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3화
159. 물밑의 검은자들 (2)
“오라버니!”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다가와 품에 안기는 윈리의 모습에 주변 귀족 몇몇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오라버니, 소식 들었어요. 이제 혼인을 치르시는 건가요?”
“조금 더 있어야겠지만.”
두루뭉술한 대답이지만 윈리는 그것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페르세르크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페르 언니, 정말 축하드려요.”
“고맙구나.”
“우리 오라버니, 조금 과격하고 돌직구같은 사람이지만 잘 부탁드려요.”
헤실거리며 손을 꼭 잡고 부탁하는 윈리의 머리를 콕 쥐어박고 나서야 둘을 떨어뜨린 나는 멀찍이서 한 소녀에게 붙들려있는 바리스를 발견했다.
상당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리스에게 달라붙어있는 소녀의 얼굴엔 옅은 홍조가 어려 있었다.
“좋을 때로구나.”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리스는 곧이어 나와 페르세르크를 보더니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소녀에게 팔짱을 끼인 채 테라스로 향했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해결했나보네.”
“바리스, 저 아이는 그대에게 열등감을 품었지.”
“흠…….”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이기에 자신이 그에 맞게 성장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품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게야. 거기에 그대가 끼어들 틈이 어디 있나.”
페르세르크의 조언은 현실적이었다.
나는 바리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는 녀석이 스스로 발전하는 일 뿐이었다.
“저는 타냐 언니와 마리아 공주님을 맞이하러 가볼게요.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윈리를 뒤로한 채 나는 페르세르크의 손을 잡아끌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온 이가 있었다.
“아아, 아름다우신 레이디. 저는 헤치만 백작가의 차남인 카스노바 헤치만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 페르세르크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제게 당신께 인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페르세르크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를 하려는 카스노바 헤치만의 행각에 몇몇 영애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그러고 보니 제법 유명한 놈이었던 것 같은데.
사교연회만 열렸다 하면 수많은 여인들과 추문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한 놈이다.
잘생긴 외모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영애들의 여심을 저격하는 말과 매너 때문에 많은 여인들이 그를 두고 눈물을 흘린다는 웃긴 소문도 있었다.
말없이 손을 잡힌 페르세르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만 카스노바는 거침없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댔다.
탁!!
물론, 그 꼴을 내가 살아서 두고 볼 이유는 없다.
“카스노바 영식.”
“흡!”
내 방해에 인상을 찌푸린 카스노바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사실, 그의 행동은 예의 면에서 큰 문제가 없다.
단순히 상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행동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그들의 생리고.
나는 다르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굳어버린 그의 모습에 내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서서히 가해지는 힘에 그의 얼굴에 고통과 경악이 어리며 한발 두발 물러난다.
“겁이 없나?”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데이비 왕자 저하…….”
“하지만?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다시 물어야 하나 영식?”
“흡…….”
“내가 네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를 것 같나?”
“죄…… 죄송합니다.”
“두 번 신경 쓰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페르세르크의 팔을 잡아끌고 나서자, 주변에서 몇몇 영식들이 아쉬운 탄성을 흘리는 게 느껴졌다.
못 먹는 감, 멀리서 구경이라도 하는 맛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페르세르크는 질투이건, 연심이건 너무 많은 시선을 끌었다.
그녀의 미모는 냉정하게 평가하면 단순히 6대 미녀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마족의 왕으로서, 또 심연의 여왕이라는 존재로 자리 잡히며 본능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 방식은 카리스마나 여러 방면이 있지만, 내가 본 페르세르크는 단순 외모를 넘어 상대를 매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페르세르크를 데리고 테라스 밖으로 나온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읏?!”
“가자,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데이비, 생각보다 얌전하게 그를 물렸어.”
내게 안겨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던 페르세르크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는지 표정을 감추고 장난스레 물어왔다.
“보통 그대라면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넘길 리가 있나.”
난 잘생긴 놈에게 호감이 별로 없다 이 말이야.
“설마…… 또.”
“걱정 마. 머리에 아주 조금만 구멍을 만들어준 것뿐이니까.
원형탈모라고해서 꼭 거대할 필요가 있나.
엄지손가락 끝 두 마디 정도만 비워주었으니 아마 효과는 오래 지나지 않아 나타날 것이다.
“세상에.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군.”
“그놈 소문은 알고 있나?”
“소문?”
“유명한 난봉꾼이야 그놈.”
내 대답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 생각보다 이 나라 귀족이나 귀족영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야?”
“…….”
페르세르크의 말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녀를 데리고 한참 이동했다.
어두운 숲을 지나, 두 개의 환한 달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연회장 뒤에 숨겨진 정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정보를 좀 찾아봤었어. 아, 물론 일루미나티놈들을 조사하느라.”
내 말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붉은 문양이 새겨진 혈안은 맑고 깨끗하게 나를 담아냈고, 곧이어 장난기로 가득한 눈으로 변했다.
“호오, 그대, 본녀가 많이 걱정되었나봐?”
“…….”
“이를 어찌해. 본녀가 그리 좋은 게야?”
기회를 잡았다는 듯 내게 밀착해 나를 놀리는 그녀의 행각에 나는 한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그대로 근처의 나무에 몰아붙여 벽에 등을 부딪히게 한 뒤 웃어보였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조금 움찔한 듯 하지만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겁도 없이 도발하지마라. 페르세르크.”
“뭐?”
“여기 아무도 없어.”
내 말에 그녀가 침묵했다.
“식 올리기 전에 과실이라도 맺고 싶으면…….”
말끝을 잠시 흐린 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계속해서 까불어봐.”
내 말에 잠시 움찔거린 그녀였지만 곧이어 자신만만한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건 나였다.
“그대가 여기서 본녀를 어찌해보겠다고? 어디 한번 해보시게.”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힌다.
얼굴에 피가 쏠리며 한 발 두 발 물러난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런 나를 좀 더 몰아붙이려는지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였다.
장난기 어린 나긋나긋한 미소, 보통 장난을 치면 그녀는 당황하며 물러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외려 내 쪽에서 당황스러워졌다.
“크흠. 여…… 여기서 기다려라.”
결국 그녀를 밀어낸 뒤 도망쳐버리자 멀리서 그녀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그녀와 한참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멈춘 나는 숨을 고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모태솔로 출신이라지만 이렇게 심장이 둥둥 뛸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닐진데…….
“가만, 내가 왜 도망가는 거지?”
생각해보면 내가 굳이 도망갈 이유가 있는가.
비록 오랜 시간 연애 한번 못해온 영혼의 삶이었다지만,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패기 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그쯤 생각이 미친 나는 전신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그녀는 나를 피해 그 자리를 벗어난 듯 도망친 것으로 보였다.
아마 내가 돌아가면 자신이 밀릴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리라.
“페르세르크 이년, 어딨어.”
만나면 후회하게 해주리라.
“나는 시방 이 때만을 위해 살아온 거다.”
나는 손마디를 뚜둑 소리 나게 꺾으며 섬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전신에 마나를 퍼뜨렸다.
그녀가 뛰어봐야 벼룩이다.
찾는 것이야 어렵지도 않은…….
스스슷.
그때였다.
페르세르크를 찾으려던 내 기감에 잡힌 것은 근처에 있는 다른 인물이었다.
“어머나. 데…… 데이비 올 라운 왕자저하.”
청순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흑발의 소녀가 숲속에서 나타나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
연회가 있기 전 혹시나 하는 심정에 이미 관련 귀족이나 영식, 영애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나였다.
한 번 기억하면 잊지 못하는 체질 덕에 그녀의 존재에 대한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귀족파가 득세할 때엔 후작가였으나, 그들의 반란 이후 공작가가 되면서 위세가 높아진 가문의 영애였다.
“영애가 여기 왜 있습니까?”
“아…… 저…… 그게…….”
수줍은 듯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에 나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할 말 없으면 들어가시지요.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합니다.”
그리 말하며 내가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조심스레 내 옷깃을 잡아 세우는 그녀의 행동에 내가 멈칫했다.
“저…… 왕자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말없이 유르바라 공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페르세르크 때문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제 심박수를 찾았고 얼굴이 차갑게 다시 식었다.
“이야기?”
“네. 왕자 저하.”
그녀는 수줍은 듯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 * *
데이비가 떠난 직후 페르세르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지 못한 채 한참동안 쿡쿡 웃어보였다.
세상에서 데이비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뿐이리라.
그 사실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데이비가 연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라는 사실을 이용할 경우 유일하게 이 방법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장난기가 생겨 그를 보낸 것은 단순 변덕이었지만…….
“흐읏…….”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주저앉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가슴을 꾸욱 누른 그녀가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지…… 미쳤어…….”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데이비와 같은 몇천 년 단위의 모태솔로가 아니던가.
살면서 이성에게 이토록 끌린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녀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귓불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는 와중에 혹여라도 자신의 얼굴을 누가 볼까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숨을 천천히 고르며 주체가 안 되게 미소가 지어지는 얼굴을 억지로 주무른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욱하는 바람에 데이비에게 역공을 가하긴 했지만, 역시 이 일은 한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이놈의 귀부인의 생태는 말이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도발에 걸려주어야 예의가 아니겠느냐.”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그녀의 손은 보이지 않게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