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1화
“총수, 기회입니다.”
“그는 어찌하고 있습니까.”
“소문을 수집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혼인을 올린다고 하더군요.”
“흐음…….”
검은 복장을 한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중후한 수염이 난 중년 남성은 본디 이렇게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일 인물이 아니었다.
일국의 국왕, 동부왕국의 소국, 볼티즈 왕국의 왕.
그것이 그의 정체였으니 말이다.
일국의 왕을 고개 숙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 책상에 앉아있는 사내가 범상찮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듣자 하니 국왕께서는 데이비 왕자에게 꽤 큰…… 유감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그의 물음에 중년 사내가 침묵했다.
“유감이라…… 예, 아주 큰 유감을 지니고 있지요.”
담담하게 말한 그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분노,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총수.”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단순히 선출된 것일 뿐. 당신의 존재도 저희에겐 더없이 중요하고 높은 분이시니까요.”
“어찌 그러겠습니까.”
저자세로 나오는 볼티즈 국왕의 말에 총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헌데, 총수. 예의 그것은……”
“아, 그것 말입니까.”
말끝을 흐린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는 저희 조직 전체를 쉽게 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직후, 대체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모든 일을 멋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볼티즈 국왕의 말에 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는 생에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은 자이겠지요.”
“그런 그가 방심하고 있습니다. 당장 저희의 끈을 찾을 수 없다고 아주 기고만……”
똑똑.
“폐하. 잠시 들겠사옵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집무실 내부로 검은 정장을 입은 노인이 천천히 걸어들어온 것이다.
볼티즈 국왕의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국왕을 수행해온 총괄 시종장이었다.
총괄 시종장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왕이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처음 보는 젊은 청년이 앉아있고 자신이 모시던 왕이 마치 하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앞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분명히 일렀거늘.”
“폐, 폐하.”
“나가라. 시종장. 오늘 이 일은 엄히 문책할 것이다.”
“하, 하오나 폐하! 급한 사안이……”
놀란 시종장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친다.
하지만 국왕이 싸늘하게 쳐다보자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신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쯧.”
볼티즈 국왕이 짧게 혀를 찼다.
“처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국왕께서 직접 손을 더럽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그 말에 국왕이 눈을 번뜩인다.
“그렇군요. 제 의견은 그렇습니다. 조직 총회에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암살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국왕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리해야겠지요.”
“물론, 다른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할 순 없겠지만요. 저는 그자가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는 걸 더는 지켜볼 자신이 없습니다.”
국왕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직도 들려옵니다. 그자의 손에 죽어간 제 아들의 원념 어린 소리가요. 아버지, 뜨겁습니다. 아버지 아파요. 살려주세요. 귀와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걱정 마세요. 그는 반드시 우리의 손에 죽을 겁니다. 가장 크게 방해되는 존재이니까요. 그를 죽일 방법도 이미 거의 완성단계입니다.”
성자를 죽일 수 있는 수단.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거대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볼티즈 국왕은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 했지만 이어지는 총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헌데…… 조직 총회에 그 의견을 제시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마치 어르고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무슨 뜻이신지…….”
“그가 정말 저희를 우습게 여겨서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일까요?”
“그 말씀은……”
“저희는 아시다시피 비밀 조직입니다. 그 어떤 정보도 함부로 세어나가선 곤란합니다. 이런 경우 무작정 저희 조직원을 그는 헤칠 수가 없어요.”
그 말에 국왕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그 말씀인즉…… 데이비 왕자는……”
“저희를 끌어내려 하고 있어요. 하. 정말 무서운 사내군요. 자신을 미끼로 던지면서 벌써 몇 중으로 함정을 설치해놨군요.”
“그렇군요. 당장 저희의 조직원을 처리할 명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희가 꼬리를 드러낸다면…….”
당장에라도 이 사실을 대륙 전체에 공표화 시켜 모두를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영악한 자입니다. 무력도 압도적이지만 그 머릿속에 든 지략은 실로 놀라울 정도예요.”
“몇 중의 함정이라 하심은……”
“저희가 그의 도발에 걸려 움직일 경우…… 그는 저희 조직 전체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울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가면 저희의 힘으론 해결이 힘듭니다.”
그 말에 국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떤 수를 써도 그를 죽이기 힘들다는 겁니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렇지요.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오랜 시간 우리 조직이 만들어온 1급 위험인물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1급 위험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가진 위험성은 너무 깊습니다.”
“생각이 짧았군요.”
“걱정 마십시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해지는 건 우리입니다. 그는 과거 지킬 것이 없었기에 거침없이 날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요. 그는 지킬 것이 많아요.”
총수의 말에 국왕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런 도발 말고는 저희를 끌어낼 수단이 없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하지요. 하나하나 그의 주변을 공략하여 그의 숨통을 조일 겁니다. 승리는 결국 우리의 손에 떨어질 겁니다.”
총수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고,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 그가 보일 표정이란……”
오쌈함에 몸을 부르르 떨며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희가 염원하던 인간의 순수를 볼 수 있겠군요.”
“그 목적,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국왕의 말에 총수는 눈을 감았다.
그래, 어차피 그는 자신들을 끌어낼 수단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 봐야 이 대륙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 아니던가. 데스로드의 유산을 통해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지니며 타차원의 힘까지 섭렵한 조직의 위세에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브로치를 꺼내 손으로 가지고 놀 듯 이리저리 굴렸다.
“이 브로치가 존재하는 한 모든 명분과 승리의 과실은 저희에게 올 겁니다.”
그는 몰랐다.
그 이중, 삼중으로 처진 함정의 끝에 그가 무엇을 숨기고, 또 무엇을 꺼내 들고 있는 지를 말이다.
총수는 데이비에 대해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했지만.
반대로 그는 데이비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 * *
[데이비, 기계가 찍어내는 기술은 틀림없고 완벽하데이. 근데 말이다. 인간이 만드니까 그 가치가 뛰어난 게 있다아이가.]
그림을 구분할 때, 진품과 가품의 차이를 구분하는 방법 중에는 그런 것이 있다.
더 정교하고 깔끔하며, 진짜 같은 것이 가짜라는 것.
진품은 숨길 이유가 없기에 그런 자잘한 것을 신경 쓰지 않지만 반대로 가짜는 진품처럼 보이기 위해 오히려 진품보다 더 정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라고, 니는 니만의 방식이 있으니께, 그건 기계도 몬따라한다. 카니까 어디 가도 쫄지 마라.]
몇 시간 정도의 조용한 작업 중에서도 페르세르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됐다.”
이윽고 검강까지 피워올려 정교하게 세공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피곤한 듯 귀엽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머리에 피가 쏠렸는지 살짝 비틀거리다 내 품에 안겼다.
“대체 세공과 본녀가 모델이 되는 건 무슨 관계인 게야. 그리고.”
그녀가 묘하게 불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이건 또 무엇이고.”
고개를 살짝 돌린 채 그녀가 가늘고 흰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의욕고취.”
내 대답은 반쯤 틀린 답변이었다.
주변의 공간이 약간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순간에 주변 공기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작업장 특유의 냄새나 뜨거운 온도가 한순간에 사라지듯 바뀌자 놀란 페르세르크가 나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이거 걸고 나면 못 돌이켜, 후회 없어?”
내 물음에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질문을 그대가 해?”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내 이마에 제 입을 맞추었다.
“본녀와 함께하면 그대는 평생 심연과 싸우게 될 텐데.”
“그게 문제가 되나?”
“하…… 가벼운 사내로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키득거리는 그녀였다.
“처음엔 그저 경계 대상이었을진대…….”
말없이 다가가 내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듯 그녀를 안자 그녀는 말없이 작고 흰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붙잡아 끌어안았다.
마치 서로 포옹하는 듯한 자세가 되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찌 이리 신경이 쓰이게 한단 말인가.”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내가 천천히 손을 풀자 말없이 고개를 숙여 제 목에 걸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은빛을 내뿜는 목걸이였다.
너무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지만, 그 중간의 느낌이 적절하게 살아 더욱 그녀를 밝게 만들어주었다.
“넌 액세서리로 꾸미는 게 외려 독이 되니까. 적당히 수수하게 만들었어.”
귀족들이 치장하는 커다란 보석더미 같은 치장방식은 페르세르크에게 외려 독이다.
내 말에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페르세르크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똑똑.
그때, 분위기 없이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갑작스런 소리에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내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누가 왔……”
이에 내가 몸을 돌려 나가려던 그 순간.
그녀가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그대로 끌려간 내가 몸을 돌린 그 순간.
페르세르크는 나를 벽면으로 밀어붙인 뒤 그대로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그대가 본녀 같은 영혼의 죄인을 마음에 두어준 보답인 게야.”
짧게 입을 맞춘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륀느, 페르님과 데이비님의 과감한 행각을 높게 평가.”
담담하게 말하며 자박자박 맨발로 걸어들어오는 륀느였다.
그리고 륀느의 뒤편으로 홍단이와 청단이가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꺄르륵 거렸다.
“아빠 부끄러!”
“부끄러!”
그런 주제에 어디서 배웠는지 손가락을 벌려 작고 앙증맞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와 페르세르크를 올려다본다.
“데이비.”
“음?”
“본녀와 함께 있으면 아이를 보지 못할 거야.”
“상관없는데?”
아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일신의 삶이지 내 흔적이 아니니까.
“죽기 전까지 후회하지 않게 사는 게 내 목표야.”
“약속하나를 해주어.”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본녀를 신경 쓴다고 그대가 만든 소중한 인연을 걷어차지 않을 것.”
그녀의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린다.
“넌 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어머니가 돌아가신 주된 원인은 참 간단했다.
정치문제를 떠난 한 여인의 질투.
그것이 지금의 나를, 또 과거를 만들어냈다.
“본녀는 그대에게 아이를 안겨주지 못해. 그렇기에 본녀 혼자서 그대를 독점할 생각은 없어,”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내 멱살을 잡은 채 나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말했다.
“정실, 후실, 첩, 처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본녀는 본녀가 그대에게 해주지 못하는걸 다른 이가 대신해주었으면 할 뿐이니까.”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 본녀의 욕심은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난항은 본녀가 해결할 일이지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약속해줄 수 있겠는가?”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그녀의 의지가 어찌 되었건 나는 당장 대답을 하진 않았다.
“뭐, 본녀도 질투심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러니 많아도 한 명에서 둘. 거기까진 용서해주겠어.”
키득거리며 나를 놓은 그녀가 나를 지나쳤다.
두 명이라, 아주 저격을 하는구나.
이게 다른 의미로 보면 정말 칼 같은 답변이었다.
이 이상 네 알량한 짓으로 수를 더 늘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정말…… 의욕이 너무 과했구나.”
그녀는 언제 끼워졌는지 모를 금빛의 반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반지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마치 누군가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세공이 되어있었다.
“본녀가 살아오며 이처럼 살아있는 것 같은 반지는 본 적이 없어. 반지에 담긴 의미는?”
“희생과 평안, 안식.”
“그 희생. 그대만 하지 말도록.”
아름답게 웃어 보인 그녀가 나를 지나쳤다.
“크리아네스 국왕께서 그대를 찾는 모양이로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자 정복을 입은 기사단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저, 저하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나이다.”
“명령?”
그동안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그 사람이 이제 와서?
내 물음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칙서를 내밀었다.
문제는 그 칙서를 받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인스 영지에 가니 이곳에 계실 거라 하여……”
얼굴을 붉게 물들인 젊은 기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본녀에게?”
“예……. 폐르세르크 성자비.”
떨리는 손으로 칙서를 건네주는 기사의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펼쳤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성자비로서 그녀의 존재를 국왕의 이름을 걸고 인정할 테니. 이번 1 후궁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여 얼굴을 비쳐달라는 이야기였다.
내게 직접 보내면 그녀에게 닿을 것도 없이 거절할 것을 알기에 내린 결정일까.
나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대뜸 혀를 찼다.
“하여튼,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데이비. 그대의 부모에게 그 무슨 말이야.”
“가지 마라, 페르세르크. 귀족들이 얼마나 영악한 인간인데.”
내 말에 그녀가 키득거렸다.
“영악해? 미안하지만 귀족들의 생리는 본녀가 그대보다 잘 알아.”
그녀의 말에 내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확실히 일리나와 함께 존재해왔으니까.
“거 철없는 애들 질투가 가득가득할 거다.”
“질투? 쿡쿡, 그대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아이들이 아무리 철이 없다기로서니 설마 그럴까.”
그녀의 말대로 이제 와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나 할까.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그런데, 짜잔, 절대라는 건 없더라.
와장창!!!
“감히 평민 출신 따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