠고 있는 주제에 얼굴이 더욱 퍼렇게 질려버렸다.
잔뜩 질린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에 내가 킥킥 웃어 보였다.
“컨셉 잘 잡았네. 그래. 그렇게만 해. 삭막한 아카데미 분위기는 너희들에게 맡겼으니까.”
나도 사람이고 눈과 귀가 있는 이상 교수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빡센 곳일수록 의외의 부분에서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존재는 필수요소였다.
무슨 소리냐고?
교육을 받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보면 답이 나오리라.
“지금부터 구호는 악! 이다! 알겠나?! 지금부터 나는 한 명의 악마이며! 너희들은 그런 악마에게서 벗어날 단 한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아악!!!”
“악!!”
초보 검사들이나 입을 법한 복장을 한 소년 소녀들이 악 소리를 지르며 잔디가 깔린 연병장을 구르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검술 학부, 마법 학부.
“저게 그 유명한 굴낳괴인가?”
굴낳괴. 굴림이 낳은 괴물.
지독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물론, 저들의 행동은 하나하나 효율적이었으며 감정에 의거한 학대는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평범한 학생들이 순식간에 검을 익혀나가고 서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아카데미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대륙 곳곳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질 정도라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나마 나은 곳은 연금 학부나 교양 학부였다.
“여기서 에릴리트 풀을 사용하면 산도가 중화되어……”
커다란 강당에서 수십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던 분홍빛 머리칼의 여성 밀피유가 갑작스레 들어선 나를 보고 수업을 멈췄다.
“무슨 일?”
“할 이야기가 있다.”
“……수업은 여기까지. 다들 자습하도록 해.”
밀피유의 말에 학생들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진다.
수업하라고 했더니 집중을 위해 매혹을 사용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