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6화
156. 높게 평가
콰르르르르…….
어마어마한 화염이 마치 주변을 지옥도로 바꾸며 불태운다.
베어낸 것은 일검이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에 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번진 후였다.
[미친놈! 레바테인은 끝도 없이 번지는 불길이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데 힘을 방출하면!]
다급한 방화광, 이프리트의 외침이 들려오자 나는 시끄럽다는 듯 검을 휙휙 휘저었다.
“시끄러워. 누가 못 다룬다고 하든.”
내 빡침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는 몽마들과 그대로 남아 싸움을 지속하려 드는 몽마들을 보며 심드렁하게 한발을 내디뎠다.
그래. 광역 스턴기로 이것만 한 게 없다.
자고로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소림공]
[대 사자후]
“멈춰라!!!”
쿠웅!!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성량의 목소리가 협곡 전체를 뒤집는다.
마공을 배운 자, 소림공을 배울 수 없다고 하지만 사령 마나와 신성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체질이 되어 버린 내게 사실 무공을 가릴 만큼 편식을 하진 않는다.
“으윽……”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인상을 찌푸리는 일리나와 고막에 상처가 났는지 피를 흘리는 리리네 올로와쥬가 보인다.
그들은 그래도 상황이 나아 보였다.
설마 소리로 공격해올 줄은 몰랐는지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몽마들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럴 수밖에.
음공이 그냥 보기엔 정말 허접해 보인다만.
형태가 보이지 않고 광역기로써 이것만 한 것도 사실 잘 드문 편이다.
사자후를 배운 것은 주술과 도술의 스승이었던 우치를 통해 주박술을 연습하고 있을 때였다.
[으하하하하!!! 이게 바로 소림땡중놈들과 술 대작 승리 후에 얻어온 사자후라는 거다!!!!]
애초에 오욕칠정에서 초탈한 불가의 승려들이 술을 마신 것부터가 제정신은 아니다만.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산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내가 건 주박술을 고함만으로 찢어버리던 독고준의 행태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저 미친 술고래가 아주 생긴 대로 민폐질이네! 야 이 미친놈아! 수련을 도와주라 했지 누가 돼지 멱따라고 했냐!]
연습이고 뭐고 중간에 사자후로 인해 내상을 입고 뻗어버린 내 모습을 보던 우치는 짜증스레 주력을 일으켜 내상을 강제 완치시켰다.
주박술을 연습하기 위해 근력 하나는 확실한 놈들 중 가장 한가했던 독고준을 데려왔던 게 화근이라며 우치는 씩씩거렸었다.
[데이비. 저런 미치광이는 상대하는 게 아니야. 알아들었냐? 상종하지도 마라. 말하는 족족 생까고 시선도 마주치지 말라고]
[……]
[야, 시선 피하지 마라, 왜 나부터 손절하냐? 이 X끼야.]
그 후 그대로 사자후에 꽂혀서 독고준에게 5년 동안 맞아가며 소림 불공의 하나인 사자후를 날름 먹어치운 기억은 분명히 생생하다.
순식간에 다수의 몽마들이 전투불능에 이르자 나는 망설임 없이 레바테인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주변을 완전히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레바테인은 확산하는 불의 검. 그렇기에 아주 짧은 시간에 일대를 불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데이비!! 조심해!”
그때였다.
나는 뒤편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기척에 그대로 한발을 뒤로 뺐고 그대로 몸을 빗겨내듯 피해냈다.
서걱!!
동시에 녹빛의 섬광이 좀 전 내 머리가 있던 곳을 정확히 날아 관통하고 지면을 깔끔하게 뚫어버렸다.
“그래도 한 명은 제법 쓸만하네.”
제법 실력에 자신 있는 다른 여타의 몽마들이 사자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력화된 이 시점에서 유일하게 공격을 퍼붓는 이도 존재했다.
“유, 유시르님?!”
그 모습에 일리나가 보호 겸 감시하고 있던 작은 몽마, 리리네 올로와쥬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제법 인지도가 있는 몽마인 듯 보이는데, 확실히 섬광처럼 움직여 나와 거리를 벌리는 그녀의 검엔 소드마스터의 상징, 그것도 제법 숙련도가 높은 농밀한 오러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보통 몽마들이 검을 자주 쓴다지만 저 정도의 실력가를 찾긴 쉽지 않다.
“하아…… 하아……”
지친 게 아닌 묘하게 흥분한 듯 숨을 거칠게 내쉬며 그녀가 몸을 낮춰 당장에라도 파고들 듯 눈빛을 번뜩였다.
보통 몽마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몽마들에겐 조금 특이한 특성이…….
“야, 너 눈치 빠르다?”
보통 몽마들은 눈치도 못 채는데, 굉장히 감각이 둔하거나.
아니면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소리다.
단순히 내 몸에서 뻗어져 나오는 정령 에너지에 질리는 건 많이 봤지만.
고작 소드마스터,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몽마가 내 내면에 숨겨진 괴물 놈들까지 느꼈다는 건 제법 흥미롭다.
카앙!! 캉캉!!
“퇴각해!!”
유시르라는 몽마는 나를 견제하면서도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사자후의 여파에 그대로 노출된 몽마검수들은 청력을 상실한 탓에 명령을 듣는 몽마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녀가 긴장감이 서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녹빛의 얇은 검을 들어 나를 겨눈 뒤 다시 한 번 파고들었다.
카앙!! 캉!!
레바테인의 열기에도 견디는지 수차례 내 허를 찾아 찔러 들어오지만 제대로 된 타격은 단 하나도 없이 모조리 상쇄되기 일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흐읍!”
마치 지금까지의 공격 전반이 모두 내 방심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듯 그녀의 검이 순간 가속한다.
단순히 속도가 아니었다.
저런 검술, 지겹도록 봐왔으니 착각할 수가 있나.
“중검?”
내가 아는 선에서 마족 중 중검을 익히고 있는 이는 내 손에 죽어 마왕직위를 넘겨준 벨리얼이 전부였다.
중검과 검신의 흔적은 마족에겐 증오의 근원일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침없이 중검을 사용해 왔다.
콰아아앙!!!!!
일순간 가해진 어마어마한 중력이 검에 가해지며 그대로 레바테인을 내리쳤다.
확실히 엄청난 속도에 상상을 초월하는 치명적인 한방.
다 좋긴 한데.
“이게 어디 번데기 앞에서……”
“읏?!”
콰앙!!!
어마어마한 화염을 일으킨 레바테인의 화검기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화풀이를 하듯 마계 곳곳에 검기를 마구잡이로 방출했다.
콰앙!! 쾅!!!
협곡 넘어 보이는 울창한 숲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바람에 휩쓸려 그 범위를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데이비!”
무자비한 공격에 리리네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일리나는 다급히 나를 제지하며 소리쳤다.
“그, 그만해! 멀쩡한 숲까지 태울 필요는 없잖아.”
“놔. 아직 화가 안 풀렸어.”
“뭐? 꺄악! 불붙을 뻔했잖아! 이 미치광이야!”
“비켜있어.”
평소와 다르게 과격하고, 파괴적인 내 행동에 일리나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보다 좀 전 나와 싸우던 유시르.
신묘한 방법으로 공격 범위를 벗어났고 순식간에 도망쳤다.
곧바로 쫓아가 그녀에게도 이 분노의 일면을 넘겨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도망치면서 보인 보법 때문에 행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검사라기보단 암살자의 보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익숙하면서도 능숙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몸을 숨기는 것 또한.
결과적으로 유시르라는 몽마는 놓쳤지만 상관없었다.
굳이 살려 보낸 이를 찾아가 죽이는 비효율적인 짓은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세상에 숲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버렸잖아…….”
내 광란의 방화질에 결국 숲 대부분이 시뻘건 화마에 휩싸였다.
기가 막힌다는 듯 일리나가 주변 불바다가 된 숲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일리나와는 별개로 리리네 올로와쥬의 표정은 당장에라도 넘어갈 것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마계에 도달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불바다로 만들며 이동하고 있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리나의 만류도 금방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 * *
또 꼭지가 돌아갔구나.
일리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가 보통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름대로 그와의 인연도 있고, 남들이 겪지 못할 일을 같이 겪어낸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가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게 뭔가 원인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저, 저 인간은 대체……”
“입 다물어.”
“흡……”
“데이비는 몰라도 난 아직 너희 마족과 사이좋을 수가 없으니까.”
그녀의 원수는 뱀파이어이며, 또한 리치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원수들은 이제 없다시피 한 상황이지만 그들과 손을 잡았던 마족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무슨 생각인지 데이비가 리리네를 인질로 잡은 이 상황, 그가 날뛴다면 그녀가 할 일은 리리네를 맡아 그녀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대체 그가 무슨 용무로 마계까지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솔직히 마계에 왔다는 것조차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 봐야, 그 심판자의 세상보다 덜 황당할 거야.’
적어도 검신 하레스가 마족들을 추방한 이 마계보다 심판자가 존재하던 신의 꿈속 몽환 세계가 더 황당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와하하하하! 싹 다 불타버려라!”
어찌 되었건, 저 미치광이가 모종의 이유로 온 사방에 화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그 나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주제에 어떤 면에선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집요하고 뒤끝이 강하다.
닥치는 대로 힘을 발현하고 화염의 검을 휘둘러 숲을 불태우는 데이비를 따라 한참 불타는 숲 내부로 진입했을 때였다.
“소용없을 거예요. 마르카…… 아니 몽마의 성은 마계에서도 그 위치를 아는 이가 극히 드물죠. 몽마거나, 몽마의 초대를 받지 않는 이상 출입은 설사 신이라 해도 불가할 거에요.”
몽마가 괜히 몽마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꿈을 조종하는 특성이 있는 몽마는 그 존재부터가 마족에게도 은밀하다.
애초에 몽마의 사냥감은 인간, 몬스터, 마족을 가리지 않으니까.
“소용없을 거라고?”
거침없이 숲을 불태우던 데이비가 멈칫하자 리리네가 움찔한다.
일리나는 혹여라도 리리네가 보일지 모를 움직임에 대비한 채 칼디라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마냥 화풀이하는 건 당신도 알기 때문이 아닌가요? 마왕.”
“……”
“몽마의 성은 오로지 몽마에게만 허락된 곳. 마왕조차 그곳을 찾을 수 없으며 설사 위치를 알아도 들어갈…….”
“그놈의 운명 때문에 살려놨는데 자꾸 시끄럽게 땍땍거리기는.”
“뭐, 뭐라고요?”
데이비의 말에 리리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린다.
동시에 미친 듯이 주변을 파괴하던 데이비의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저래서 적응이 안 된다니까!’
마치 좀 전까지 보이던 광기와 분노가 완전히 거짓이었던 것처럼 표정이 바뀌어버린 데이비의 모습에 일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놈이 어떤 놈인데.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건 물론이요. 적을 속이기 위해선 아군도 아무렇지도 않게 속여버리는 치밀함을 가진 게 바로 데이비였다.
“어이, 몽마.”
이윽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환한 연보랏빛 하늘을 보던 데이비가 입을 열었다.
“……”
“안 튀어나오고 자꾸 기다리니까 내가 끄집어내는 거다.”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레바테인을 가볍게 휘둘렀다.
“몽마의 성은 몽마만 출입할 수 있다고? 그렇겠지. 영역 전체를 꿈으로 덮어씌워 놓았을 테니.”
그런데 어쩌나.
빙그레 웃는 데이비의 웃음에 여유가 서리기 시작했다.
“들켰는데.”
콰아아아아아!!!!
동시에 데이비가 불태운 숲의 저편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화염의 회오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숲을 불태우는 게 아니었다.
기둥의 수는 총 5개.
그리고.
그 기둥이 일어나며 바닥에서 느껴 본 적 없던 신기한 힘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칭호, 불안전한 마왕, 장착.”
그리고, 데이비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옴과 동시에 숨겨져 있던 마왕의 마기가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웅!!!
동시에 마법진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반응하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빛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마냥 열 받아서 다 불태운 것처럼 보였냐?”
담담한 데이비의 질문에 일리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침묵했다.
침착하게 데이비를 알고 있는 그녀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한다.
“아니었어?”
“쯧.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혀를 차며 중얼거린 데이비는 미련 없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니들, 이제 도망 못 가.”
“무슨?!”
동시에 리리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꿈의 세계에 존재할 몽마의 성이.
불에 타고 재만 남은 폐허의 위에 떡하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이,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히스테릭한 여성의 외침과 함께 가시가 박힌 검은 채찍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순식간의 기습에 깜짝 놀란 리리네가 눈을 부릅뜬 그 순간.
데이비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공자 가라사대.”
공자?
“태양 만세라 하셨다.”
[광(光) 속성 개조 마법]
[7서클]
[썬 플레어 그레네이드]
“너무 오래들 주무셨으니 잠들 깨시라고.”
이전 린디스 제국의 황실 연회 때 그가 사용했던 섬광 마법과는 급이 다른, 태양 빛과 같은 섬광이 일대를 그대로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