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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508화 (507/1,559)

제 508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든 여타 다른 생물들과 할 수 있는 유일한 교감.

그것은 바로,

대화라 할 수 있다.

“여깁니다.”

“저기 말이야. 혼자 이곳에서 지내는 거야?”

일리나와 나를 안내하는 이오를 따라 들어가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곳은 험난하고 살기 힘든 곳이지만 적응만 한다면 못 살 곳도 아닙니다.”

확실히 이오가 나를 데려간 곳은 마그마가 아닌 맑고 시원한 지하수가 흐르는 곳이었다.

녹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발광석과 월광 반딧불이가 밝게 비치는 내부는 여러 약초나 신비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신기한 곳이네.”

“이오!!”

그때 저 멀리 바위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쏘옥 내밀더니 이내 리치 이오를 향해 후다닥 달려오는 게 보였다.

“수인족에 마족?”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토인족 소년과 마족 특유의 혈안을 가진 소녀였다.

후다닥 뛰어온 두 아이는 이오를 향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친구는? 친구 데려왔어?!”

“아아, 예. 데려왔답니다. 의도하지 않게 되었지만요.”

익숙하게 두 아이를 다독인 그는 내 뒤를 따라오는 마그마 카우를 가리켰다.

“자, 어떠십니까?”

“우…… 우와아……”

토인족 소년이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족 소녀가 신기한 듯 마그마 카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은?”

“손님이 왔대! 그래서 어른들이 우리보고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어!”

해맑은 아이의 외침에 이오의 안광이 한 차례 흔들렸다.

“이런, 불청객이로군요. 미안하지만 잠시만 더 기다려주실 순 없나요?”

이오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는 마그마 카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여기 있어, 도망치면 재밌어질 거야. 알아들었지?”

와들와들 떨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그마 카우의 모습에 나는 만족스레 녀석의 뿔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는 이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오가 말한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충 3~40여 명이 모여 살법한 작은 마을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생지옥과도 같은 이 지하산맥 내에 그 정도나 되는 이들이 살 공간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만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여야 할 마을은 여기저기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마족이나 수인족, 그리고 오크나 드워프들이 마을의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들을 에워싸듯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들이 압박하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그 모습을 본 이오는 망설임 없이 그들의 앞으로 튀어나가 그들을 막아섰다.

안광을 번뜩이며 위협받고 있는 주민의 앞을 막아선 이오는 창을 들이미는 해골들을 향해 소리쳤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겠다면서요!”

그의 외침에 반응한 것은 해골들이 아니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해골 사이에서 걸어 나온 한 몽마의 존재였다.

놀라울 정도로 헐벗고 있지만 전혀 수치심 따윈 느끼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의 소녀는 제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튕기며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상황이 바뀌었다니……. 무슨 말을…….”

고압적인 몽마, 서큐버스의 행동에 이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약속대로라면 6개월에 한 번, 제가 만든 영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곳의 주민들에 관한 이야기를 함구하고 지켜주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쿡…… 쿡쿡…….”

이오의 항변에 몽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키득 웃어넘겼다.

“그래. 처음엔 그랬지.”

“허면!”

“그러니까 상황이 바뀌었다고.”

담담하게 말한 몽마의 표정이 굳었다.

“이쪽도 이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야.”

콰앙!!! 쾅!!

동시에 마을 곳곳에서 검은 폭발이 일어났다.

“아…… 아아……”

“사흘 주겠어. 사흘 안에 50년 이상 축적된 영약을 만들어 직접 상납하지 못하면 이곳을 모조리 불태울 거야.”

“그, 그건 횡포입니다!”

기겁한 이오가 이를 따다닥 부딪치며 소리쳤다.

“어쩌라는 거야? 애초에 영약으로 계약을 제시해온 건 다름 아닌 당신 아니었나?”

“그, 그것은……”

“오늘은 경고일 뿐이니 살생은 저지르지 않겠어. 당신의 힘이라면 우리를 해칠 수도 있겠지만 잊지 말라고. 우리를 봐주시는 분은 당신 같은 하층민 리치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말이야.”

자신들이 할 말을 한 뒤로 몸을 돌려 돌아가 버리는 몽마와 해골 병사들을 뒤로한 채 바닥에 주저앉은 이오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후회가 담겨있었다.

* * *

몽마를 추적하는 건 큰 소득이 없었다. 녀석들은 육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흩어졌고 그들을 이끌던 몽마는 몽마 특유의 힘인 꿈을 통해 그곳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결국, 힘 소모 없이 육로를 통해 마계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리치 이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마족들이 대륙을 침략했던 길은 없느냐고?

애초에 육로가 아닌 공간 전이를 사용한 놈들이라 하레스가 설치해둔 방어 장막을 강제로 뚫고 넘어온 탓에 어떤 이들은 의지를 잃었고 어떤 이들은 힘을 잃었다.

대가를 지불하고 진입하는 방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또한 이오가 알고 있는 이 길을 알지는 못했으리라.

그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손해를 봐가면서 넘어오진 않았을 테니까.

마을 주민들에게 외부인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주변에서 일리나와 나를 보는 싸늘한 시선을 무시한 채 마을을 둘러보던 나는 다친 이들을 손수 치료하는 이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신을 배덕한 주제에 신을 따르고 기도를 올리고, 치료까지 하는 리치라…….”

“하하, 주신 프리아 여신님께서 보살피십니다.”

뼈밖에 남지 않고 음산한 안광을 빛내는 리치가 할 말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안내는 언제 해 줄 건데.”

내 물음에 그가 손놀림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안 도와주실 겁이니까?”

“본인의 일은 스스로 해야지.”

“흐흐흐.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틀린 말도 아니네요.”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였다.

“애초에 그 괴물을 상대로는 당신도 이기기 힘들 테니.”

그는 대륙의 성자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자가 이곳의 존재를 눈치채곤 눈독을 들였을 때 이런 위험한 약속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위험한 약속?”

내 물음에 그는 안광의 빛을 꺼뜨렸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뼈밖에 없는 작은 손을 펼쳐 보였다.

동시에 손뼈 위로 작은 빛이 모여들며 작은 환단이 생겨났다.

“오오.”

“아직 작은 환단입니다. 이래 봬도 리치가 되기 이전엔 환단을 제작했던 기술자였으니까요. 그 이후 직업이 한번 바뀌긴 했지만 말입니다.”

주로 저런 환단을 만드는 기술은 마법사에게 있다. 그가 사용하던 것은 흑마법이나 과거 흑마법사들의 단체가 없었다고 할 순 없다.

“그자는 제가 만드는 영단의 가치를 높게 쳤습니다. 그래서 제게 주기적으로 영약을 바치면 이곳의 존재를 함구하고 눈을 감아주겠다 했습니다.”

힘이 없는 자는 잡아먹힌다. 그것이 마계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리치 이오를 이렇게 압박할 수 있는 마족이며 일대 영역을 지배하는 자라면 그 결과는 뻔했다.

“그는 저희 마을 사람들과 저만이 알고 있는 통로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저희를 압박하고 있지요. 헌데……, 아무래도 그 와중에 문제가 발생한 듯합니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그자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서 압박을 해왔다는 말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일리나의 질문에 이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쉽지만 이곳을 포기해야겠지요. 그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서…….”

“그렇다면 팔란제국으로 와. 당신들을 지켜줄게.”

일리나의 제안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세상과 연을 끊은 자들입니다. 이제 와서 속세로 돌아갈 이유 따윈 없지요.”

“그럼 여기서 죽던지 언제 찾을지 모르는 안전한 길을 찾아 다시 움직이겠다고?”

“저항은 불가능하니까요.”

“저항해볼 생각은 해봤고?”

일리나의 질문에 이오는 침묵했다. 대신 붉은 안광으로 일리나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저항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모릅니다. 그자는 괴물입니다. 괴물이요. 절대 이길 수 없는……”

“벌써 겁에 질려서.”

“더는 이야기 할 게 없군요. 더는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마그마 카우를 조련하는 데 도움을 주셨으니 마계로 가는 길은 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으아아아아 머리는 잡아당기지 마세요! 내 모근! 소중한 내 모근이! 풍성하던 제 머리카락의 마지막 흔적입니다!”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무겁게 말하는 이오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내가 한 가닥을 잡아당기자 비명을 지르며 녀석이 버둥거렸다.

“어, 어찌 신을 모시는 성자께서 이리 잔혹하단 말입니까! 그자도 제 머리카락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신을 모시는 놈이 머리카락이라는 탐욕에 젖어서 욕심을 부려?”

“당신도 멀쩡할 거 같습니까?! 머리카락은 누구든 빠지는……”

“난 안 빠져 걱정 마. 태생부터 대머리인 너랑 달라.”

“이 악랄한 자 같으니! 그리고, 대머리 아닙니다! 제게도 머리카락이 아직……”

“나머지는 다 하늘나라로 갔겠지.”

“카아아아악!”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때 저 멀리 바위 너머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처음 만났던 토인족 소년과 마족 소녀였다.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던 두 아이는 눈치를 살피더니 쪼르르 뛰어와 이오의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쏘옥 내밀었다.

“꺅! 귀여워!”

그 모습에 일리나가 양손으로 뺨을 잡고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자 두 아이가 겁을 먹은 듯 이오의 뒤에 숨어버렸다.

“어이쿠. 나오지 말라……, 으아아아! 머리는 잡아당기지 말아 주세요!”

“에헤헤! 머리카락 없어! 이오 대머리! 대머리!”

“크윽?!”

아이들이 이오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이오가 비명을 지르며 이를 정신없이 딱딱 부딪쳤다.

“이오! 엄마가 이거 가져다주랬어!”

“맞아! 빵 먹으면 쑥쑥 크니까 머리카락도 자랄 거야!”

이윽고 토인족 소녀가 작은 빵 바구니를 건네주자 이오의 비명이 멈췄다.

안광에 비친 감정은 따스함이었다.

“아아…… 이것 참 감사합니다. 맛있는 빵이로군요.”

“으, 으응……”

이오의 말에 고민하던 아이들은 나와 일리나를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어, 엄마가 맛있는 건 나눠 먹으라고 했는데에……”

“그럼요. 같이 나눠 먹어야지요. 여기 앉으세요.”

이오는 능숙하게 두 아이를 안아 들고 근처의 바위에 앉혔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아니 사양하지.”

땅속에서 어떻게 밀가루나 쌀을 재배했는지 조금 의문이지만 그리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오물거리며 빵을 씹어먹는 두 아이는 나와 일리나가 신기한지 연신 시선을 보내왔다.

“언니가 신기하니?”

“예쁜 언니! 언니는 혹시 이오가 말하던 아름다운 여신님이야?”

“어머, 얘는?”

마족 소녀가 헤실거리며 대답하자 일리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모습에 토인족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린 게 벌써부터 예쁜 건 알아본다 이거지.

속세와 연을 끊어도 아이는 아이다웠다.

“당장 영단을 만드는 건 쉽지 않겠지만, 당신들을 안내해주고 돌아와도 시간이 어느 정도 남을 겁니다. 제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납품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지요. 제가 목숨을 바치면 이들을 피신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아공간에서 장난감 하나를 꺼내 토인족 소년에게 흔들어 주었다.

“와아……”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

“……아 ……네!”

내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작은 장난감을 손에 꼭 쥐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눈이 반짝반짝한다.

그리고는 이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보기에 넌 우리가 그놈들의 눈에 띄기 전에 보내려는 것 같은데. 틀려?”

“바로 보셨군요. 그들은 너무 위험합니다. 당신이 강한 힘을 지닌 성자라는 건 알겠지만, 성자라도 감당이 될까요.”

딱딱딱 소리를 내며 이를 부딪친 이오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물론 간악한 한량 같은 성질머리는 성자라고 보기도 어렵지만요.”

“난 널 영입하고 싶은데.”

“영입이요?”

“네 영약을 만드는 기술, 그거 제법 쓸만하거든.”

내 말에 이오는 뼈만 남은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거절합니다. 저는 속세와 연을 끊었으니까요.”

이쯤 되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마계는 이미 한차례 내가 쫓아 보낸 경험이 있다. 이런 짓을 할만한 놈이라곤 떠오르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자가 대체 누군데.”

“그자…… 예. 아주 위험한 자입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콰아앙!!!!

조용하던 마을에서 또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기겁한 이오가 벌떡 일어났고 뒤도 보지 않고 마을로 뛰어들어갔다.

이에 일리나도 검을 뽑아 들었다.

“나서게?”

“아이들이 무슨 죄야.”

정의감이 가득한 성격답게 그녀는 이런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오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일리나를 뒤로한 채 나는 마을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좀 익숙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계속 방해를 받으면 마계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가볍게 바닥을 튕겨 마을 쪽으로 가자 이미 몇 명이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이도 보였다.

“어, 어째서 공격한 겁니까!!!”

뒤이어 합류하자 이오가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를 향해 역정을 내는 게 보였다.

“크흐흐흐. 네놈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몽마 라피스를 보내 간을 보게 했더니 그새 도망칠 준비를 하였더군.”

“크윽…….”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이오가 검게 변색한 이를 빠득 갈며 안광을 빛냈다.

“이런 식이라면 저도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그가 저항하듯 소리치며 양손에 검은 기류를 모았다.

“호오. 내게 저항겠다고?”

“이곳에서 당신을 몰아내는 수밖에!”

이오가 급히 영창을 시작하자 그의 주변으로 새카만 빛줄기들이 모여들어 회전하기 시작했다.

“흥!!”

하지만 검은 로브를 입은 이는 이오의 공격이 완성되기도 전에 힘을 발현해 그의 공격을 짓눌러버렸다.

“감히. 내게 이를 드러내겠다? 7서클 마스터의 벽도 넘지 못한 놈이 감히 이 사령왕에게?!”

저놈이 아무래도 이 사태의 주범인 듯한데. 말없이 놈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헉!!”

동시에 마나의 역순환을 당했는지 이오가 바닥에 쓰러져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 이오님!”

“이오!”

그 모습에 와들와들 떨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기겁하며 이오를 향해 다가오려 한다.

하지만 곧 나타난 검은 기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걱정 마라. 목숨은 거둬가지 않겠다. 모든 것은 위대한 나의 뜻에 따라. 진정한 불사자의 충실한 부하가 되는 것이다!”

당당하게 소리치는 로브 괴한의 뒤로 처음 이곳을 공격했던 라피스라는 이름의 몽마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데이안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파괴의 마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닥쳐라!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파괴의 마왕?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검은 괴한이 곧 이오를 완전히 제압하려는 지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튀어나가려던 일리나를 제지했다.

“데이비?”

“됐어. 내가 할게.”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 저놈과는 인연이 조금 있다.

“어디 숨었나 했네.”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더 내디딘다. 그 와중에 검은 괴한이 손에서 검은 저중의 기운을 이오에게 뿜어냈다.

“그, 그건?!”

“네놈은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저주다! 이 저주의 손길에서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나니!”

괴한의 외침에 이오의 안광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검은 구체가 날아드는 그 순간.

딸랑…….

옅은 방울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발을 내디딘 나는 어느덧 이오의 앞을 막아섰다.

“엇?!”

“서, 성자님?! 무슨?!”

갑작스레 난입한 내 존재에 이오와 다른 이들이 경악한 듯 나를 본다. 방어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방어 행동도 마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저주의 구체를 몸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은 회오리가 내 몸을 감싸자 괴한은 잠시 멈칫했다 광소를 흘렸다.

“하하하하하하!!!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죽을 자리에 스스로 들어섰구나. 하찮은 필멸자여!! 이제 그 검은 회오리가 네놈의 몸을……”

당당하게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한다.

“한 번도 막아선 자가 없다고?”

내 중얼거림에 그가 주춤거렸다.

“내 목소리 기억하냐? 이 개 잡놈아?”

이윽고 손을 가볍게 털어 회오리를 걷어버린 내가 멀쩡한 모습으로 씨익 웃어 보이자 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후드 속에 보이지 않는 놈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이 일었다.

“야.”

“……크 ……크흠!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기한을 줄 테니 반드시 약속을…….”

“동작 그만. 밑장 빼지 말고 거기 서라.”

이게 어디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척을 하고 있나.

순식간에 돌아서려는 그를 향해 내가 음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령왕 데이안. 네 부하는 뒈져 나자빠졌는데 넌 어떻게 살아있나 보다? 네 공격에 맞고 살아남은 놈이 없다고 구라까지 치고 다니는 걸 보면?”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팔란 제국에서 있었던 고대 언데드의 습격 사태의 원흉이었던 사령왕.

스스로를 죽은 자의 왕이라 칭하던 데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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