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2화
155. 서큐버스의 여왕과 리리네 올로와쥬
비켜봐, 시켜볼 게 있어.
“x병.”
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자 괜스레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우울함을 다른 곳에 풀어야겠다.”
짜증스레 중얼거린 나는 거의 광란의 도가니로 변해버린 이 지옥도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한 여성이 은빛의 그물망에 전신이 꽁꽁 묶인 채 끙끙대고 있었다.
사령왕 데이안과 함께 나타났던 몽마 라피스다.
그리 고위 서큐버스는 아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중요한 존재였다.
“크윽……. 인간! 이거 당장 풀어!”
속이 비치지 않는 그물에 꽁꽁 묶여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몽마 라피스는 표독스런 얼굴로 내게 소리 질렀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래. 무사할 거 같아.”
담담하게 말한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입을 열었다.
“너, 파괴의 마왕인지 뭔지 하는 녀석의 부하라면서?”
데이안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마계로 가려던 이유가 무엇인가.
다름 아닌 파괴의 마왕이 가진 공허 에너지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회수라는 단어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벨리얼을 죽이면서 내가 얻은 마왕의 권위 중 하나가 세어나간 것이니 결과적으론 내 것이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니 이쪽도 명분은 충분했다.
“내가 말할 것 같아? 웃기지도 않는 군. 인간.”
“너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보다?”
“흥, 인간 따위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녀는 이전 대륙을 침공했던 마족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
그렇게 말한 나는 미련 없이 그녀에게 베르샤의 저주를 사용했다.
고문에 최적화된 여러 능력이 있지만 제법 야만적이지 않고 깔끔하게 상대의 멘탈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방법이 존재한다.
[감각증폭]
“으읏?!”
그래도 나름대로 몽마 출신이라고 이런 부류의 감각에는 내성이 뛰어난 듯 보이지만……
“메라몽. 시작해.”
메라몽에게 명령을 하달한 후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뭐, 뭐야! 모, 몸이 왜 이런…… 꺄악!! 그만!! 그만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려보지만,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입이 전부일 뿐이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베르샤의 저주가 생각 이상으로 효율이 높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그 감정하나 제대로 내비치지 않는 륀느의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큰 효능을 지닌 감각증폭 저주인 만큼 효과 자체는 애초에 보증수표를 달고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커헉…… 하아…… 하아……”
이윽고 메라몽이 멈추자 나는 다시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하아…… 하아…… 내가 말할 거 같아? 이곳에서 탈출하는 순간 네놈의 사지육신은 정기를 모조리 빨아 미이라로 만들고 네놈이 데려온 그 인간 여자는 사지를 찢어 마수의 먹이로 줄 것이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표독스럽게 굴라고.”
그래야 내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사연이 있는 이를 죽일 때 마음이 편하냐 하면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내 미소에 몽마 라피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사람 잘못 봤어 이년아.”
* * *
마계는 넓다.
아직 마계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어떤 이들은 그곳을 타차원이라 일컫고.
어떤 이들은 그곳을 격리된 공간, 혹은 다른 대륙이라 일컫는 이도 있다.
“마르카님. 사령왕 데이안의 흔적이 끊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이오라는 그 리치가……”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고 있던 서큐버스 하나가 조용히 말하자 넓은 침대에 앉아 피처럼 붉은 와인을 음미하던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는 어떻게 됐지?”
고혹적인 말투로 중얼거린 그녀의 입에서 한기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서큐버스 하나가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그것이…… 커헉!!”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큐버스의 육신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잡힌 것처럼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커헉…… 크륵…… 사, 살려……”
“너희들의 임무가 뭔지 말해보겠니?”
“크륵…… 마, 마르카님의 명에 따라. 중급 몽마 라피스의 보호……”
콰당탕!!
“그런데 그런 명령 하나 완수하지 못해?!”
격하게 소리친 여성이 서큐버스의 목에 힘을 가하자 가녀린 서큐버스의 가는 목이 비틀어지며 그대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흡……”
공포에 질린 다른 서큐버스들은 와들와들 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마르카의 분노를 외려 자극할 뿐이었다.
“흐, 흐끅! 사, 살려주!”
촤악!!!
또 하나의 서큐버스가 핏물을 뿌리며 쓰러진다.
“그만두세요!!”
그때 고요한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 이게 누구야.”
싸늘하게 서큐버스를 쳐다보던 마르카는 문을 열고 들어선 작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려놓았다.
“힘을 봉인 당하더니 아주 신수가 훤하구나. 그리 빈약한 몸으로 어디 정기나 채취할 수 있겠느냐?”
“……”
“뭐. 제 남편도 잃어버린 년이 무엇을 하겠냐만은.”
“제 부군을 욕하지 말아 주세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 작은 소녀가 반항했지만, 마르카는 관심 없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 웃기지도 않는 역겨운 인간의 주신 프리아를 모시는 리치 때문에 내 동업자가 죽었어. 그리고 내가 총애하던 부하의 소식이 끊어졌다.”
“소식이 끊어졌다는 말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겠지요.”
“그렇단다?”
느긋한 말투로 말한 그녀가 손끝에 기이한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소녀의 뺨을 쓸었다.
“아아. 리리네 올로와쥬. 대공 아스타로트의 품 아래에서 위아래 없이 날뛰던 네가 이리 몰락하니 그리 즐거울 수가 없구나.”
“……위아래 없이 날뛴 적은 없어요.”
“그래. 넌 그렇지 않았겠지. 하지만 대공의 그 잘난 목적을 원하지 않는 이도 많다는 것은 알았어야지.”
소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공 아스타로트의 며느리였던 리리네 올로와쥬였다.
서큐버스의 출신이지만 서큐버스답지 않게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때 비하면 지금의 리리네는 확실히 체격부터가 작았다.
“내 저주. 마음에 들길 바래.”
“역대 어떤 서큐버스 퀸께서도 휘하 서큐버스에게 어려지는 저주를 거신 분은 없어요.”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서큐버스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서큐버스는 정기를 먹고 사는 종족.
그 대상은 사실 인간 마족 가리지 않지만 리리네처럼 어려진 육신으로는 대상을 만족하게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생긴다.
쉽게 말해서 지금 리리네가 겪고 있는 형벌은 서큐버스에게 있어서 사형과도 다름없었다.
물론, 혼인을 치르면서 서큐버스가 가진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리리네였기에 당장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그 첫 선례가 되어야 하지 않겠니. 아하하하하하하!!”
서큐버스 퀸에게 서큐버스라는 몽마족은 지켜야 할 가족이며 보호해야 할 대상임과 동시에 섬김을 받는 존재다.
본디 마르카는 상급 서큐버스로 리리네와 동일한 급의 몽마였었다.
하지만 선대 서큐버스 퀸이 대공 아스타로트를 따라 대륙으로 향하던 도중 실종되면서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그녀가 서큐버스 퀸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문제는 그녀의 역량이었다.
흉폭하고 역량이 부족한 마르카였기에 그녀는 그 열등감이 서큐버스들의 생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보통이라면 더 강한 서큐버스가 그녀를 몰아내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하필이면 우연히 마르카가 마왕님이 흩어놓은 근원 일부를 흡수해버렸다는 점이었다.
악랄하고 동족을 위할 줄 모르지만, 힘이 강한 존재.
그것이 지금의 마르카였다.
“출정준비를 하렴. 그 쓸모없는 리치를 직접 처리해야겠으니. 그래. 리리네. 네 시아버지에게 내가 도움되길 바란다면 여기서 내 발을 핥고 부탁이라도 해보려무나.”
전쟁 이후 아스타로트는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간 그였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적 세력들이 일어나 아스타로트를 공격했고, 현재 그는 병석에 누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필요하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리리네는 자신의 시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마르카에게 까지 손을 뻗어 도움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
“어머, 못하겠니?”
뇌쇄적인 자세로 앉아 발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에 리리네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기어 그녀에게 다가간다.
굴종의 자세에 마르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퍼억!!
그리고 거침없이 그녀를 걷어차 버린 뒤 말했다.
“빌어먹을 년…….”
지독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모멸 서린 말투를 내뱉은 마르카는 곧이어 벌벌 떨고 있는 서큐버스 하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리치가 있는 곳으로 갈 방법은?”
“지름길을 알고 있는 것은 사령왕 데이안과 라피스 뿐이었습니다만 그 둘과의 연락이 끊어진 지금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정공법.
문제는 마르카의 성이 있는 이 마계의 외곽과 지하산맥으로 이어진 통로에는 거대한 존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흐음…… 마물왕이라……”
“놈의 정신을 다른 곳에 팔리게 하든지 녀석을 토벌하든지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마르카님.”
서큐버스의 보고에 마르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마물왕은 나조차도 쉽게 손대기 어렵지. 그래! 그놈은 서큐버스의 고기에 환장한다고 했지?”
빙그레 웃은 마르카가 섬뜩한 시선을 보내왔다.
“리리네. 네 쓸모를 다할 순간이 왔구나.”
제물로 리리네를 바치겠다는 소리였다.
“서큐버스 고기를 한번 먹은 녀석은 일주일을 내리 잠만 자지. 어떠하니, 네가 직접 나서보겠니?”
마치 거절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듯 쏘아붙이는 그 모습에 리리네는 침묵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죽은 남편의 유지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또 제 시아버지를 도울 수 있다면.
뭐든 하리라.
“네.”
* * *
지하산맥 내부엔 수많은 마물과 그 마물들의 왕이라 불리는 마물왕들이 존재한다.
화사한 의상을 입은 채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작은 소녀의 표정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마물왕에 대해 그녀도 들은 바 있다.
그녀가 찾아가는 마물왕은 그중에서도 괴이쩍은 존재였다.
통칭하여 폭식견 켈베로스.
마계에 존재하는 켈베로스급 마수 중에서 지하산맥으로 흘러들어 가 마물들을 먹고 끝까지 살아남은 돌연변이가 바로 그 존재였다.
같은 켈베로스와는 급이 다를 정도로 커진 신체에 강대한 힘은 놈을 켈베로스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들지만 유일하게 세 개의 머리가 놈이 켈베로스였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주었다.
물론, 마물왕이라 불리는 만큼 놈의 힘은 아득히 재앙에 가깝지만 말이다.
놀라운 점은 녀석이 서큐버스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였다.
서큐버스를 잡아먹은 켈베로스는 그 고기를 소화하기 위해서인지 일주일 가까이 내리 잠을 잔다고 한다.
마르카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제물이 되어 켈베로스의 서식지로 향한 리리네는 우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울해지지 말자. 이걸로 아버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비천한 자신을 거둬주고 사랑해준 죽은 남편과 자신을 아껴주신 시아버지에 대한 보답으로 그것이면 충분했다.
마르카가 약속을 지킬지는 조금 미지수이긴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윽고 피가 잔뜩 묻은 켈베로스의 서식지로 들어선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배고픔에 미쳐 날뛴 켈베로스가 일대 영역에 있는 서큐버스들을 사냥해 이곳으로 데려와 먹어치웠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서큐버스의 지옥과도 같은 이곳에.
자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게 될 줄이야.
서러움과 두려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켈베로스에게 먹히면 마르카는 서큐버스 군단을 이끌고 그녀에게 저항한 그 리치를 죽이려 할 것이다.
아니 리치의 능력이 좋으니 아마 생포해올 가능성이 높다.
쿵!!!쿵!!!
이윽고 리리네의 체향을 맡았는지 저 지옥의 구멍 같은 곳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굉음에 질린 리리네는 공포심을 숨기기 위해 양손으로 제 팔을 잡아 끌어안고 머리를 숙여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쓰인 면사포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떨리다 천천히 흘러내렸다.
“죽고 싶지 않아……”
서서히 다가오는 거대한 굉음 끝에 거대한 존재가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그 정신을 놓아버릴 것처럼 묵직한 존재감에 눈을 꼭 감고 있던 리리네는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곧 느껴질 고통에 대비한 채.
그때였다.
[계약자. 이건 뭐냐.]
중후하지만 이성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여기 맞아?”
“……”
누군가의 대화 소리.
이에 고개를 천천히 든 리리네는 곧이어 눈앞에 있는 존재를 보고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흐끅……”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쫄려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흑룡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흑룡의 한 손에는 핏덩이가 된 켈베로스가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