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2화
158. 물밑의 검은자들 (1)
1후궁이자 쌍둥이 남매, 바리스와 윈리의 생모인 아니샤 후궁의 생일 연회가 열린다.
아니, 이제는 후궁이 아니라 라운왕국의 세 번째 왕비가 된 그녀였다.
왕궁 내정에서 현재 왕을 제외하고 가장 고귀한 퍼스트레이디인 아니샤 왕비의 생일 연회인 만큼 그 규모가 작을 순 없다.
아마 수많은 귀족과 방계 왕족이 모이리라.
물론, 나는 그 연회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화사하고, 화목한 분위기이지만 사실 정치적인 문제가 얽힌 곳에서는 겉만 화려할 뿐 내부는 언제 싸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남자의 경우는 문제가 적은 편이다.
그들의 싸움판은 사교회가 아닌 국정회의에서 많이 일어나니 말이다.
하지만.
사교회가 전쟁터이며, 드레스와 화장, 그리고 액세서리가 무기인 여성들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가 사교회에서의 경쟁, 그리고 견제를 암묵적으로 묵인한다.
이유?
그것이 내조의 방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남편이 바깥에서 지위를 내세운다면 부인은 남편과 가문을 위해 사교회에서 기세를 세우고, 인맥을 만들어 힘을 보탠다.
그 사례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왔고 라운왕국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아니샤 현 왕비는 냉정하게 평가해도 야망이 많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본래 왕비 자리에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크리아네스 국왕의 선대 왕비가 사망한 뒤 권력을 잡았던 리네스 왕비 또한 자결함으로써, 결국 그녀에게까지 자리가 돌아온 셈이었다.
물론, 그녀의 기반세력은 빈약하기 그지없지만 데이비라는 존재가 왕위를 버리고 바리스에게 모두 몰아줌으로써.
2후궁의 입장에선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호랑이가 가면 여우가 굴의 왕이 되는 법이다.
위세 높던 귀족파가 무너지고 그동안 흔들리던 국정을 왕당파와 아니샤 후궁, 아니 왕비측의 노력으로 안정이 되고 있는 게 지금의 라운왕국이었다.
물론, 국고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는 탓에 그 회복속도가 빨라진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일전 라운왕국 국정회의 때 공식적으로 참석한 이래로 나는 사실상 왕성으로 돌아온 적이 거의 없다.
그 탓에 사실 왕성에서 나는 제법 붕 뜬 존재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입지를 지닌 이유. 이름만 들춰내도 사람들이 흠칫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질러놓은 짓이 워낙에 많아서 이기 때문이리라.
그 누구도 그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지만, 눈빛에 공포심이 서린 게 훤히 보일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사교계에는 참가하는 일이 극도로 없거니와 참가한 사교계마다 난동을 부려놓았으니 소문이 제대로 퍼질 리가 없다.
스팡!!!
허공이 찢어지며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숙이고 마치 피하듯 도망쳤다.
“쯧쯧. 정작 타국에선 그대를 원하는데 자국에서 그대는 귀신과도 같은 취급이라니.”
그리고 내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페르세르크는 연회용 로브를 여미고 후드를 덮어쓴 채 장난을 걸어왔다.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게야.”
“누구 좋으라고 착하게 살아.”
내 투정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내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마치 나를 놀리듯 올려다보는 그 낮은 시선에 괜히 심술이 나는 기분이었다.
“흐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그대, 지금 이 왕성에 그대의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대륙에 나를 지칭하는 명칭은 많다. 하지만 라운왕국, 그것도 수도 내에서 내게 퍼진 소문은 사실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안 보이는 곳에선 제국의 황제도 욕하는 법이다.
피에 미친 왕자.
혐오스러운 추남.
뭐, 종류야 가지가지이지만 소문이 살에 살을 붙여 꼬리를 물면서 사실 수도에서의 내 평판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다.
본래 소문이라는 게 이래저래 살이 붙어서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는 법이다.
실제로 나는 라운왕국의 개혁과정에서 폭군이나 할법한 피의 숙청을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게 당했던 이들은 복수할 목적으로 나에 대한 소문을 극도로 나쁘게 지속해서 퍼뜨렸고.
그 결과, 지금의 내가 나타났다.
“차라리 그런 소문이 퍼진 게 나아.”
괜한 짓을 하는 인간들이 없을 테니까.
“준비는 다 됐어?”
“본녀는 두근두근하는 구만.”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그녀가 장난스레 말한다.
“분명히 말하는데. 누가 됐건 네게 위협을 가하거나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은 내 약속하는데, 곱게 못 죽을 거다.”
내 말에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연회 홀 입구를 향해 걸어가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휘이잉…….
동시에.
옅은 바람이 불어 그녀의 후드를 살며시 뒤로 넘겼고, 그 여파로 후드 속에 감춰진 그녀의 외모와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에 찰랑거리듯 휘날렸다.
주변의 소리와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닌 척 저들끼리 떠들던 이들도 순식간에 침묵한 채 시선을 고정한다.
압도적인 침묵.
그럴 수밖에.
페르세르크는 기본적으로 나와 함께 다니기에 별문제 없이 지내왔지만.
실제로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 년에 한 번 나타나 나라를 휘청이게 한다는 경국지색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주범인 페르세르크는 너무도 예쁘면서도 성격 나쁜 장난기 서린 미소로 나를 보며 말해왔다.
“그럼, 왕자님. 에스코트 부탁드리지요.”
“나만 믿어.”
내가 내민 손을 잡고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향해 화답한 내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고해.”
낮고 조용한 말투에 페르세르크를 보고 넋이 나가 있던 시종이 눈을 크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죄, 죄송합니다! 모, 목숨많은……”
와들와들 떠는 시종의 말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됐으니까 고해.”
“예…… 예!”
자신의 실수로 인해 죽을 거로 생각했던 그는 내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자 조금 의아한 듯 나를 보다 목을 가다듬었다.
“1, 1왕자 데이비 올라운 왕자님과 그 파트너이신 페르세르크님 드십니다!!”
그 외침과 함께 은근하게 소란스럽던 연회장 내부의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연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현 왕비 아니샤 왕비가 맞다.
하지만 알만한 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 페르세르크에 대해 상당히 관심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나라를 이끄는 중책들이다.
당연히 내가 그들에게 책잡힌다 하여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체면과 직결되는 만큼 굉장한 압박감이 전해질 텐데.
그녀는 그저 환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한발, 두 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연회장 내부는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사실만으로도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또각또각하는 작은 구두 소리만이 청명하게 울려 퍼졌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기선제압은 됐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페르세르크를 대동한 채 걸음을 내민 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크리아네스 국왕과 나를 향해 유약하지만 환한 미소를 지어주는 아니샤 왕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1왕자 데이비 올라운, 그리고 그 약혼자인 페르세르크가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정식 약혼식 따위 올린 적 없다지만 상관없었다.
단순한 형식일 뿐이니까.
“어서 오거라.”
나를 바라보던 크리아네스 국왕이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 심호흡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 * *
좌중을 압도하는 출현.
특별한 연출이 있었던 것도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나타나기만 했는데 좌중의 시선을 끌어모은 것이다.
한창 미모를 뽐내는 여성들에겐 사실 꿈만 같은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미녀라도 좌중을 그렇게 압도하는 미모를 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세상에…… 너무 멋진 분이세요.”
“피에 미친 광인이라고 들었는데……”
“그러게요. 게다가 생각보다 엄청 형편없다는 소문도 돌았는걸요.”
영애들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저…… 유르바라 공작 영애?”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작은 소녀가 흑발의 소녀를 조심스레 불러왔다.
“……”
“괜찮으신가요 유르바라 공작영애?”
“……아, 네. 잠시 아름다움에 빠져 넋이 나갔었네요.”
담담하게 말하지만 유르바라의 시선은 오로지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에게 꽂혀있었다.
“그렇군요. 저 여인이……”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사실 정말 놀랐답니다. 데이비 왕자님께서 빠질 만도 해요.”
담담하게 말하는 세실리의 말에 유르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에 대한 소문은 공포로 점철되어있지만, 영애들은 데이비라는 존재를 상당한 출세의 기회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멀쩡하고 멋진 분일 줄이야……. 여기 소문은 믿을게 못 되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사실 아버지께서 데이비 왕자님과의 혼담을 왕실에 한 번 청해보신다 하셨을 때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 아까워라. 그 혼인이 성사되었다면 지금 저 자리에 있는 건 저 평민 여성이 아니라 영애였을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왜 아니겠어요.”
고기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소화초부터 씹어 삼키는 꼴들이 퍽 우습다.
유르바라의 냉소에 그녀의 측근인 세실리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르바라 공작 영애에게 돌아갔다.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은 분이랍니다. 연회가 지속되는 동안 저희 테이블 쪽에서 사교활동을 해주실 텐데 새로 오시는 분을 잘 맞이해 주도록 하자구요.”
유르바라 공작 영애의 말에 세실리가 맞장구치자 다른 영애들도 하나둘 눈치 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
그녀는 사실상 현재 비혼 상태인 영애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의 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본래라면 왕족인 윈리나 에오니샤, 타냐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윈리와 타냐는 사교회 내부가 어찌 돌아가던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에오니샤는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였기에 사실상 비혼 상태인 영애들의 모임에서 유르바라 공작 영애를 따라올 실세를 지닌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유르바라 공작 영애는 몇 년 사이 이 모임의 실세로서 많은 권력과 질투, 그리고 선망을 받아왔다.
그것은 귀족 영애로 태어난 이들에겐 필연적으로 갈구하는 자리였으며, 소망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왕비 저하께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윽고 데이비가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아니샤 왕비에게 내밀자 영애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달빛의 눈물이라는 반지입니다.”
그 말에 영애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다, 달빛의 눈물이라면 설마……”
그리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 남성들의 경우 저것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보석과 귀금속이 자신들의 무기나 다름없는 영애들이나 귀부인의 경우 데이비가 왕비에게 내민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모르지 않았다.
드워프 최고 장인이 세공하고 요정이 축복을 내렸다는 전설이 있는 반지에 대해선 알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귀물들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데이비가 왕비에게 선물로써 건네준 물건은 수집가들이 억만금을 내서라도 구하고 싶어 하는 귀물 중의 귀물이었다.
실제로 그것이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소문에 따르면 한 부유한 귀부인이 그 달빛의 눈물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돈을 풀었으나 끝끝내 구하지 못했다는 말도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의 가치는 그만큼 뛰어났다.
“세상에…… 이런 귀한 것을…….”
아니샤 왕비는 그 아름다운 반지의 모습에 취해 어찌할 줄 몰랐고 데이비는 그런 아니샤 왕비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왕비의 생일에 참석해주어 고맙구나. 왕자, 짐은 왕자가 이리 찾아와 주어 정말 고맙다. 그리고, 새아가.”
크리아네스 국왕의 말에 그의 곁에 있던 은발의 소녀,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폐하.”
“왕자의 곁에 있어 주어 고맙구나.”
“부디, 두 분이 좋은 사랑을 하길 기원할게요.”
덕담이 오고 간다.
그 사이에 영애들의 얼굴에 질시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중 푸른 드레스를 입은 고압적인 표정의 한 영애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실리 영애. 듣자 하니 영애의 부친께선 하인스 영지의 납세 관련 일을 하신다고 하셨던가요.”
“어머, 그럼요. 그래서 왕자비가 되실 페르세르크 양에 대한 소식도 제가 전해드렸는걸요?”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 영애가 빙그레 웃자 다른 영애들이 쿡쿡 웃어 보였다.
“허면, 저 페르세르크 양과 함께 할 자리도 어찌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붙여 세실리에게 페르세르크를 이 테이블에 데려오라 압박을 넣는 다른 영애들의 모습에 세실리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나. 그랬으면 좋겠지만…… 왕자님께서 보내주실는지…….”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은 영애들의 모임이랍니다. 페르세르크 양께서도 부디 참석해주었으면 좋겠네요.”
겉으론 화사하게 웃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들의 표정 속에 숨겨진 감정은 절대 화사하지 않았다.
끈적거리고, 날카로우며, 추잡스러울 정도의 질시가 서려 있었다.
달그락.
그때 조용히 앉아 데이비만을 바라보고 있던 유르바라 공작 영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디.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세실리가 화사하게 웃는다.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힘을 좀 써보도록 할게요.”
“꼭 좀 참석해주었으면 하네요. 뭐, 자리에 정말 어울리는 지위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소문이요?”
“왕자님의 비로 내정된 저 페르세르크 양이 사실……”
“사실?”
“평민이라는 소문을요.”
그들은 페르세르의 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