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5화
“바리스…….”
점차 빠르게 울리는 그 신호음에 데이비의 표정은 감정을 읽기 힘들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린다.
“잘 모르시는 듯합니다만, 당신이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우리 조직은 세상 곳곳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소국의 왕태자 따위.”
제 신호 한 번이면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콰앙!!!
순간 백광의 빛이 그의 오른팔은 물론 그의 어깨까지 날려버린다.
고위 신성마법인 성창이었다.
“용의주도한 새끼네.”
“칭찬 감사합니다.”
육신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음에도 그는 여유로웠다.
실제로 잘려나간 그의 육신은 마치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며 흩어지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육신은 가짜입니다. 저를 죽인다고 바뀌는 건 하나도 없지요. 당신 같은 강자를 상대로 이기기 위해선 정공법만큼 미련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요.”
잊지 마세요. 저는 육체파보다는 두뇌파 쪽이라, 당신을 눈앞에서 상대할 생각 따윈 없다는 것을.
그의 말에 감정이 사라진 데이비의 얼굴에 서늘한 분노가 어렸다.
반대로 청년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에 입매만 슬쩍 드러난다.
“물론, 지금은 저희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니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주셔야겠습니다.”
“……”
“그리고, 소중한 이들의 목숨이 아깝다면 이 이상 저희를 추적하지 말아 주시지요. 세상에는 저희의 눈이 널리 깔렸으니까요.”
“눈이 깔렸다?”
“네. 어떤 이는 평범한 농민으로, 어떤 이는 평범한 귀족으로, 어떤 이는 왕족, 혹은 대부호로서.”
담담하게 말한 그의 육신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 그냥 어중이떠중이 단체는 아닌 모양인데.”
“바로 보셨습니다. 저희는 극도로 위험한 조직입이다. 당신에게는요. 명칭에 관해선, 그렇군요. 저희는 페스리사 대륙에서 나타난 유일무이한 데스 로드의 유지를 잇는 자들. 다차원의 여행자. 혹은……, 일루미나티. 그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겠네요.”
“이, 일루미나티라고?!”
그 말에 일리나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후우……”
어두운 복도를 걷는 소년이 피곤에 찌든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름은 바리스 올 라운.
이제 십 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잇대의 소년이었다.
“왕태자 저하. 야간 업무를 보시겠습니까.”
“오늘은 좀 쉬고 싶어. 베스퍼스 총괄 시종장.”
라운왕국의 4왕자 출신인 바리스는 본래라면 절대 계승권에 눈독을 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누가 뭐라 해도 확연한 계승권을 지닌 왕태자로서 다음 대의 라운왕국 국왕으로 내정된 존재이기도 했다.
“이틀 후. 슈페르만 왕국의 대신 촐싹 백작과 무역협상을 하신 후 곧바로 펠리스티 공국에서 공녀가 찾아오시기로 예정되어있습니다.”
“또, 또 그 공녀야?”
“하아…… 왕자님. 혼사는 왕이 될 분에게 아주 중요한 행사입니다.”
“난 아직 결혼 생각도 없는데.”
불만을 토로하는 바리스의 중얼거림에 베스퍼스 시종장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아예 없으신 건 아닌 듯하더군요.”
“……”
“왕자님.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십니까?”
“베스퍼스 시종장. 쓸데없는 소리야.”
“명심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도 본래 단 한 분의 여인을 평생의 반려로 들이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건 본인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 말에 바리스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형님 같은 지혜와 힘이 내게도 있었다면……”
“데이비 왕자님은 조금 특별한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왕자님께선 데이비 왕자님과는 다르십니다.”
“알아……, 알고 있어.”
“그리고, 데이비 왕자님도 고집을 부리실 뿐 알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데이비 왕자님 또한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백성 한 명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정치문제를 뒤집어 귀족에게 처벌을 내리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기에 언젠가는 받아들이셔야 할지도 모르지요.”
그가 바라는 것은 폭정이되 폭정이 아닌 조화였다.
그렇기에 그의 고집은 그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변한다.
“그 공녀와의 약속을 잡아줘.”
“분부 받잡겠습니다.”
베스퍼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하아…… 형님과 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
피곤함에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말없이 궁 밖을 바라보던 바리스는 문득 기이한 느낌에 눈을 부릅떴다.
푸욱!!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던 베스퍼스 시종장의 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와, 왕자님…… 피, 피하시옵……”
털썩!!
그 말과 동시에 베스퍼스 시종장의 몸이 무너지자 바리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총괄 시종장!!! 젠장 누구냐!! 감히 라운왕국 내에 침투한 자가!!”
다급히 달려와 쓰러진 베스퍼스 시종장의 몸을 살핀 바리스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어떤 미친놈이 왕성 내에 침투해 시종장을 찌른단 말인가.
베스퍼스 시종장의 어깨엔 검으로 찔린듯한 큰 상처가 나 있었고 마치 저주가 걸린 것처럼 환부가 검게 일그러져 있었다.
검은 핏줄이 돋아나고 피부가 뒤틀려있다.
스릉!!
반사적으로 장식용 소검을 뽑아 들지만 이 검이 제대로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복도엔 바리스의 외침이 있어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바리스 혼자 이곳에 내버려진 것처럼 말이다.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라!!”
격노한 바리스는 주변을 물샐틈없이 경계하면서도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베스퍼스 시종장의 입에 흘려넣었다.
데이비가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사용하라며 남겨두었던 상급 회복 약이었다.
스르륵…….
명백히 바리스의 기감을 넘어선 움직임으로 파고드는 그 모습에 바리스의 뺨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만약 적이 살의를 품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습격자는 그를 습격하지 않았다.
피융! 파악!!
대신 그의 앞바닥에 흑철로 만든 석궁 볼트를 쏘아 보냈다.
“……”
석궁의 볼트는 대리석 바닥을 박살 내며 꽂혔고 바리스는 그런 볼트의 끝에 묶인 종이를 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기척은 사라졌다.
습격자는 자취를 감추었고 바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볼트에 꽂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
종이 안엔 삼각형과 그 중앙에 눈동자가 그려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루미나티…….”
그 존재를 눈치챈 바리스가 경악한 듯 중얼거렸다.
“이 조직이 실존했단 말인가?”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 * *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레드드래곤 아이를 넘겨주시고 물러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소중한 사람을 잃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곧바로 라운왕국으로 전이할 힘을 가진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는 것은…….
내가 황급히 라운왕국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다면 그것으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가.
굳이 깊게 생각할 게 있나.
내가 사라지고 난 후의 이곳이 바로 그들의 본 목적이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이 x놈들이 날 손바닥 위에 놓으려 들어?
나라는 변수가 사라지면 소드마스터는 총 3명이 남는다.
하지만 일루미타니라 말하는 이놈들의 저력을 생각하면 그 세 명도 적다고 생각할 만큼 적의 전력은 미지수였다.
그러니.
“이 비겁한 자식!! 바리스 왕자는 관계없잖아!”
일리나가 격하게 화를 내자 청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비열한 수를 써서 상대를 속이는 자. 반대로 속을 수도 있고, 당할 거라고 예상도 해야지요. 그렇지 않는다는 건 너무 비열하지 않습니까.”
“이익……!”
일리나가 분한 듯 이를 빠득 깨물며 그에게 덤벼들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앞을 팔로 막아서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니들이 필요한 게 이거라고?”
내 물음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넘겨만 주신다면 굳이 당신과 충돌할 이유는 없지요. 저희의 숙원은 단순한 파괴공작이 아닙니다.”
“니들 논리는 관심 없고.”
담담하게 말한 내가 손바닥 위에 레드드래곤 아이를 올려놓고 내밀었다.
“가져가 봐.”
내 말에 그가 천천히 손을 뻗다 멈칫했다.
“뭐해. 가져가라니까.”
“당신……”
“눈치 빠른 새끼.”
담담하게 말한 나는 그가 무언가 반응하기도 전에 레드드래곤 아이를 허공에 던졌고.
그 행동에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그 순간.
스릉…….
내 손끝에서 끌려 나온 두 자루의 검이 빛에 뭉쳐지며 한 자루의 검으로 변한다.
“돌아가거든 모두에게 전해라.”
“컥?!”
“너희가 건든 게 누군지. 곱씹어보라고.”
페스리사 대륙 유일의 데스 로드의 유지를 잇는 자?
로 아이아스가 페스리사 대륙 출신이고 나발이고.
너희는 건드리면 안 될 이를 둘이나 건드렸으니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제, 제 몸은 단순한 환영……”
“그래 해보시던가.”
삐릭.
-칭호. 죽음의 업을 파괴한 자를 장착합니다.
-죽음의 업을 파괴한 자
죽음의 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하사한 칭호.
[시전자와 대상의 업을 구별하고 심판한다. 양날의 검 칭호]
비록 환영뿐인 네놈을 죽일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본체와 어떤 경로로든 연결되어있는 네놈의 분신일지라도.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이상 곱게 살아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쩌억!!
일순간 죽음의 심판자의 힘이 검에 깃든다.
심판자들은 하나같이 괴이쩍은 존재들이었다.
신의 꿈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준 칭호는.
일개 필멸자가 단순히 걷어낼 힘이 아니다.
짜드드드득!!!!
동시에 검은 냉기가 주변 공기를 얼리며 그를 잠식했고 초단이의 검에 잘려나간 청년의 육신이 뒤틀렸다.
“크윽…… 무슨…….”
“업은 누구에게나 존재해. 너 또한 변함없고. 너, 이름이 뭐냐.”
양날의 검 칭호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다.
한차례 죽음의 업을 심판받은 전례가 있거니와.
내 몸 안엔 신의 힘과 심판조차 무시하고 독립하는 계열의 힘이 서려 있으니까.
“……이름이라…… 굳이 알려줄 필요 있나요. 디센트. [죽음을 부르는 자] 그게 세상에 알려질 저희의 이름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의 육신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약속을 어겼으니 그는 죽게 될 겁니다. 또한, 당신이 아끼는 영지는 당신이 믿었던 자의 손에 무너질 겁니다. 그래요. 자경단원이었던 이들 중에도 저희 일원이 있을지……, 누가 알까요.”
이윽고 그의 육신이 완전히 무너지자 초단이가 빛을 뿌리며 형상을 만들어냈다.
청적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흰 원피스의 소녀가 내게 그대로 안겨왔다.
“아버지……”
“미안한데 초단아. 나중에 놀아줄 테니 여기 있어 줄래?”
내 말에 초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청단이, 홍단이와 다르게 초단이는 성장한 아이인 만큼 영특하다.
“일리나를 도와줘.”
함정에 한 번 빠졌으면 됐지 두 번은 없다.
날 속여먹은 건 천운이 따라준 거라 여겨라. 두 번은 없을 테니.
“데이비…….”
“초단이와 함께 가. 혹시라도 추가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초단이의 힘을 빌리도록 해.”
초단이의 검 그립을 일리나의 손에 쥐여준 나는 그대로 마나를 발현했다.
바리스의 목숨이 위험하다. 당장 죽지는 않았지만, 위험신호가 울렸다는 건 경보가 떴다는 뜻이기도 했다.
또한, 하인스 영지에도 적이 움직였다는 걸 그냥 둘 순 없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은 나는 곧바로 라운왕국 왕성으로 향했다.
하인스 영지민들은 나의 가족이다.
하지만 바리스는 못난 형이 고생만 잔뜩 하게 만든 미안한 동생이었다.
절대 그를 잃을 순 없었다.
무리하게 빠른 시전으로 인해 육신에 부하가 걸려오지만 나는 곧바로 바리스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콰앙!!
갑작스런 내 등장에 놀란 바리스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바라본다.
그의 곁엔 기사들이 있고 침대엔 베스퍼스 시종장이 쓰러져 있었다.
“바리스.”
“형님!!”
나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오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안도보다 행동을 먼저 내세웠다.
콱!!
“으억?!”
갑자기 내가 녀석의 몸을 낚아채자 바리스가 당황한듯한 소리를 냈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공간을 넘었다.
지금 이 왕성에서 사실상 내가 지키고 싶은 이들은 바리스였으니까.
윈리는 현자의 곁에 있으니 현자가 배신하지 않는 이상 안전할 것이다.
스팡!!
곧바로 하인스 영지로 날아든 나는 자경단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흐업?! 저…… 저하?!”
“자경단원 전원을 모아.”
싸늘한 내 말에 기숙사에서 휴식을 취하던 자경단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움직여!!!”
하지만 곧이어 내가 외치자 그들이 깜짝 놀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릿빠릿한 움직임이다. 몬미더의 휘하 병사와 기사로 이루어진 자경단원들이 빠르게 기숙사 강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 중 공원이 몇 명인지 빠르게 눈을 굴리며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경단원 내에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저…… 모, 몬미더 단장님은 오늘 비번이라……”
“어디 갔어?.”
“그것이…… 저도 잘…….”
그때, 한 자경단원이 급히 소리쳤고 내 시선이 차갑게 식었다.
* * *
“음냐…… 음냐……”
고롱고롱하며 영주성을 비틀비틀 걸어가던 사내 하나가 멈칫한다.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이 하인스 영지의 기사단이 있는 기숙사로 와버린 것이다.
“애고고…… 이게 무슨……”
술기운이 가시질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무슨 영광이나 보겠다고 여기 왔는가 하며 스스로 한탄하고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기숙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그가 진지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잠들어야 할 기숙사가 소란스럽다.
이에 사내는 허겁지겁 소란의 근원지인 강당으로 뛰쳐 들어갔다.
기숙사 규율 첫째.
늦은 밤에는 근무자를 제외한 모두 철저한 휴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타 기사단원과 병사, 자경단원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엄격히 금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소란을 피워?!
사내는 강당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눈을 부라렸다. 동시에 강당 내에 모인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이것들이?
열이 뻗친 사내는 씩씩거리며 취기에 몸을 맡기고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꽤액 소리 질렀다.
“나 몬미더는 제군들에게 실망했다!! 이 시간에 소란을 피우다니!!”
침묵이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