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6화
멜버크가 제압당하고 뒤처리를 위해 지원을 요청한 보리스는 현재 적들과 대치 중이었다.
이곳을 습격한 사제.
아니, 사제의 탈을 쓴 흑마법사 놈들은 집요했다.
“한 놈도 남겨두지 마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다!”
소드마스터인 보리스에게 이곳의 이들은 사실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리스를 포함한 라스트위스프의 기사단원을 가둬놓은 결계로 인해 외부를 향한 공격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외부에서 공격이 가감 없이 들어오니 죽을상을 쓸 수밖에.
흑마법이란 것은 참 번거롭기 그지없다.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보리스와는 별개로 나머지 기사단원들은 죄다 지친 모습이었다.
익스퍼터급이 많고, 마스터급은 멜베크와 보리스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멜베크가 배신자였다는 것.
이 사실이 알려지면 기사단 내부에서 난리가 날 테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썩고 고인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리스였다.
문제는 흑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데이비 기사단원이 가서 다행이군. 적어도 놈들의 목적을 막을 순 있을 테니…….’
이곳에서 자신이 힘을 다해 죽는다 해도 그가 있으면 괜찮다. 그를 헤칠 존재는 거의 없을 테니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기사단에 모조리 전해지리라.
그렇다면 이곳에 남은 그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해답은 간단했다. 이놈들이 데이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여기서 발을 묶는 것.
데이비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어린 소년일 뿐이다. 환골탈태하면서 듬직해졌다 해도 그건 외관일 뿐 내용물은 다르다는 소리였다.
그런 소년이 제 일을 할 수 있도록, 어른인 자신이 뒤에서 밀어줘야 한다.
“와라, 이놈들!! 여기서 내가 죽더라도 네놈들 한놈 한놈 길동무로 삼겠다!”
그의 벼락같은 외침과 투기에 흑마법사들이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이곳 자체에 이미 함정이 설치되어있는 만큼 보리스도 별다른 수는 없었다.
이미 그의 몸엔 흑마법이 가미된 화살 두어 발이 꽂힌 후였다. 루시아 쉘만 같은 사제가 없다면 회복도 힘든 상황.
계속해서 체력이 빠져나가는 현 상황에서도 그는 괴물 같은 투기를 잃지 않고 저항했다.
“저주가 서린 화살을 맞고도 버티다니……. 괴물 같은 놈…….”
질린 듯 중얼거리는 흑마법사들이었다.
“저놈은 반드시 사지 멀쩡하게 생포하라. 놈을 잡아 데스나이트로 만들겠다.”
이윽고 보리스가 제법 쓸만하다 판단했는지 흑마법사 중 하나가 명령을 내렸다.
“이놈들!!! 감히 내가 네놈들 뜻대로 되어줄 성싶으냐!!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을 살려두진 않으리라!!”
격노한 외침 끝에 보리스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려 했다.
실패해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 결과밖에 없다면 도박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거검에 오러블레이드를 피워올리며 눈을 가리는 핏자국을 거칠게 닦아낸 그는 이가 깨질 듯 강하게 물고 함정으로 펼쳐진 결계를 부수기 위해 온 힘을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피잉…….
어디서 무언가가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투쾅!!!!!
어마어마한 보랏빛 광입자 탄이 날아와 흑마법사 중 하나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결계를 향해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 덤비려던 보리스는 그 황당한 상황에 그대로 멈춰 섰다.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뭐, 뭐냐! 대체 뭐란 말이냐!!”
격한 외침 속에도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오, 온다!! 실드를 펼쳐라!!”
마법사 서넛이 빠르게 모여들어 양손을 펼쳐 마법 장벽을 만들어낸다.
쩌엉!!!!
하지만 이 미치광이 같은 연보랏빛의 광탄은 지면을 모조리 갈아버리면서 날아와 흑마법사들의 장벽을 부수고 그들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말도…… 안 돼.”
경악한 그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어디서 날아오는 건지 모를 광탄 두 발에 도대체 몇 명이 당했단 말인가.
가장 위험한 건 공격이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철컹!!!
이윽고 숲 저편 멀리서 거대한 금속음이 울려 퍼지자 흑마법사들이 기겁하며 사령 마나를 끌어올렸다.
“저기다!!”:
“공격!!!!”
뒤이어 엄청난 사령 마법 폭격이 이어졌고, 숲 저편이 검은 불길에 모조리 전소했다.
끔찍한 참상 속에 공격을 퍼부은 이가 죽었을 거라 생각한 흑마법사들이다.
“해치웠나?!”
피잉…….
콰드드득!!!!
하지만 날아온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숲보다 한참 멀리서 날아드는 연보랏빛 광탄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최소 수 킬로미터 뒤에서 저격한다고?!”
콰드득!!!
소수로 남은 흑마법사들은 광탄이 날아든 거리를 체감하고는 경악했다.
그리고는 그 경악의 끝에 그들이 본 것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무자비한 광탄이었다.
“데, 데이비의 골렘…….”
그제야 그 광탄이 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은 보리스가 온몸에 오한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이런 강력한 공격을 저격한다면 그걸 버틸 수 있는 인간이 대체 몇이나 될까.
데이비를 통해 이미 한 차례 저것을 본 바 있지만, 지금 날아드는 광탄은 그 저격용 골렘의 힘이라고 보기엔 너무 압도적으로 강했다.
[실시간으로 강해질 겁니다. 데이터가 쌓이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중이거든요.]
장난스레 말하던 데이비의 말이 떠올라 보리스는 허탈하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선생님!!!!”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뒤편에서 몇몇 인물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성기사 필디르를 기준으로 정령사 쌍둥이 자매와 사제인 루시아 쉘만이었다.
사제인 루시아는 보리스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급히 달려와 품 안에서 작은 병들을 마구잡이로 꺼내 들었다.
“저주!! 잠시만요! 잠시만요!”
급하게 소리친 그녀는 곧이어 새빨간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들었다.
“데이비님이 가져가라고 했어요! 저주라면 반드시 먹이라고! 아아…… 이것도 초대 성녀님의 은총이소서.”
“저주가 걸렸을지 모르니 가져가라 했다고? 하…… 도움을 받은 건 데이비 단원이 아닌 나였군…….”
이 사태를 완전히 예측한 데이비의 선견지명에 보리스는 안도감과 섬뜩함을 동시에 느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그 어린 소년이 그토록 전문적이고 완벽한 대응을 하는 건지 말이다.
실제로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 사건 때에도 그의 행동은 마치 예정된 것처럼 이어지기도 했었다.
“세상에…… 빨리 가보라고 하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
그리고 그런 황당함은 보리스뿐만이 아니라 루시아나 렌다 쌍둥이 자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가장 경악한 건 타 기사단에서 파견되어온 이들이었다.
“보리스님…… 대체 무슨 일이…….”
“광탄…….”
“네?”
“데이비 단원 기억하는가. 멜버크를 잡았던 그 단원, 저 광탄은 데이비 단원이 만든 골렘이 쏜 것일세.”
인간도 아니고 고작 골렘이?
경악한 타 기사단 단원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 서렸다.
* * *
“악! 악!! 그만하세요!!”
“이게, 뼈밖에 없는 게 까불어?!”
“아, 아니에요! 저는 소중한 머리카락도 있습…… 커헉!! 끄악!”
“그래, 그 별로 남지 않은 모근의 요정들이 전부 친정으로 돌아가게 해주마.”
“으아아악! 제발!”
빠악!!
“끄아아악!! 아이고 나 죽네!!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는 이렇게 죽습니다!!”
별의별 엄살을 다 피우는 리치의 기괴한 행각에 황당함을 느낀 건 일리나 뿐만이 아니었다.
“데이비…… 설마 이 녀석이……”
“범인이야.”
우리를 그 기괴한 공동에 가둬버린 그놈 말이다, 애초에 의미가 없긴 했지만.
척 보기엔 끈적끈적한 느낌을 풍기던 그 흑마법사 놈들과는 다르게 순수한 사령 마나를 다룬다.
하지만 경계를 게을리할 순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흐느끼는 리치의 모습에 일리나는 괜스레 측은함까지 느끼는 듯 보였다.
“저기, 괜찮아요?”
적이긴 한데 이런 인간군상일 줄 몰랐는지 일리나가 조심스레 물어보지만, 리치는 엉엉 울며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꺄악! 떨어져!”
기겁한 그녀가 버둥거리자 리치의 안광이 번뜩인다.
“하하하하하!! 하찮은 필멸자들이여! 속았구나!”
그렇게 외친 그가 벌떡 일어나 일리나를 낚아채고 한 손에 검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거기 극악무도한 네놈! 감히 욕심에 휘말려 이곳까지 왔으나 그 용기가 갸륵하다! 당장 물러간다면 목숨만은……. 크악!?”
빠각!!!
물론, 그냥 인질로 잡힐 바에야 혀 깨물고 뒈져버리겠다는 마인드를 지닌 일리나에겐 역효과를 줄 뿐이다.
순식간에 발을 들어 놈의 발등을 찍고 머리를 뒤로 젖혀 놈과 박치기를 해버린 일리나가 그대로 쓰러진 그를 짓밟아 올라탔다.
그리고는 주먹을 들어 내리찍으려던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막아섰다.
“이거 놔! 데이비!”
화가 난 그녀의 외침에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났다.
“미안해…….”
대체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리나를 물린 뒤 쓰러진 그를 바라본 내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녀석의 안광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나를 따라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정확히는 환하게 웃은 듯한데 해골밖에 남지 않은 얼굴이라 기괴해 보일 뿐이었다.
“하하하.”
“헤헤헤……”
“웃겨?”
동시에 내가 표정을 지우며 중얼거리자 녀석의 안광이 부릅떠졌다.
[유르그 식(式) 군중제어기]
[집중 구타]
묘리는 간단하다.
때린 곳 또 때리기.
콱!! 콰직!! 콰직!!!
“끄아아아악!!! 사, 살려!”
“이게 내가 웃겨? 웃겨 인마? 이게 뼈 밖에 없는 게.”
“커헉!”
놈을 쥐어패다 못해 내가 놈의 머리카락을 낚아채자 녀석의 눈동자에서 불이 튀었다.
“으아악!!! 주신 프리아 여신이시여! 이 악마 같은 사내가 제 소중한 머리를 노리고 있사오니 제가 자비를 베푸시어!”
“십의 섭리를 거부한 리치 X끼가 성자 앞에서 신을 찾아? 웃기고 자빠졌네!”
“캬아아아악!! 제발! 제발 머리만큼은!”
이런 놈은 내가 만나본 놈 중 가장 위험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오늘 그 불경한 가닥가닥들 깡그리 다 뽑아서 눈앞에서 불어주리라.
어째서 리치가 이토록 고통을 호소하는 것인지는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끄아아악!! 끄억!! 으허허어엉!!!”
“흐흐흐흐흐!”
처절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놈의 모습에 나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그러자 녀석이 악 소리를 냈다.
“아이고!! 여신이시여!!!!”
리치란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본래 흑마법에서 리치는 신을 부정하는 금기로 치부되며 힘에 심취한 자가 섭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혼을 꺼내 라이프 베슬에 담는 것이라는 소리였다.
흑마법이 굳이 주신 프리아 여신을 배덕한 것은 아니지만, 금기와 섭리를 어기는 건 뱀파이어나 리치나.
그놈이 그놈일 뿐이다.
그러니 이단심문회에서도 리치나 뱀파이어만 보면 아주 악을 쓰며 불태우려 들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최근의 이단심문회는 기괴하게 뒤틀려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을 부르짖는 리치? 차라리 있지도 않은 마신을 찾아 헤매는 게 더 그럴싸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놈은 그러지 않았고, 끝까지 주신 프리아 여신을 부르짖었다.
“차라리 마신을 찾아 그냥!”
퍽!! 퍽!!
“끄억! 캬악!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신은 프리아 여신이 실지어니! 마족과 인간, 모든 존재는 그분의 손길에 의해 태어난…….”
놈의 외침에 내 손이 멎었다.
놈의 외침에 감명받은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데이비 저거……”
“기적……”
자그마한 기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샤르르릉!!
말끔한 소리와 함께 엎드려서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안광이 번뜩인다.
“아…… 아아!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이 여자가 대체 어디서 외도를 하고 있는 거야.
황당한 신의 기적에 나는 황당한 얼굴로 놈과 놈에게 내려지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발을 들어 그대로 녀석의 등뼈를 짓밟았다.
“너 정체가 뭐냐.”
애초에 상대를 죽일 생각도 없고. 리치인 주제에 신을 부르짖는 상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