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9화
잠시간 침묵이 일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기사단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눈을 깜빡깜빡거렸고 일리나는 한숨을 내쉰다.
페르세르크는 품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천천히 다가왔고, 륀느는 바람이 사라진 탓에 따분함이 일었는지 그대로 대자로 뻗어 잠들어버렸다.
스스스스…….
내가 기이한 소리를 내는 주먹을 천천히 회수하며 돌아서자, 페르세르크가 다가와 내 머리에 딱밤을 놓았다.
“너무 과했어 데이비.”
방어하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대제를 보며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병마개를 열어 완전히 굳어버린 대제를 천천히 누인 후 그의 입에 회복약을 쏟아부었다.
“대……대제!!”
그제야 반응이 왔다.
암암리에 대제를 호위하던 콘타스의 기사가 급히 달려나와 대제를 부축한다.
“죽진 않았습니다. 기절한 것뿐이니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겁니다.”
보통 자신의 황제가 이렇게 당하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호위들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제국의 관습이요, 전통이니까.
여기서 나서는 것은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에 대한 모독이며, 그 위신을 깎아먹는 몰염치한 행동이라는 것을 그들은 염두하고 있었다.
“세상에……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제의 호위가 그를 업고 물러가자 그제야 필디르가 기가 막히다는 듯 다가왔다.
그리고는 대제가 서있던 자리를 푹푹 걷어찼다.
“잠깐 툭탁 퍽! 하더니 바로 끝나버렸어. 분명 대제가 압도적으로 유리해보였는데…….”
“멍청이.”
일리나의 말에 필디르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본다.
“뭐 이년아?”
“불만이야?”
“아……아니 뭐, 누가 불만이랬나.”
필디르가 찌그러지며 물러났다.
그리고는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신기하네. 대제의 주먹은 저렇게 주변에 난장판을 만들어놨는데…….”
그 말에 고개를 돌리니 대제가 나를 공격할 때 만든 여파로 지면이 뒤집힌 게 보였다.
겉보기엔 확실히 저게 강해 보인다.
이에 나는 그를 지나치며 필디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파를 모조리 일점에 모으면 상대는 죽어.”
그건 대제도 그러했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
모으는 것이야 내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제국의 전통 대련인 마그라는 현재, 상대를 죽이지 않는 룰을 적용하고 있다.
으그극…….
콰드드드드득!!
동시에 내가 떠난 장소의 지면이 뒤틀린다.
마치 반응이 늦게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으어억! 땅이 왜…….”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던 필디르는 그대로 털썩 넘어졌다.
그리고 그는 멍하니 자신을 보는 렌다 자매와 루시아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필디르, 네 밑에…….”
그 말에 필디르가 의아한 듯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멍한 얼굴을 했다.
마치 규칙 없는 듯 파여진 지면이 일면 보였다.
“이게 왜…….”
“멀리서 볼래?”
일리나의 제안에 필디르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근처의 나무를 익숙하게 탄 뒤 지면을 다시 내려다본다.
“뭐가 있…….”
말을 하던 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높은 나무에서 내려다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패인 형상이 아니었다.
수백 미터에 걸쳐 퍼져나간 거대한 악마의 형상 같은 흔적이었다.
그가 본 것은 단순 일부. 그러니 경악할 수밖에.
“역시 괴물이야 쟤는.”
“같은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해.”
렌다 자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 *
내가 직접 만든 상급 회복의 비약을 먹고 대제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뒤 멍하니 있는 그는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물었다.
“마지막에…… 그건 대체 무엇이었나.”
“침투계 말입니까?”
“침투계?”
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겁니다.”
타앙!
주변에 있는 넓적한 돌멩이 하나를 들어 툭 하고 때린다.
그러자 돌멩이 뒷부분이 파스스 하며 부서져 내렸다.
“그런 방식의 공격은 처음이로군. 마법에는 비슷한 것이 있지만.”
발경, 혹은 침투경은 무림에서나 흥하던 방식이다.
외공을 익힌 자들이 내공으로 이길 방법이 그것이었으니까.
“흐음…….”
“모르겠죠?”
“그걸 보고 원리를 알아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나.”
“그렇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한 번 보고 원리를 파악하기 시작한 일리나가 이상한 것이다.
“데이비.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투웅!
그녀가 허공에 손을 휘젓기 무섭게 무형의 기운이 내 가슴팍을 툭! 하고 때렸다.
그 모습을 보고 대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얼이 빠졌다.
“섬뜩한 재능이로군, 팔란 제국의 황제가 병상에 눕기 전 어째서 그렇게 자랑을 해댔는지 알 것 같네.”
“보통 저런 경우는 없으니까요. 후유증 남는 곳은 없습니까?”
“상처는 전사의 상징이다. 흉터 또한 마찬가지지.”
“지금 그걸로 몸에 무리가 오면 이쪽만 손해입니다.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대제께서 하셔야 할 일은 하납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브로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전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계획의 일부를 털어 놓았다.
“기사총장에게 보고를 마쳤네. 일단 복귀하라고 하더군. 기사단원들은 복귀시킬 생각이지만 나는 따로 돌아다니며 조사를 해볼 생각일세.”
아무런 신분도 없는, 국적도 불분명한 사내가 돌아다니면서 그 정보를 캐내려면 애로 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콘타스 대제의 보증패는 가지고 계시지요.”
“그렇네.”
콘타스 대제가 보리스에게 주고 간 보증패는 신분을 확실히 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행동반경이 엄청나게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것을 노리고 그 난리를 부리지 않았던가.
유인은 덤이다.
“아무런 의심 없이 단순한 우연. 콘타스 제국의 대제의 성격을 이용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 까지 훌륭했네. 자네에게 한수 배우고 가는군.”
“몸조심 하세요. 저는 일리나와 따로 조사를 해볼 테니.”
“이 이상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누군가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테니. 최대한 빨리 떠나야겠지. 혹, 전이 마법을 써줄 수 있겠는가.”
보리스의 부탁에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어렵다고.
“헉!”
“아…… 안 돼…….”
그때였다.
나는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필디르와 루시아, 그리고 렌다 자매였다.
마치 필사적으로 거부하라는 듯한 시선들이었다.
[앵커나이트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이 기회에 최대한 세상구경을 해보고 싶다는 뜻일 테지.]
흠…….
페르세르크가 남에게 들리지 않게 설명해주고 나서야 나는 네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대충 그들의 마음을 눈치챈 듯한 시선을 보내자 네 사람은 필사적으로 수화를 하며 내게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런 경우엔…….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우웅!!!
전이마법이 시전된다.
“데…… 데이비! 이 배신자!”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악 소리를 내지르며 내게 매달리는 필디르와 샤이르의 행동거지에 나는 두 사람을 떼어냈다.
“나중에 영지에 한번 초대해줄 테니 지금은 돌아가.”
“뭐?”
“역추적은 불가능하게 암호화 해뒀습니다. 이것까지 눈치 챌 정도면, 그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기사단 궤멸은 일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을 거다 데이비!!”
“복수할거야!”
악악 소리 지르며 그대로 사라지는 네 사람이었다.
보리스를 포함한 기사단원들을 돌려보냈다.
지하산맥 근처에 궤멸된 기사단의 조사는 다른 기사단 쪽에서 맡기로 한만큼 이제 나도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일리나까지 황궁으로 돌려보내고 륀느와 페르세르크만 남겨둔 후,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이비. 그 일루미나티에 대한 조사를 할 생각이라면.”
“아니, 그냥 둬.”
“음?”
“알아서 튀어나올 텐데 굳이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어. 우린 대놓고 다른 활동을 하면 된다. 사실, 이게 더 중요해 내겐.”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륀느, 준비된 건?”
“다 되었다고 보고.”
녀석의 말에 나는 세 번째 전이마법을 발현했다.
“가자.”
우선은 엘프들의 성지. 신목의 숲이다.
* * *
신목의 숲에 들어서자 마중나오듯 모습을 드러내는 엘프 가디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목의 숲?”
“에밀리아에게 안내해줘.”
“정령의 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나를 안내하는 엘프 가디언의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의아해하며 나를 따라 걸어왔다.
본래 신목의 성지보다 한참을 안쪽으로 들어갔을 즈음.
평소 잘 보기 힘든 찬란하게 빛나는 샘을 보며 페르세르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아름다운게야.”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을 흘렸고, 륀느는 멍한 얼굴로 자박자박 걸어가더니 샘물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쑥 뻗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을 샘물에 담가 장난을 치다 그대로 입에 쏙 집어넣었다.
“데이비님. 샘물의 맛을 륀느가 높게 평가.”
“세계수의 힘이 담겼으니까.”
물을 콕콕 찍어 마시다 못해 얼굴을 그대로 물에 담가버리는 그 엉뚱한 행동에 페르세르크는 쿡쿡 웃다가 내게 물었다.
“헌데, 이곳엔 무슨 일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에밀리아. 부탁한건 완성되었나?”
“네. 간만에 흥미가 생겨서 열심히 만들었어요.”
작은 엘프 소녀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설명을 해달라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제 신목의 어머니께서 축복만 내려주시면 완성이에요.”
“그래. 온 김에 확실히 하자. 알은 지금 어디 있어?”
“여기 있다.”
그때 샘의 중앙에서 빛이 모여들며 세계수 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는 맨발로 샘의 중앙에 내려섰고, 물위를 사뿐사뿐 걸어왔다.
“매번 올 때마다 속에 뭘 담고 오는구나. 네 녀석은.”
공허의 결정석을 하인스 영지에 두고 왔지만 완전히 빼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에밀리아. 고생이 많았구나.”
“아녜요 어머니, 제가 즐거워서 한일인걸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끄러워 하는 에밀리아였다.
곧이어 알은 에밀리아가 내민 목갑을 받아들고는 가볍게 힘을 불어넣어 허공에 띄웠다.
우웅…….
동시에 녹빛의 빛에 휩싸인 목갑이 떠오르며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져 나온 빛의 줄기를 감싸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이름으로 축복하노라.”
이윽고 알의 중얼거림과 함께 환한 빛이 목갑 속으로 스며든다.
이후 그녀는 그것을 내가 아닌, 페르세르크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왜 본녀에게 주는 것인지요.”
“이건 애초에 저 녀석이 아닌 네 것이니까.”
그 말에 페르세르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열어봐.”
이에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다리를 포개듯 자리에 앉아 목갑을 내려놓고 그것을 천천히 열었다.
옅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과 함께 뚜껑이 열리고 그 내용물이 드러나자, 페르세르크의 눈에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서리기 시작했다.
“데이비…… 이건.”
“예물이야.”
내 말에 그녀는 목갑 안에 든 물건, 다름 아닌 하늘하늘하게 빛을 머금고 있는 예복을 꺼내들고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그녀 또한 여인이고, 소녀다.
그런 만큼 예쁜 것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답구나...”
“네게 맞는 걸 만드느라 고생 좀 했어. 고맙습니다. 알.”
“흐음. 뭐, 이런 것 가지고 어려울 게 있겠느냐. 게다가 네 녀석이 보내준 물건 덕에 신목의 아이들이 더 살기 좋아졌다. 특히 그 손목시계는 제법 훌륭하더구나.”
킥킥 거리는 알의 말에 에밀리아가 페르세르크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어서 입어보셔요.”
“읏?! 자…… 잠깐 본녀는 아직 준비가…….”
“어서요. 맞지 않으면 수선을 해야 하니까요. 물론, 살이 찐 게 아닌 이상 딱 맞을 거예요.”
에밀리아의 손에 떠밀려 샘에서 멀지 않은 작은 나무 집으로 페르세르크가 들어가자 알이 미소를 지웠다.
“심연이 움직임이 심상찮다.”
“…….”
“베르단데라 하였니? 그 심연의 공주가 그리 말하더구나.”
베르단데는 과거 어떤 이유로 인해 심연 특유의 파괴행각을 완전히 멈추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세계수의 감시 아래 자신의 아들인 그리드 전 국왕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마녀라고도 불렸으며, 한때는 대륙 6대 미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한 남자의 어미라는 칭호만이 남았다.
“심연의 공주도 위험하지만, 네 녀석이 처음 만났던 단순한 심연 덩어리들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 아이를 잘 지켜야 할게야.”
심연이 페르세르크를 확보하면 그쪽이 승리한다.
반대로 내가 그녀를 끝까지 지켜내고 심연과의 모든 통로를 끊어버리면 이쪽이 승리한다.
어느 쪽이건 이제 물러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일루미나티에 대해 압니까?”
“일루미나티? 처음 듣는구나.”
애초에 인간 세상에 녹아든 놈들을 세계수가 관심이나 둘까.
담담하게 침묵하고 있기를 잠시.
나는 곧이어 나무 집의 문이 열리며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소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연녹빛과 백색이 섞인 아름답고 몽환적인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데…… 데이비.”
면사를 썼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부르는 페르세르크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해보였다.
하지만 면사와 예복을 입은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