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7화
저벅…… 저벅…….
화려한 황궁의 복도.
그곳에서 말없이 공을 가지고 놀고 있던 작은 소년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눈을 가볍게 감았다.
동시에 푸르스름하던 눈동자가 보통 사람처럼 변했다.
[알겠지, 케인?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신의 종자, 혹은 발키리아라는 종족이라는 것은 숨기도록 해. 나는 널 믿기로 했지만, 세상의 눈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째서죠, 어머니? 저는 자랑스러운 신 넬타리드님의……]
[미안하지만 넬타리드라는 신은 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아. 유일신을 강조하는 세상은 아니라지만 결코 좋은 결과만 나오진 않을 거야.]
케인이 어머니라 부르는 금발의 소녀, 일리나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사실 케인의 입장에서도 넬타리드님의 종자라 스스로 말하지만 정작 그 본인은 넬타리드님과 대면한 바 없었다.
거울을 통해 보는 그의 친구만이 그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
“공놀이를 하고 있었느냐.”
담담한 목소리에 케인은 조용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얼굴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은 지 알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자면 약간 냉정한 느낌이었다.
“케인이에요.”
절대, 절대 데이비에게 하듯이 사람들을 대하면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당부하던 일리나의 말을 기억했다.
케인은 자신의 어머니인 일리나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렇기에 일리나의 말은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그래. 이름은 들었다.”
담담하게 말한 그가 케인의 발치에 있는 공을 슬쩍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니.”
“있으신 거 같은데요.”
물론, 말투와 적의는 다르다. 케인은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이 황태자라 불리는 인간, 살리반 데 팔란은 나쁜 녀석이다.
‘그래, 나쁜 녀석이야. 엄마를 매번 혼내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자신이 모시는 신의 힘을 끌어내고 싶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이제 가족이 될 사이니까, 서로를 증오하면 안 된다는 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너무 마음이 고우셔! 그러니 내가 지켜드려야 해!’
냉정한 얼굴 때문에 정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소중한 어머니를 매번 혼내는 인간.
무엇보다 그는……
“다들 물러가라.”
이윽고 조용히 있던 살리반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를 따르던 시종과 시녀, 그리고 케인의 곁을 지키던 시녀도 물러갔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케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쯧.”
살리반 데 팔란.
그는 정이 가지 않는 남자다.
“솔직히 말해. 요 녀석아. 일리나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
“흥, 제가 볼 때 살리반 황태자님은 밴댕이 소갈딱지 같다고 했는데요.”
“큭. 빌어먹을 놈!”
부들부들 떠는 살리반의 모습에 케인은 좀 전까지 조심하던 태도를 지워버렸다.
살리반이 자신을 쥐어박았다고 그대로 고자질 한 덕분에 일리나는 아이에게 왜 그러냐며 살리반에게 한소리를 해버렸다.
좀 전까지 생각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 케인의 입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 남자.
처음부터 자신의 내면을 눈치챘다.
놀라울 정도로 눈썰미와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살심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 이런데에 쓰이리라.
“빌어먹을 꼬맹이, 네 성질머리를 일리나가 알았어야 했어.”
“흥! 그래 봐야 제 성격을 아는 건 황태자님과 그 망할 인간뿐이거든요? 어머니께 저는 언제까지고 말 잘 듣는 아들일 뿐입니다.”
“그 망할 인간? 데이비 올 라운?”
“알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겁도 없는 새끼.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한 그가 쪼그려 앉아 케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잡아 고정하며 말했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른 놈을 황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남들이 모두 출신이 불분명하다며 일리나를 지탄했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케인의 존재를 마냥 배척하진 않았다.
케인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리나가 이렇게 멋대로 굴면 굴수록 황궁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말하던 수석 시녀의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인간은 어머니의 입지를 좁히기 위해 나를 받아들인 걸 거야!’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흥! 어머니를 힘들게 하시는 분에게 들을 말 따윈 없어요.”
“아오! 이 망할 꼬맹이가!”
“때리시게요? 때려보시던가요!”
“젠장!!”
짜증을 부리며 벌떡 일어난 그가 쏘아본다.
“이봐,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렇게 구는 거냐?”
“흥 알고 있죠. 어머니를 괴롭히는 나쁜 오라비!”
“건방진 자식!”
“나쁜 인간!”
서로 당장에라도 싸울 듯 노려보는 유치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던 중 먼저 돌아선 것은 살리반이었다.
“흥! 당장 돌아가서 예법 공부나 더하고 와라!”
“베에! 저는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건 금방금방 익히거든요?”
“내가 직접 네 녀석의 예법을 시험해줄 테니. 명심해. 네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이들이 많으니까. 명심해. 네 행동이 일리나…… 아니, 황족의 행실에 누가 된다면 일리나가 말려도 나는 네 녀석을 내칠 것이다.”
그리 말하고는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케인은 혓바닥을 쏘옥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곧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케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저렇게 껄렁한 모습을 보이는 거, 다른 이들은 모르는 모양이야.]
“흥, 알게 뭐야.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인간 따위. 저런 인간이 오라비라니.”
[큭큭…… 재밌네, 웃기지 않아? 이곳의 다른 인간들은 오히려 널 환영해, 네가 난동을 부려주면 더 좋아하지. 하지만 그는 네가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면박을 주고 가잖아?]
“그래서 싫다는 거야! 난 어머니를 괴롭히는 인간의 말 따윈 듣기 싫어!”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케인의 모습에 목소리의 주인이 키득거렸다.
[그런 점에서 겉과 속이 다른 건 저 인간도 한 실력하는 걸?]
“흥! 알 게 뭐람!”
[그가 왜 이러는지 알 거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목소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케인이 입을 삐쭉였다.
“아, 됐어, 어머니랑 같이 소풍이나고 가고 싶어. 조용한 숲에서 어머니와 함께 도시락을 먹는 거야. 어때? 정말 행복할 거야!”
[그 살리반이라는 왕자도 대동하고? 그럼 아주 재밌을 거 같은데,]
“그 인간 싫어! 어머니를 매번 괴롭히고 나도 괴롭힌단 말이야! 예법에 저런 행동은 길거리의 깡패나 하는 거라고 배웠어! 그 망할 데이비라던 그 녀석처럼!”
밥 먹듯이 어머니를 놀리던 그 인간!
자신을 괴롭히던 인간!
데이비와 살리반은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데이비라는 그 인간에겐 굉장히 살가운 태도를 보였었다.
빼액 투정부리는 케인의 말에 목소리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케인, 나의 소중한 친구. 네 발키리아의 생에 내가 간섭할 것은 없지만, 태생의 사명은 이뤄야지. 이대로 가다간 그 역겨운 검은 세계가 세상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전에.]
“흥. 어련히 찾을 거야.”
짧게 중얼거린 케인과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새겨진 넬타리드 신의 계시.
[절대 보옥을 찾는 것.]
“절대 보옥을 찾는 것.”
소중한 어머니와는 별개로 신의 종자로 태어난 케인에겐 사명이 있었다.
“그 전에 쿠키 조금만 더 먹고. 조금만 더 놀고 찾자! 아직 잠도 못 잤고 재밌는 소설도 아직 다 못 읽었어!”
살리반만이 아는 사실이다.
발키리아 케인은 이곳에 온 지 몇 주 만에 상당히 게을러진 방구석 발키리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 * *
실제로 부딪혀본 효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심연의 공주, 그것도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급의 상대와 충돌해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회복량을 가늠하긴 어렵다.
환골탈태할 때 마나 신성수와 정령의 힘이 깃든 시험의 숲 기운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결과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 예상보다 힘의 회복량이 크다!
문제는 그 한계치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지금 내 마나량은 활골탈태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힘을 받아들이며 기존의 힘보다 많아졌다.
그그극!!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고 증발하다 못해 비명을 지른다.
기본온도만 수만 도를 넘어서는 공격에 추가로 화염 폭풍이 몰아친다.
닥치는 대로 불태우는 화염, 라그나로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인 헬파이어의 강화판이라 봐도 무방했다.
헬파이어가 대상을 불태운다면 라그나로크는 강화된 헬파이어가 공간 전체를 전소시킨다.
마법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마법은 9서클 헬파이어 마법이지만, 고작 그 정도의 마법으로 울드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픽!!
그리고, 지금 이 마법조차도.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마법을 보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꺼지지 않는 화염은 빈말이 아니다. 작정하고 불태웠는데…….
두 여인은 이 마법을 결국 캔슬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아…… 하아……”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거리는 안경을 쓴 작은 소녀가 보인다.
아마 그녀의 힘이리라.
심연의 공주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고유 힘을 지니고 있다. 베르샤는 저주, 슬리지아는 차원 간섭, 울드는 잠식, 베르단데는…….
물어보지 않았구나.
어찌 되었건 느낌으로 볼 때 저 안경을 쓴 작은 심연의 공주는 아무래도 륀느와 비슷한 느낌이다.
분석. 해킹.
마법이 중간에 다른 힘으로 강제로 해제되었으니 말이다.
“안돼!”
이윽고 스쿨드는 급히 몸을 웅크린 채 침묵하고 있는 여성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간 그녀는 울드의 앞을 막아선 채 나를 노려보았다.
“인간!! 네놈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잊지 말고 여기서 끝장을 보자고 그러니까.”
내가 한 발 더 내딛자 스쿨드가 몸을 짧게 떨었다.
힘과는 별개로 심연의 공주 사이에선 상당히 약한 축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울드가 손을 뻗어 스쿨드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동생……”
“……”
“죽어도 손 못 댈 거다.”
“역겨운 심연이 언제부터 혈육의 정을 찾았다고.”
대놓고 그녀를 비꼰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투쾅!!!!!
동시에 울드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쏟아져 나오며 신의 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한 저항력이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주변을 잠식시켜나갔고 이내 그 영역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었을 때 핏빛을 번뜩이는 외팔을 움직였다.
전신이 검게 물든 울드의 상태는 확실히 공격이 먹혔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내 몸이 회복될수록 마법의 위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
이전엔 먹히지 않았을 마법도 지금은 그녀의 방어력을 뚫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섬뜩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울드는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나를 막아설 모양이었다.
그 악마 종인지 뭔지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럼 더 내어줄 수가 없는데.
이미 그림은 라그나로크의 영향에 노출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나온 저 불길한 검은 빛을 내뿜는 광석은 남아있었다.
저것이 악마 종인지 뭔지 하는 것과 관련이 있구나.
푸확!!!!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내 어깨 일부가 찢겨 나갔다.
좋아, 그냥은 안 죽어주겠다 이거지.
어디 끝장을 보자.
전신에 기류가 폭발적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이제야 내가 그냥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울드는 스쿨드를 보호하듯 막아서며 검은 기운을 끝도 없이 토해냈다.
‘다른 심연의 공주들은 이 정도 부상을 입으면 육신이 붕괴하던데.’
이상하게 울드나 스쿨드에게선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이곳이 그 역겨운 신의 영역이라는 건 분명해 보이네.”
“……”
“그렇다고 내가 그냥 죽어줄 거라 생각하지 마, 역겨운 인간아.”
울드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류가 이내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몸이 멈칫했다. 너무 익숙한 기류였기 때문이었다.
저걸 왜 저년이 사용해?
극도로 미약해 못 알아볼 뻔 했지만, 그 근원은 분명했다.
그녀가 내뿜은 기류에 놀란 내가 멍한 얼굴을 하던 찰나.
저 멀리서 들려와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퉁…… 퉁…….
“데이비니임~ 쿠키 구워왔는데 같이 드실레요오?”
순진무구하고, 끝없이 천진난만한 목소리.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끝없이 순진무구하고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격리해둔 공간의 벽을 통통 두드리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놀라운데 그녀는 눈앞에 이 사태가 보이지 않는가 싶었다.
아니, 애초에 머리에 나사 하나 빠진 인물이긴 했었다만.
갑작스런 그녀의 출현 그리고, 그 황당한 사태에 힘입어 몇몇 성기사들이 미친 듯이 뛰어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둘러멘다.
“어, 어어?”
“성녀 후보님! 죄송합니다! 옥체에 손을 댄 죄 달게 받겠으니 일단은 피신을!!”
성기사들이 강제로 그녀를 데리고 거리를 벌렸다.
그 황당한 사태에 할 말을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섬뜩한 힘을 내뿜던 울드도 잠시 멈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산발이 된 그녀의 눈에 순간 이채가 띤다.
동시에 그녀와 내 기류가 충돌하려던 그 순간.
내 전신에 고위의 신성력과 위대한 의지의 편린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의지를 보내온 이는 리나 성녀 후보였지만.
정확히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마치, 이 사태를 지켜보던 이가 리나 성녀 후보를 매개체로 나선 것처럼 말이다.
“……”
투웅!!!
동시에 내 틈을 발견한 스쿨드가 빠르게 힘을 발현했고 울드를 낚아채며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둘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일었다.
멍하니 그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겁에 질린 얼굴로 굳어있는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피신시켰던 리나 성녀 후보를 바라보았다.
“뭔 생각으로 접근한 겁이니까.”
“에헤헤, 데이비니임! 오랜만이에요오!”
말끝을 주욱 늘어뜨리는 느긋한 말투. 솔직히 미워하기가 어려운 인물이다.
“목숨이 열 개라도 됩니까? 잘못했다가 휘말리면 어쩌려고요.”
“그게요오……. 중간에 데이비님을 확인하고 쿠키를 드실 거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으셔서어…….”
“그래서 물으러 왔다?”
이 화상이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진 내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미쳤습니까 휴먼? 돌았어요?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들어와.”
정확히는 이곳에 심연의 공주를 끌고 온 내가 원흉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모든 탓을 남에게 떠넘긴다!
“아야야! 아파요오오!”
눈물을 글썽거리는 리나 성녀 후보의 뺨을 한참 동안 잡아당기는 동안에도 성기사들은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끼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순간 보였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한참 동안의 체벌 끝에 제 볼을 부여잡은 그녀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치만 그때부터 기억이 없는 걸요오…….”
그녀가 나를 인지했을 때 이미 신의 힘이 그녀에게 잠시 깃들었었다는 뜻이다.
그녀에게 화를 내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리자 나는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헤. 데이비니임, 쿠키가 맛있게 구워졌는데 같이 드실래요오?”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흔들며 리나 성녀 후보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평소라면 하나 달라고 했을 것이다.
성역을 난장판으로 만들건 뭐건 애초에 그걸 신경 쓸 만큼 내가 정의로운 놈도 아니니까.
적을 쳐 죽이기 위해 선 제국의 황성이라도 이용해 먹을 자신이 있는 게 현재의 나였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배시시 웃는 리나 성녀 후보와 신을 부르짖으며 기도문을 읊는 성기사들을 흘끗 본 뒤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남은 마나를 움직여 공간을 뛰어넘었다.
스쿨드가 결국 탈취해간 그림이나 리퍼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 종이건 나발이건 그건 됐고. 이제 내 관심사는 망할 심연의 세 자매다.
스팡!!!!
세 차례의 공간 전이를 통해 숲 속으로 들어온 나는 조용한 숲 속, 나무 옹이에 앉아 풀잎으로 연주를 하는 흑발의 작은 소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음? 언제 온……”
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그녀의 멱살을 틀어잡아 들어 올렸다.
무형의 살기가 터져나간다.
“무슨 짓이지? 이제 와서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건가?”
“말해.”
내 표정에 감정이 사라졌다.
“울드와 자매라고 했나? 너희, 대체 헤라클래스와 무슨 관계야.”
리나 성녀 후보를 통해 내게 전해졌던 의지.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이 그녀를 통해 나와 접선했다.
아마 본인의 그 4차원 같은 나사 빠진 성격과 나와 접선하라는 신의 의지가 뒤섞여서 나온 행동결과이리라.
보통 신의 계시는 두루뭉술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다프네를 통해 신의 계시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운 바 있었다.
그것을 해석하자면…….
[신부(新婦)에게 명하노니. 좋은 말할 때 진화자의 흔적에 자비를 내려라.]
확실한 건 세 가지.
울드가 아주 미약하게 발현했던 힘은 그녀가 주로 사용하던 잠식의 힘이 아닌 내가 사용하는 힘과 매우 흡사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금기의 업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리나 성녀 후보를 통해 내게 전해져온 계시와 비슷한 목소리.
마지막으로.
베르단데는 애초에 내가 금기의 업을 사용했을 때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처음엔 그저 심연과 헤라클래스가 싸운 흔적을 발견했었으니 그것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진화자의 흔적이라고?
대뜸 쓴소리부터 나간다.
“니 아부지, 뭐 하는 분이고!”
아예 생존왕이라고 대답해보시지?
애초에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답은 알고 있지 않았나.
그저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이지.
진화자는 모든 세상 유일하게 단 한 명을 일컫는 명칭이다. 내 발언에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진화자의 흔적, 다른 말로 하면 헤라클래스의 혈육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