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4화
공간이 뒤틀리며 거대한 숲에 두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20대 정도의 아름다운 외향을 지니고 있었고, 한 명은 검은 머리카락에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대부분의 차원이 닫혔어. 슬리지아가 죽은 탓이겠지?”
“……그래.”
여성의 짧은 대답에 검은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 스쿨드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변의 나무에 손을 올렸다.
으지직…….
동시에 그녀의 손끝을 따라 나무가 일그러지고 뒤틀리며 검은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긴 멀쩡한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담담하게 대답하는 울드의 모습에 그녀의 동생 스쿨드는 나무에서 빠져나온 검은 기류를 제 몸으로 흡수시켰다.
“조심해 언니. 느낌이 안 좋아.”
“걱정 마. 이미 그 인간은 내게 한번 패배한 전적이 있어.”
“그건 그때잖아. 슬리지아가 죽은 건 그 이후야. 녀석은 단시간에 극도로 강해지는 무언가를 손에 넣었다고밖에 볼 수 없어. 만약 그 인간이 슬리지아를 죽일 정도의 힘을 넣은 게 사실이라면……”
스쿨드의 걱정 어린 말에 울드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끝없이 강해지는 종족이지. 하지만 그만큼 그 과정이 길 수밖에 없어.”
힘에 한계가 없으면서, 수명과 시간으로 인한 한계가 명확한 종족.
아이러니한 일이다.
“차라리 다른 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때?”
“그렇게 해서 그년들의 영향력을 늘려주면 결국 죽는 건 우리야. 이번 일은 우리끼리 해결해야 해.”
담담하게 말한 울드는 손을 펼쳐 빛을 모았다.
“이 남자야.”
“역겹게 생겼네.”
“남자는 중요하지 않아. 그 남자의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신이 필요한 거지.”
“리퍼라…….”
“그 인간의 영지에 있기에 각별히 주의해야 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담담하게 말한 울드가 전신에 검은 기류를 피워올렸다가 지웠다.
“나도 준비를 해왔으니 그 인간은 내 손에 죽을 거야.”
울드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짙게 맴돌았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 * *
알에게 추방되어 근처의 숲에 떨어진 나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제 레이나와 베르단데만 실험해보면 완벽한데.”
“레이나는 둘째치고 심연의 공주에게까지 실험을 하겠다고?”
“먹힐지는 조금 의문이긴 하다만.”
레이나의 경우는 신의 가호가 가해진 존재이고 베르단데는 베르샤와 같은 심연의 공주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심연의 공주들 사이에서도 베르샤는 가장 약하다 싶을 만큼 영향력이 적었다.
하드웨어가 깡패 같던 심연의 공주들인 만큼 과연 이런 저주가 먹힐지는 의문이 든다.
“나중에 실험해보자.”
담담하게 말한 나는 곧바로 밀피유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물러나는 밀피유가 입을 열었다.
“흥미롭지 않아.”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효과가 너무 강렬했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야.”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내게 작은 종이뭉치를 던졌다.
“지도?”
“마계로 통하는 건 이 대륙에 딱 두 곳. 그중 내가 아는 곳은 딱 한곳 뿐이야. 굉장히 위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지만 당신에게 위험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겠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게 축객령을 던졌다.
확실히 베르샤의 감각 증폭 저주를 받고 가장 크게 반응한 게 이 눈앞의 분홍머리칼의 여성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밀피유에게서 받은 종이를 들고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영지의 큰일이 없을 때 일을 쳐야 했다.
“베르닐 시종장.”
“예, 저하.”
“그놈은 어떻게 됐어.”
내 물음에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합니다. 변한 것이 없어요.”
“그래?”
영지의 지하에 가둬놓은 연쇄 살인마. 지구 출신의 사이코패스인 그림과 리퍼다.
흑마법을 통한 공포 환영으로 그에게 극한의 공포를 부여했지만, 그 효과가 생각보다 그리 뛰어나진 않았다.
“이쯤 하면 됐겠지. 조만간 놈을 직접 죽일 거니까 감시 잘해. 혹시나 할 수 있으니까.”
내 말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베르닐 시종장.”
“예, 저하.”
“내가 그런 형벌을 가하는 게 별로 좋지 않은가 봐?”
내 물음에 그는 잠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닙니다. 그저……”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 일로 인해 저하께서 마음속에 응어리를 지실까 봐, 이 늙은이는 그것이 염려될 뿐이지요.”
그 말에 나는 픽 웃음을 던졌다.
“누군가의 생명을 거두는 거로 쌓이는 업보는 이미 지독하게 쌓였어. 이제 와서 하나 더 없앤다고 뭐가 달라질까.”
평행선이라곤 하지만 수십만의 마족을 죽여버린 내게 업을 논한다니.
우스운 일이다.
베르닐 시종장과의 일을 끝내고 나는 밀피유가 건네준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 그려진 것은 뱀파이어 특유의 마법 처리가 된 대륙지도였다.
거대한 땅덩어리인 티오니스 대륙.
그리고 티오니스 대륙의 옆에 있는 거대한 또 하나의 대륙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자연의 땅, 알라시스.
거기까진 분명히 알려진 땅이 분명했다.
하지만 밀피유의 지도엔 땅덩이가 하나 더 존재했다.
마치 먼 곳에 있는 땅을 지도에 가져다 붙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긴가? 갈 수 있는 방향이……”
짧게 중얼거린 내가 눈을 반짝였다.
“해룡의 아귀 옆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을 뚫고 지나가라……”
타르타로스 지하산맥.
꽤 유명한 곳이다.
대륙의 남서쪽 끝단에 있는 거대 자연 산맥으로 다른 이름은 지옥이라 부르는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갈 수가 없다.
산맥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마그마의 강부터 독기의 터널 등등.
이곳을 탐사했다가 사지 멀쩡히 돌아온 인물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내게 의미가 있을 리는 없다.
당장 륀느만 하더라도 제힘을 발현하기 시작하면 마그마에 들어가 샤워를 해도 멀쩡히 기어 나올 녀석이니까.
하지만 길을 모르면 의미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의 마물들을 상대로 길을 찾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날아서 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극지에 관한 일은 극지 전문가에게 물어봐야겠지.”
나는 곧장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동시킬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공간 전이 마법을 사용했다.
스팡!!!
다시금 리인포스 알파의 근거지로 향하는 나였다.
* * *
“누구……”
“데이비?!”
커다란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던 두 소녀와 한 소년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데이비라고?!”
깜짝 놀란 소년의 외침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있던 소녀는 손에 쥔 물뿌리개를 내팽개친 후 내게 달려와 안겨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데이비!”
“얼굴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소리 마세요! 이곳이 얼마나 따분한지 당신은 모를 거랍니다! 하아…… 오늘은 정말 날이군요. 일리나도 알리사양도 데이비 당신도 오다니, 이건 필시 초대 성녀이신 다프네님의 은총이 분명해요!”
다프네를 찾아대는 소녀, 루시아 쉘만의 외침에 절로 떨떠름한 표정이 지어졌다.
확실히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엔 그녀가 있었다.
다프네 하면 죽고 못 사는 다프네 광신도가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프네의 은총이라 여기는 그녀에겐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매번 일어난다.
“무슨 말이야. 일리나가 여기 있다고?”
“정말 데이비 맞아?”
“오랜만이다 헤그.”
내 말에 거구의 소년 헤그가 허허 웃어 보였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폭삭 늙어버린 거야.”
“환골탈태.”
“미친!”
내 말에 기겁하는 헤그였다.
“뭐, 뭐야 너, 환골탈태를 했다고? 그, 그럼 그랜드 소드마스터……”
“이제서야 한 거뿐이야.”
이미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 268기 견습생 출신이었던 이들은 모두 내가 얼마나 무식한 힘을 내보였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나? 라는 의문은 아무도 품지 않았다.
문제는 소드마스터급 힘을 내뿜은 내가 환골탈태를 했다고 하니, 또 상위의 경지에 오른 건가 싶어 기겁하는 꼴이었다.
“이럴 게 아니야! 자 들어가자! 전부 너를 보면 기뻐할 거야!”
헤그에 이어 루시아 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들 반가워 할거에요!”
* * *
268기 견습생은 어떤 의미로는 꽤 유명한 축에 속한다.
실제로 정식 기사단원 시험에서 대부분 통과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니까.
그 덕분에 기사단 내에선 정식 기사단이 된 268기 기사단원들을 요직에 배치했고, 사실 이렇게 다 모이는 경우는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지 않으면 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데이비!!”
“와아!”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달려와 안겨드는 두 쌍둥이 자매.
뒤이어 나를 보고 곱게 웃어 보이는 린시나 팔라딘 출신인 필디르도 보인다.
한쪽 편에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일리나도 있었다.
“데이비? 네가 왜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그런 넌 왜 여기 있나.”
내 질문에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아하니 또 살리반 그 양반하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했냐?”
“……조용히 해.”
고개를 휙 돌린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로 아끼면서도 겉으로 그걸 절대 티를 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서로를 아낀다는 것을 끝까지 숨긴다.
일리나의 경우엔 불만과 가족에 대한 혈육의 정이지만 살리반은 동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 사태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케인 때문에……”
“그럴 거 같더라.”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돌아와서 자그마한 소년을 아들로 들이겠다고 하면 어떤 오라비가 뒷목을 잡지 않을까.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케인을 데려올 순 없기에 그를 제국에 두고 온 듯싶었다.
“데이비 그동안 후방에서 물자 지원을 자주 해준다고 들었어요. 그 덕분에 저희가 요즘 얼마나 편하게 지내는지 모를 거예요.”
“맞아. 맞아.”
일단 로밍나이트의 주목적은 세상에 섞여 살아가면서 기사단에 물자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 스케일이 제법 커 내가 작정하고 밀어준 덕분에 기사단의 살림살이가 상당히 좋아졌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맛없는 보리빵 대신 고기 식단이 나올 때가 많아졌죠. 이것도 다 초대 성녀님이신 다프네님의 은총…….”
“고기 좋아하는 건 닮았네.”
“네?”
“별거 아니야.”
루시아 쉘만은 행복한지 양손을 모아 기도하듯 중얼거렸고, 나는 그 모습에서 괜히 누군가의 편린을 보았다.
[고기? 이 x새가 혼자 처먹어? 야! 가져와! 그거 가져오라고! 같이 먹어야 할 거 아냐!]
생명을 사랑하는 엘프와 비슷한 신관이었던 주제에.
살생을 가급적 자제하는 신관 주제에 고기만 보면 술을 찾고 사족을 못 쓰던 그녀와 닮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데이비.’
그때 페르세르크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뭔데.’
‘…… 아니야. 본녀의 기분 탓이겠지.’
싱겁기는.
복잡한 얼굴로 루시아 쉘만을 바라보는 페르세르크를 뒤로한 채 나는 녀석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를 못 들었네. 일리나에게 듣기로 넌 바쁘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헤그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남부 지역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으로 향할 거야. 그곳에 관한 정보를 얻으러 왔어.”
내 말에 그곳에 있던 견습생, 아니 정식 기사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어딜…… 간다고?”
뭔가 표정이 심상찮다.
“타르타로스 지하산맥.”
“데이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다 알고 온 거야?”
일리나의 질문에 내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얼마 전에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의 근처를 지키던 라스트 위스프 기사단인 로스릭에서 연락이 두절됐어.”
필디르의 설명에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두절됐다고?”
“응. 그곳에 있는 마물이나 마수, 혹은 지금 대륙에서 떠들썩한 뱀파이어나 마족이 아니야.”
담담하게 말한 필디르가 설명했다.
“인간의 짓이었어.”
“인간이라고?”
“그래. 선발대가 보내온 정기보고엔 그랬어. 인간의 흔적이 분명했다고. 하지만 단순한 마법이나 연금술과는 조금 달랐다고 해.”
“그래서 우리 쪽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대를……”
그러니까 때마침 이 녀석들이 그 조사대원으로 발탁되어 대륙을 횡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 * *
촤악!!!
털썩!!
피가 튀는 소리와 함께 시뻘겋게 물든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단단한 갑주를 입고 있던 기사들은 자신이 어째서 죽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듯한 얼굴이었다.
손에 묻은 핏방울을 뚝뚝 흘리며 지하로 천천히 들어간 것은 다름 아닌 검은 머리칼의 작은 소녀였다.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그녀는 감옥에 처진 수많은 마법 결계들을 보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웅……
동시에 수많은 문자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언니. 이 인간, 마법 장벽이 너무 두꺼워. 해킹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어.”
소녀의 중얼거림에 맞은편에서 홀로그램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아마 금방 들킬 거야. 녀석을 찾았으니 녀석이 영지로 돌아가는 걸 내가 반드시 막아볼게. 넌 계속 일을 진행해. 잊지 마. 쓸데없는 것을 건드렸다가 잘못하면 죽어. 오로지 그 인간만 빼내 와.”
“알았어. 언니.”
그렇게 말한 뒤 연락을 끊은 흑발의 작은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야……. 어떻게 인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벽을 설치해둔 거야?”
기가 막힐 지경이라는 듯 작은 소녀 스쿨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자칫 둘 다 죽을 수 있다.
그만큼 지금 심연의 공주 중 정보를 접한 이들에게 데이비라는 존재는 괴물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전투능력이 베르샤급으로 약한 스쿨드는 전위에 나설 형편이 못되었다.
“제발…… 제발.”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빠르게 마법들을 해킹했고 이내 화색을 띠었다.
“그래! 됐어, 그래 봐야 인간이지 내 손에 해킹되지 못할 힘 따윈…… 꺅!”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스쿨드는 문득 거대한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칼날처럼 그녀의 손을 베어버리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망할 마법진이!”
격분해보지만 여기서 힘을 써서 난동을 부릴 순 없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도 물론이요, 그가 돌아오는 순간 그녀는 죽은 목숨일 테니까.
가까스로 분노를 잠재우고 숨을 고른 그녀는 손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뭔가가 몸 안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상관없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지하 감옥의 가장 안쪽에 갇혀있는 한 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악령이 씐 이방인.
이름이 리퍼였던가, 그림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당히 미친놈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말없이 그에게 다가간 그녀가 굳은 얼굴로 작은 발을 들어 그를 툭툭 걷어찼다.
식은땀이 흐른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 영지를 이탈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어쩌다가 수많은 사념체가 합쳐진 자신들이 한 인간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스쿨드는 목숨을 소중히 여겼고, 심연의 공주들 사이에서도 극히 슬리지아를 무서워하던 막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