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7화
순간적으로 태양이 강림한듯한 빛이 번쩍였다.
그 효과는 신속했고.
“으악!!! 내 눈!”
“꺄아아악! 앞이…… 앞이 안 보여!”
치명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몽마들이 빛에 약한 속성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보통의 경우 생명의 눈앞에서 태양광을 터뜨려버리면 눈이 멀지 않는 게 용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적, 그것도 대비하고 있는 적을 한 번에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사실상 이토록 간단할 수밖에 없다.
쉬리리리릭!!! 짜아악!!
그때였다.
순식간에 날아든 수십 미터에 달하는 채찍이 내 몸을 찢어발길 듯 날아든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채찍은 온몸을 찢어발길 것처럼 내게 덤벼들었고 나는 그대로 한발을 들어 강하게 지면을 굴렀다.
[태극공]
[태극 대 진각]
쿠웅!!!!
순식간에 압축된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채찍의 경로를 강제로 바꿔버렸다.
콰앙!!!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휘날리던 채찍은 그대로 충격파에 의해 밀려나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숲을 부서뜨렸다.
“……”
당장에라도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몽마의 여왕 마르카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 검은 힘, 역시 저년의 힘이 아니라 네 힘이었구나. 마나 하나 없는 네놈이 어떻게 그런 힘을 쓰는지는 모르겠다만. 정예 그림자 수호대.”
이윽고 마르카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을 찢어 죽여.”
스릉!!!
동시에 섬광에 당하지 않은 다수의 몽마들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덤벼들기 시작했다.
레바테인은 숲을 닥치는 대로 불태운다. 이 이상 불태우는 건 외려 내게 손해에 가까운 만큼…….
“몽마도 마족에겐 중요한 구성원인데 다 죽이면 이쪽도 손해가 너무 커서 말이다.”
내 손위로 아공간에서 끌려 나온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창, 롱기누스.
그 세 번째 형태인 언월도, 정복왕이자 창술의 신이라 불리던 남자, 지금은 없는 팔라디아 제국의 황제 아스트레아의 기술을 쓰기에 이놈만 한 것이 없다.
‘전부 죽이면 안 되지.’
지금 필요한 것은 같잖은 정의감을 내세우는 게 아닌 철저한 사익을 위한 자비심.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뿐만이 아니라, 마족도 포함된다.
모든 절차를 이해하고 끝내기 위해선 몽마도 중요한 부품이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만 가자.”
속이 빈 곳에서 빛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빛이 퍼질수록 빛이 약해지는 건 계속해서 넓어지는 공간을 모두 비춰야 하기 때문이다.
무력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범위가 넓어질수록……
위력은 격감한다.
게다가 반수 이상이 아직 섬광탄의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팔라디아식 행성 분열창]
[맨틀 깎기]
콰드드득!!!
어마어마한 강기가 언월도의 끝을 타고 쏟아져 나오며 일대를 할퀴기 시작했다.
* * *
재앙은 한순간이었다.
피를 뿌리며 쓰러진 수많은 몽마들 사이에서 가볍게 롱기누스를 휘두르자 날 끝에 묻은 핏방울들이 허공에 튀었다.
“괴, 괴물 같은 놈…….”
마르카의 상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던 흰 피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녀의 뺨엔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인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내게 덤벼들었다가 내가 방출한 검기에 그대로 노출된 결과였다.
“감히……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
그런 그녀의 악다구니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서늘한 살기를 흘려보냈다.
“관심이 없다더니……”
“……”
“이제 내가 눈에 좀 차시나 봐?”
“죽여버리겠다!!”
악을 쓰며 그녀가 채찍을 휘둘러왔다. 역시나 그녀의 의지를 넘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몰아치는 채찍의 공격에 일리나가 급히 칼디라스를 들어 휘둘러 쳐냈지만.
편이라는 무기는 단순히 검으로 쳐낸다고 막을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읏?!
경험부족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리나의 재능은 뛰어나지만, 그녀가 조금 전 사용한 힘은 단순 몽마의 힘이 아니었다.
-칭호 불안전한 마왕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왕의 위계에 올랐으나 그 자격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자, 데이비 올 라운에게 주어지는 칭호.]
-효능,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왕이 소유해야 할 권능의 이탈을 회수할 수 있다.
그냥 일반적인 내 몸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시도지만 칭호는 그런 내 단점을 보완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불안전한 마왕] 칭호는 그 씹어먹을 해금 시스템이 없는 말 그대로 최상의 칭호.
페널티 또한 존재하지 않는 만큼 지금 상황에 완벽한 힘이기도 하다.
몽마의 여왕 마르카의 히든카드이기도 한 공허 에너지는 끝도 없이 에너지를 뽑아내는, 말하자면 무한 동력기관과 마찬가지였다.
그 힘은 상급 몽마를 몽마 여제로 끌어올릴 정도로 파격적이었고 그 덕분에 그녀는 혼란스러운 현재 마계에서 파괴의 마왕이라는 오만한 호칭을 달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물론, 직접 겪어본 무력만 따지면 솔직한 심정으로 몽마 여제라 불리는 그녀보다 내게서 도망쳤던 중검의 사용자.
몽마 유시르가 더욱 치명적이지만 말이다.
“이, 이 한낱 사냥감에 불과한 인간 놈이!!”
절반 이상 잘려나간 채찍을 다시금 휘두르며 내게 공격을 퍼붓는 그녀였지만 순식간에 몸에 중첩된 데미지가 그녀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게다가 공허 에너지의 숙련도가 부족한지 제대로 된 힘의 활용이 이어지지 않으니 그녀는 실시간으로 빠르게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면접 볼 것도 없이 탈락이네.”
마족은 후에 사용될 중요한 세력이다. 지금의 적이 내일 아군이 될 수 있고, 지금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듯.
이용할 수 있다면 나는 마족도 기꺼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적어도 믿을 수 있는 마족이라면 그녀를 두고두고 살려두어 힘을 회수하지 않고 손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절대 아군이 될 수 없는 존재이며 두고두고 후환이 될 존재라고 판단된 이상 그녀를 살려두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줄 건 주고, 챙길 건 챙긴다.
핑…….
[9위계 성마법]
[성역 십자가]
잠들어 있던 신성력이 내 부름에 잠투정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게으름을 피워주시니 손수 놈을 깨워 끄집어낸다.
결국, 신성력은 점차 속도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내 눈부시고 끝이 날카로운 빛의 십자가를 내 손으로 구현해냈다.
내가 만들어낸 십자가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그녀가 공허 에너지를 끌어내 무기를 구현해내고 내게 덤벼들어 왔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이 닿기도 전 내가 쥐고 있던 십자가의 날카롭고 긴 끝이 그녀의 한쪽 팔을 그대로 꿰뚫고 그녀의 신형을 지면에 처박아 고정해버렸다.
“끄윽?!”
푸욱!! 푹푹!!
동시에 세 개의 빛의 십자가가 더 생겨나며 그녀의 남은 팔다리에도 자비 없이 꽂혀 들어갔다.
“꺄아아아아악!!”
공허 에너지의 활용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변수는 최대한 빠르게 차단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를 때마다 공허 에너지가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그녀의 몸 전신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힘의 일부는 주변에 닿았고 닥치는 대로 주변을 일그러뜨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만, 어째서인지 공허 에너지는 내가 그녀에게 선사해준 빛의 십자가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마르카는 그것이 가장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먹히지 않는 것이냐!!”
“보통 권능이 본래 주인을 해치는 경우는 못 봤거든.”
마르카가 사용하는 공허 에너지가 빛의 십자가를 침식하지 못한다는 건 칭호효과가 벌써 돌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마왕에게 허락된 권능을 회수하는 능력은 그런 뜻이었다.
“무, 무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내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낸 것이다.
“본래의 주인? 핫! 네놈 설마?!”
“마족들끼리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은가 봐.”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마족들이 태반인 것을 보면 말이지.
“마, 마왕!!”
“주운 물건은 주인 돌려주는 거라고 안 배웠나?”
내 말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기류가 흘러나와 내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악다구니를 썼다.
칭호의 효과로 그녀를 파괴의 마왕으로 만들어주었던 공허 에너지가 내 몸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벨리얼을 죽이고 이어받았던 권능이 내 몸을 탈출했다가 이제야 하나 돌아왔다.
“안돼!! 안돼! 그걸 어떻게 얻었는데! 이런 식으로 빼앗길 순 없어!! 리리네 올로와쥬! 이 역겨운 년! 이젠 하다못해 인간 출신의 마왕 같은 잡종의 손을 빌린 것이냐!”
그녀의 비난은 리리네에게 쏟아졌고 그럴 때마다 리리네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그녀는 엄연히 포로의 상황이다.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몽마의 여왕 마르카는 현 마계에 존재하는 중립 세력으로 리리네 올로와쥬에게 중요한 우호세력이 될 가능성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그걸 내가 이해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도 리리네를 살려놓는 이유.
그것은 간단했다.
적어도 다루기 쉬운 대사 하나 정도는 남겨놓아야 이쪽도 일이 편해지니까.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이미 내 몸으로 빨려들어 오기 시작한 공허 에너지는 점차 속도가 빨라졌고, 그와 동시에 마르카의 내부에 있던 끝을 모르고 생성되던 공허 에너지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근원 대부분이 내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 여파로 내 몸 안으로 들어온 공허 에너지는 새로운 몸에 적응하고 장악하겠다는 듯 활개 치기 시작했다.
어? 그거 그렇게 마구잡이로 날뛰면 안 좋을 텐데?
마치 내게 육신의 제어권을 넘기고 편안해지라는 듯 유혹하는 공허 에너지는 그야말로 속삭임 그 자체였다.
보통 존재라면 그 힘에 먹혀 그대로 폭주해버릴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나는 공허 에너지의 그런 귀여운 반항에 비웃음만 흘려 보였다.
얘들아, 신병 받아라.
마기를 받아들였을 때도 그러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마나와 사령 마나, 신성력이 스멀스멀 일어나며 내 몸에 새로이 안착하는 힘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우웅……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변화가 일어났다.
‘마기?’
몸 안의 마기가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더니 다른 힘보다 빠르게 파고들어 공허 에너지를 잡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래, 나다 싶으면 튀어나간다 이거지.
내 몸 안의 마기는 마왕의 힘이지만 다른 여타 힘과 비교하면 상당히 밀리는 구석이 있다.
아무래도 교육이 제대로 된 모양이었다.
공허 에너지는 무한동력기관이라 불러도 될 만큼 강대한 힘이고 이질적인 힘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크게 특출나진 않았다.
마르카는 제법 이것을 잘 이용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 하나만 얻는다고 당장 세상을 부술 힘을 얻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