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4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다수의 영애들을 보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녀들이 있는 곳은 작은 연못 근처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외곽의 숲까진 어인 일들이십니까. 영애들.”
페르세르크가 느긋하게 연못의 근처를 거닐며 바라보자, 서로 눈치를 살피던 영애들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연이네요. 페르세르크 양이라고 하셨던가요? 저는 아사나 자작 영애라고 한답니다.”
“아사나 자작 영애. 만나서 반가워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온 영애들의 수는 총 5명이었다.
이사벨 남작 영애, 아사나 자작 영애, 아셀린 백작 영애, 키리나 후작 영애, 마지막으로 자신을 세실리라고 소개한 소녀였다.
“흐음.”
“왜 그러시죠? 페르세르크양?”
“거짓이라.”
금발소녀, 세실리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페르세르크는 티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랍니다. 제가 눈이 조금 특이해서요. 그런데, 영애분들께선 이 어두운 밤에 숲까지 무슨 일로…….”
그 질문에 한 영애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사실 이 근처에서 유르바라 공작영애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답니다.”
“어머, 그런가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못에 비친 달빛을 구경하며 담소나 나누지 않으시겠어요?”
영애들은 페르세르크가 답하기도 전에 상황을 진행시켰다.
그녀들은 마치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페르세르크를 데리고 이동하며 정원에 놓인 작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시녀들이 준비해준 차는 이게 전부지만, 이렇게 밤하늘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답니다.”
“사양 말고 들어주세요.”
그녀들은 익숙하다는 듯 준비된 차를 페르세르크에게 건네준 뒤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주제는 대개 하인스 영지에 관한 것, 그리고 데이비에 관한 것들이었다.
“실은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실제로 보니 소문과는 확실히 다른 분이시더라구요. 호호.”
“맞아요. 소문에는 엄청나게 무서운 분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그토록 잘생기시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분인 줄은 몰랐지 뭐예요.”
옅게 웃어 보이는 그들의 행동에 페르세르크는 쿡쿡 웃다가 저도 모르게 데이비와의 일화를 털어놓았다.
중요하진 않지만 그녀가 데이비와 있으면서 겪은 일화들을 이야기하자, 영애들의 얼굴에 황홀함이 어린다.
분위기는 제법 훈훈했다.
페르세르크는 데이비와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에 제법 흥미가 생겨 그 현상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영애들은 그런 페르세르크의 말을 들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변화 또한 한순간이었다.
“참, 여러분은 하인스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어머, 그럼요. 라운 왕국에서 현재 가장 좋은 아카데미를 꼽으라하면 역시 하인스 아카데미를 빼놓을 수 없지요. 수많은 귀족 영애분들과 영식분들이 그곳에 입학하고 싶어하시니까요.”
하인스 아카데미가 만들어진지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인식을 지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교수님들이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니까요. 검술에는 팔란 제국의 뛰어난 소드마스터분이, 신학에는 무려 전 성녀 후보이신 앨리스 대주교님이 계신다지요?”
“연금술 수업이나 마법학 수업도 그래요. 마탑에서 저명한 마법사분들이 파견을 나오셨고, 연금학파 또한 마찬가지이죠.”
“듣자하니 타국에서도 하인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왕족분들이나 귀족자제분들이 많다고 들었답니다.”
“정말, 왕국의 자랑거리네요. 호호호.”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답니다.”
그때였다.
한 영애가 불쑥 밀고 들어왔다.
“다르게 생각한다고요?”
“아직 하인스 아카데미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페르세르크양?”
“문제라……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정말 좋답니다. 시설설비, 하인스 영지 자체도 발전된 곳이지요. 최고의 교수님들까지. 하지만 딱 하나 물을 흐리는 게 있더군요. 바로…… 입학생들 말이지요.”
평민의 존재
그 말에 주변 분위기가 변했다.
“그토록 대단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게 하잘것없는 전쟁 고아들뿐이라니. 이전에 저희 오라버니께서 하인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셨을 때, 왕자님께서 귀족들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시더군요.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랍니다.”
“저…… 아사나 자작 영애…….”
이사벨 남작 영애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지만 다른 영애들은 아사나 자작 영애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페르세르크는 조용하게 입을 다무니 이사벨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어졌다.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꽃들은 아름다운 화병에 꽃아야 하는 법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전쟁 고아들은 그런 아름다운 화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답니다. 호호호.”
옅게 웃어 보이는 그 말에 페르세르크의 입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게 아닌 듯하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페르세르크양. 아름다운 화병에는 그에 걸맞은 꽃이 심어져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글쎄요.”
“각기 짝이라는 게 있지요. 하지만…… 듣자하니 페르세르크 양께서는 신분이 낮은 평민분이시라고…….”
“아무리 왕자님께서 소문과 다르게 온화한 분이라고 하시지만…….”
그녀들이 순식간에 입을 맞춰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페르세르크 양?”
상대에 대한 화법에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독설.
이건 엄밀히 말하자면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발을 보며 페르세르크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영애분들의 말씀은 데이비 왕자님의 곁에 평민인 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같네요.”
“어머나,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니랍니다.”
부채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 영애.
몇몇은 대놓고 비웃음을 던진다.
실제로 아사나 자작 영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본인도 알고 계신 듯하네요.”
“…….”
“페르세르크 양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얼마 전 유르바라 공작께서 폐하께 데이비 왕자님과의 혼담을 넣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것을 거절한 이유가 왕자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라던데.”
“솔직히 왕자님의 곁엔 그에 걸맞은 아름다움과 기품, 그리고 지위가 있는 영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와 왕자님은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이어지는 말을 짚어보면 내용은 간단했다.
건방진 평민 따위가. 넘볼 걸 넘봐라.
웃는 얼굴로 몰아붙이는 그들은 분명 다수였다.
유일하게 이사벨 남작 영애가 불안한 듯 시선을 돌리고 있지만, 나머지는 달랐다.
“그렇네요. 데이비 왕자님의 곁에는 그에 걸맞은 인물이 있어야 한다. 확실히…….”
말끝을 흐린 페르세르크가 침묵한 채 고개를 떨구자, 다른 영애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그걸 아신다면 지금이라도 스스로…….”
“데이비는 보통 인물은 아니니까요.”
데이비 왕자님에서 순식간에 평대로 바뀌자 영애들의 표정이 변했다.
“페르세르크양?”
“데이비가 귀족들을 왜 싫어하는지 알 것 같네요. 겁도 없이 데이비가 어떤 인간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조차 알려고 들지도 않은 것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묻도록 하지.”
존대에서 평대, 그리고 하대로 바뀌어버린 페르세르크의 말에 영애들의 표정이 굳는다.
“그대들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페…… 페르세르크양? 무슨 말을…….”
“그대들의 아비가 가진 직급은 자작, 백작, 후작, 공작. 가리지 않고 대단한 인물들이 많은 게야. 그럼 다시 묻겠네. 그대들의 직위는 무엇인가.”
페르세르크의 말에 아사나 자작 영애가 벌떡 일어났다.
“감히 천한 평민 따위가!!”
“감히 네 년의 앞에 있는 게 누구인줄 알고 그리 망언을 내뱉는 게야?!”
격한 외침 속에서 느긋하게 찻잔을 달그락 거리던 페르세르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입가에 슬쩍 비웃음이 서린다.
이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호가호위라는 것을 말이다.
“이 천박한 평민 계집이 얼굴이 좀 반반하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사나 영애가 벌떡 일어나 뜨거운 찻잔을 페르세르크에게 끼얹었다.
하지만 영애들이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
“꺅! 저게 무슨?!”
그녀가 흩뿌린 찻잔은 페르세르크에게 닿기도 전 허공에서 방울방울 져 멈춰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 기괴한 현상에 굳어버린 영애들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비웃음을 흘린 채 몸을 살짝 뒤로 넘기며 다리를 꼬았다.
“대답할 수 없겠지. 그대들은 귀족가의 자제일 뿐 실질적인 직위는 없으니까.”
“이…… 이 건방진 평민년이! 데이비 왕자님은 너 같은 건방진 평민 X년이 넘볼 분이 아니라는 말을 왜 이해하지 못해!”
“참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라 하였으나 이를 이해 못하는 군요!”
“흥, 역시 이래서 천박한 평민들이란…….”
당황한 얼굴을 최대한 숨기며 독설을 내뱉는 그녀들을 향해 페르세르크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데이비가 보이던, 상당히 사디스틱하던 미소와 흡사하다.
“네 년 같은 년은 내 아버님이 국정 회의에서 한마디만 하시면 곧바로 왕족, 귀족 능멸죄로 처형시킬 수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데이비 왕자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하는 이유 때문인 게야!”
“하! 그 음란한 몸뚱이를 이용해서 데이비 왕자 저하께 일러바치시기라도 하려는 걸까요? 그래본들 왕자 저하께서 여성들의 사교모임에 함부로 간섭하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오호호호!”
저들이 페르세르크를 매도하고 욕하는 건 귀족과 평민의 차이이기에 당연한 일이지만, 데이비가 지금 상황에 끼어드는 건 여성들의 사교모임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 불가능하다.
그것이 그들이 믿고 있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잘 몰랐다.
기혼과 비혼의 여인들이 왜 따로 사교활동을 하는지 말이다.
요지는 그러하다.
기혼 영애들에겐 사실 아직 아무런 직급이 없기에 이를 쓸모없다 판단한 귀부인들이 많기 때문이고,
반대로 비혼 영애들은 자신들을 외부의 세력에서 지켜가며 아군을 만들고 본인들의 위치를 만들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그래서 사교테이블을 나누는 기준이 나이가 아닌 기혼과 비혼으로 바뀐 것이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귀족영애는 귀족가의자제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며 귀족 영애들은 한 가지 착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저 자신들의 사교 테이블이 단순히 독립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못 배워먹은 평민 X년은 혼이 나야 해요!”
“맞아요! 감히 천한 평민이 고귀한 레이디들을 화나게 한 죄가 어떤 건지 보여줄 때로군요.”
“아…… 아사나 영애 잠시만요! 다들 너무 흥분하셨어요!”
“에잇! 이사벨 남작 영애! 아까부터 왜 이리 거슬리시나요! 비키세요!”
“꺅!”
아사나 영애의 선동에 다른 영애들이 페르세르크를 향해 다가온다.
좀 전 찻물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멈추는 기현상을 보긴 했지만, 단순한 방어 아티팩트라 여긴 듯 보였다.
그런 영애들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데이비가 오기 전에…….’
그때였다. 영애들이 있는 공간 전체에 살을 에는 듯한 차디찬 살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꺅!”
“꺼억…… 꺽.”
평생 곱게 자라온 영애들은 단순 투기도 받아내기 힘든데 유형화된 살기를 받아 낼까.
퍼렇게 질려버린 그들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잠시 붙잡고 있지도 못하다니…… 그런 주제에 누굴 유혹해보겠다고.”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불만을 터뜨린 페르세르크였다.
“독립 공간? 영애들이 보기에 내가 이런 것 하나 간섭 못 할 만큼 무능한 인간으로 보였나?”
“그…… 그건?!”
“그건 엄연한 폭거…….”
영애들을 향해 데이비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영애들이 권리라고 착각해서 계속되어온 호의를 다시 거둬가는 건 폭거가 아니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알더라.
단순히 이해와 호의였을 뿐.
뒤집을 각오로 덤벼들면 뼛조각도 남지 않는 게 전통이다.
물론, 다수의 귀족을 적으로 돌리는 행동인지라 보통의 경우엔 손해만 보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들지 않지만…….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 가만히 있던 페르세르크는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부딪쳤다.
짜악!!
동시에 옅은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영애들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져 내린다.
“본녀가 흥분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이래서 널 여기 안 데려오려고 한 거야.”
“그대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이 이상사태에 대해 좀 더 알아 볼 수 있었을 게야.”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타박했다.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철없이 자란 영애들이라지만 방금 행동은…….”
너무 충동적이고 과했다.
“조금 과했다고? 착각하지 마. 애들이라는 것들은 자기 직위만 믿고 제제가 사라지면, 끝도 없이 잔인해지는 놈들이니까.”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애들이 어른보다 무섭다.
“네가 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련히 그대가 지켜주었겠지. 그런 상황이면 본녀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게야. 까짓것 뜨거운 찻물 좀 뒤집어쓰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데이비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옅게 웃어보였다.
“명백한 이상행동이야. 데이비.”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데.”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마약을 들이키는 게 이 사교회라는 걸 잊지 마 데이비. 특히 제제가 부족한 이런 어린 영애들의 모임이라면 더더욱.”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찻잔을 들어 살짝 음미한 뒤 그대로 풀밭에 흩뿌렸다.
그러자 기묘한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봐. 뭘 타놨지. 약초를 통해 생물학적으로 특정 감정을 증폭시키는 마약은 마나로 잘 걸리지 않아. 이 영애들 중 단 한명만이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녀가 뚱한 얼굴로 데이비를 노려보았다.
“눈치 없기는 쯧. 그 유르바라 공작 영애는 어디서 뭘 하는 게야. 그대를 잡아두지도 못하고.”
페르세르크의 투덜거림에 데이비는 헛웃음만 흘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정공법으로 끄집어내는 수밖에.”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기절한 영애들 중 유일하게 이성을 가지고 있던 이사벨 남작 영애의 곁으로 간 뒤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순간 마기가 일어나 그녀의 몸 안에 스며들며 이사벨의 눈이 부릅뜨여졌다.
“흐읍?!”
“쉬잇.”
이후 페르세르크가 남녀 관계없이 황홀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