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7화
세실리 영애는 그 자리에서 마나 구속구로 포박되어 왕성 지하감옥 최하층에 봉인되듯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수작질에 이용된 영애들은 이 일의 추가조사를 위해 왕궁의 외탑에 감금되었다.
그녀들의 부모인 유르바라 공작을 필두로 한 귀족들은 제 딸이 사실 무고했음을 알게 되었지만 마치 완전히 남이 된 것처럼 그녀들을 구원해주지 않았다.
그만큼.
달맞이 꿀이 가져온 여파가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말씀해주셔도 괜찮을 듯합니다만.”
내 말에 크리아네스 국왕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문질렀다.
그리고는 바리스에게 말했다.
“바리스, 말해주거라. 이번 일로 데이비와 새아가가 표적이 되었으니 그에 대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의 말에 바리스가 나와 내 옆에 곱게 앉아있는 페르세르크를 슬쩍 바라보았다.
다만 페르세르크와 시선을 마주친 바리스가 움찔거리더니 시선을 회피한다.
부끄러워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페르세르크가 미소를 짓자 바리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바리스가 안경을 벗으며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달맞이 꿀은 마약이죠.”
“그건 들어서 알아. 그것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거잖아. 다만 내가 궁금한 건 취급이 단순 마약은 아닌 것 같은데.”
금지 마약은 말 그대로 금지항목으로써 그것을 유출 유입 판매하는 건 엄벌로 다스린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마약도 이렇게까지 거친 판단이 내려지는 마약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악랄하기로 소문난 왈패조직도 혀를 내두를 만큼 제조방식이 끔찍하니까요. 알고 있어도 그걸 언급하는 이나 그걸 만드는 이는 사실상 지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리스가 드물게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달맞이 꿀의 원료는 마약성 식물이 전부가 아니에요.”
“전부가 아니라고?”
“어린아이. 그것도 5살에서 11살 정도 된 여자아이들이 원료지요.”
사람으로 만든 약이라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간다.
“과거 이 마약을 제조해 몰래 팔던 국가를 제국이 하루아침에 불바다로 만든 적이 있기에 이 마약을 언급하는 건 거의 드뭅니다. 최근에 와서는 노령의 귀족들을 제외한 신흥귀족들은 모르는 편이죠.”
“단순히 귀족 몇 명과 싸잡아서 나를 물 먹이려던 게 아니라. 라운왕국 전체를 뭉개버릴 생각이었구만.”
물론, 내가 있는 이상 무력제압은 불가능할 테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명분을 잃게 된다.
세상을 흔드는 힘 일부를 내놓는 꼴이었다. 어느 쪽이건 이득은 없다.
“아이들이라…….”
“잔인한 약입니다. 5살에서 11살 된 여자아이를 납치한 뒤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먹을 것과 물을 최소한으로만 준 채 6개월 동안 구타와 학대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지쳐 잠들거나 기절했을 땐 그 아이들에게 극도의 악몽을 꾸게 하지요.”
서서히 미쳐가는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끔찍한 학대의 흔적과 공포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벼랑 끝까지 내몰린 아이들이 죽기 직전에 구원 줄을 내리는 겁니다.”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맞으며 학대를 당한 아이들이다.
바리스가 이를 악물고 침묵하자 크리아네스 국왕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런 아이들을 마약의 근원이 되는 시험관에 맛있는 음식과 따스한 옷을 놔두고 유인하는 것이다. 아이는 그대로 시험관 속으로 들어갈 테고, 그렇게 아이가 들어가면 뚜껑을 덮은 뒤……”
“덮은 뒤에…… 또 뭔가 하는 겁니까?”
“약한 불에 달군다. 서서히, 서서히 익어가면서 죽도록.”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남은 아이들이, 그 뜨거운 시험관 속에서 서서히 타죽는 것이다.
과거 놋쇠 황소라는 끔찍한 사형 도구가 떠오른 내 인상이 찌푸려진다.
페르세르크도 보이지 않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쳐 죽일……”
“음?”
방금 뭐라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바리스의 설명을 듣던 나는 문득 이 마약의 제조방식이 내가 아는 어떤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매와 비슷하네.”
“염매요?”
바리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지독한 저주야. 아이를 이용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단순히 제작과정만 악랄한 것 같진 않은데?“
“그렇죠. 달맞이 꿀은 그것도 그렇지만 복용 후 서서히 효과가 드러나죠. 그 어떤 마약보다 압도적으로 달콤한 환상을 보게 해주고 기분을 좋게 해줍니다. 실로 마약 중엔 최상위 마약이죠.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달맞이 꿀을 복용한 이는 서서히 광화되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힘이 강해진다.
“마나 증폭, 육체 능력 강화. 여러 가지 도핑능력도 있지만, 종래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래서 악귀가 되게 만들지요.”
악귀라…….
그 후폭풍이 강하다면 그녀들을 그냥 훈방하는 것도 웃긴 일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볼티즈 왕국소속이라는 걸 숨기려 했을 거다. 네가 볼티즈 왕국에 항의한다 한들 그들은 모른 척 잡아뗄 테지.”
“일반적으론 그렇지요.”
내 말에 바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형님, 설마……”
“폐하. 이 일로 볼티즈 왕국과 협상을 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데이비.”
“폐하.”
“이 일은 그리 가볍지 않을 수도 있다. 증거가 없어. 그들이 잡아떼면 이건 순 억지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괜찮습니다, 폐하.”
담담하게 말한 내가 씨익 웃어 보였다.
“성국도 그렇게 버티다가 다 내줬으니까요.”
내 말에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는 두 사람이었다.
“저는 계승권을 포기한 왕자입니다. 그러니 간청드리겠습니다. 폐하. 제게 교섭권을 주십시오.”
“……자칫하면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유념하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이 숨겨둔 작은 패를 바리스에게 내밀었다.
“국왕의 인장이다. 왕태자인 바리스를 통해 권한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마. 허나, 넌 계승권을 포기한 왕족이다. 그러니 절대 규정을 넘는 월권행위를 해선 안 될 것이다.”
“명심하지요. 허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곧바로 떠날 생각이더냐?”
“아뇨, 이미 볼티즈 왕국에 항의서를 보냈습니다. 그래도 한번 경고는 해야 할 테니까요. 답신은 곧 올 테지만 지금은 달맞이 꿀이라는 그 개 같은 약을 복용한 영애들 상태를 한번 보고 갈까 합니다.”
“형님?”
의외의 답변에 바리스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바리스, 나는 왕자이지만 일단은 맹세를 한 의원이다.”
때려죽일 놈이라도 환자라면 치유 후에 패 죽이는 게 내 신조다.
이전 뱀파이어와의 전쟁에서 좀비화 바이러스를 퍼뜨린 전례가 있지만 그건 병과는 조금 다른 저주에 가깝다.
“그럼, 폐하. 신은 물러가겠습니다.”
“끝까지 아바마마라곤 해주지 않는구나.”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 뒤를 따라 바리스가 걸어 나오자 페르세르크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아가.”
그때였다.
크리아네스 국왕이 떠나려던 페르세르크를 불러세웠다.
“예, 폐하.”
“잠시, 짐과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느냐.”
그 물음에 페르세르크는 잠시 나를 보는 듯하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폐하.”
* * *
볼티즈 왕국에 귀살대라는 건 없다.
아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럼에도 페르세르크가 그 이름을 언급한 것은 세실리 영애라는 탈을 쓰고 있던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본 결과이리라.
제법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그극…… 그그그극……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라도 한 것일까. 손목에 채워진 철제 구속구로 벽면을 벅벅 긁고 있는 영애들의 모습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는 꼴이었다.
그녀들도 달맞이 꿀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들은 듯 보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비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벌을 받은 겁니다.”
“아무리 벌을 받아도 이건 도리가 어긋난 거야.”
“흠……”
내 말에 바리스가 신음했다.
“형님. 이전에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시비를 걸어서 대머리로 만들어버린 귀족들……”
“어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문 열어.”
“헛! 왕자 저하!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폐하의 엄명이……”
“문, 열라고.”
내 말에 문을 지키던 근위병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아시면 진노를 사실 수도 있습니다. 부디 빠른 시간에……”
“폐하께 윤허를 받고 온 거니 걱정 마.”
“아. 그렇다면.”
깔끔하게 물러나는 위병을 뒤로한 채 들어서자 흑발의 소녀가 멍하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
그녀는 페르세르크와 함께 있으면서 달맞이 꿀을 복용하지 않았지만 검진해본 결과 그녀는 그 전에 이미 한차례 세실리 영애의 탈을 쓴 볼티즈의 간자의 농간에 넘어가 마약을 복용한 바 있는 모양이었다.
멍한 얼굴로 나를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벽면만 벅벅 긁어대는 그 모습에 바리스가 짧게 혀를 찼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는 그래도 왕국 내에서 제법 혼담이 많이 오가던 영애였을진대 이리 망가질 줄 몰랐군요.”
그의 말에 나는 거침없이 다가가 그녀의 턱을 잡아들었다.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과 슬픔, 그리고 절망만이 가득했다.
단순히 마약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수밖에.
제 아비에게서 버림받았으니 어떤 이가 멀쩡할까.
그녀를 거칠게 잡은 뒤 눈을 잡아 살짝 벌린 뒤 라이트를 비춘 나는 그녀의 멍한 동공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영애, 침대에 누워보세요.”
담담한 내 말에 그녀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몸을 뉘었다.
이후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드레스 중 배 부분에 검기를 일으켜 베어냈다.
“혀, 형님?!”
누가 보면 겁간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바리스가 외쳤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마나를 일으켜 그녀의 복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좀 독하네.”
그녀의 몸 안에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마나로는 밀려나질 않는다.
보통 어지간한 마약의 흔적도 주기적으로 치료하면 완치할 수 있다.
하지만 달맞이 꿀은 조금 달랐다. 끈적끈적하고 질기게 전신에 퍼져있었다.
광화한다. 육체의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나 순식간에 미치고 뒤틀린다.
끔찍한 마약이다.
“독도 저주도 아니고, 이걸 만든 놈은 뭐하는 놈이야.”
악랄한 놈 같으니.
“형님도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미 흑백사병이나 융해 가속바이러스 같은 질병을 몇 차례 치료한 바 있는 내가 혀를 내두르자 바리스가 씁쓸한 듯 물어왔다.
“당장은 방법이 없겠네. 채혈을 조금 해서 알아보는 수밖에. 그래도 복용량이 적어서 당장 광화하진 않는 게 다행이겠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만…… 두세요.”
그녀의 입에서 체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두라?”
“죽게, 죽게 내버려두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이 아가씨가 제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네.”
“제게 남은 게 뭐가 있죠?”
“뭐?”
“가문에도 버림받고 나라에서도 죄인이 되었어요. 왕자님도 저를 버리셨잖아요?”
“……”
“제게 남은 게 뭐가 있죠? 이대로 살 바에…… 차라리 죽고 싶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결국 흐느끼기 시작하자 나는 작은 바늘을 그녀의 팔에 살짝 찔러 피를 뽑아낸 뒤 말했다.
“남는 게 왜 없어.”
“……”
눈물이 방울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목숨이 남잖아.”
내 말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눈동자 속에 서린 감정은 의문이었다.
“형님. 저 영애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갈 곳을 잃었으니까요.”
“그럼 왕성에 취직시키는 건 어때.”
“네?”
“일손, 부족한 거 아니야?”
내 말에 바리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 그게 말처럼 쉽게…….”
“이 형한테 거짓말 치다 걸리면……”
“예 손모가지 날아가지요.”
“자리 있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몇 개월.
나는 왕성을 돌아다니며 이미 이 왕성에 고인 부분들을 봐왔다.
“기존 기득권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텐데요.”
“그걸 해결해봐.”
나름대로 숙제를 제공해주자 바리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만 해주세요, 그럼.”
“그래.”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바리스르 이끌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콘타스 제국에서 대제가 내가 부탁한 것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은 당장 할 것이 없다. 라스트위스프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일루미나티를 조사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왕태자 저하, 아, 데이비 왕자 저하께서도 계셨군요.”
비대한 덩치를 지니고 땀을 뻘뻘 흘리는 귀족 하나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
“원마우스 외교관 아니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게…… 볼티즈 왕국에서 답신이 왔습니다만…….”
그가 조용히 종이를 받아들고 읽어내려간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격노가 어렸다.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새끼들이…….”
“저, 저하! 말씀을 조금 더 순화하셔서…….”
당황한 원마우스 외교관의 말에 바리스가 내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형님. 이 새끼들 아주 배 째라 모드인데요?”
서류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귀살대 같은 건 볼티즈 왕국에 없으며, 외려 이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는 라운왕국의 도덕심이 의심되는 행각에 격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안을 가지고 국제연합에 항의할 것이며. 이번에 라운왕국에서 연합이 금지하고 있는 약물이 유통된 흔적을 제시하겠다는 경고장이었다.
“뭐야, 그러니까 조용히 넘어가고 싶으면……”
“말 2000필, 밀 80수레 그리고 강철 30수레를 내놓으라 이겁니다. 이 자식들 어떤 경로로든 증거가 없으니 자신들이 유리한 걸 알고 있어요. 게다가 달맞이 꿀이 볼티즈 왕국에서 왔다는 증거도 없이 라운왕국 내에서 나돌았으니…….”
국제연합에 알리면 이건 라운왕국이 독박을 쓰는 흐름이다.
“좋네.”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거 잘 간직하고, 따라와.”
“혀, 형님? 어디 가시려고.”
“외교관으로서 협상하러 가야지.”
그렇게 말한 내가 한 손을 귀에 덮었다.
“나야, 지금부터 상도덕도 없는 개자식들하고 협상하러 갈 테니, 전부 연장 챙겨.”
놈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국지 도발을 한 시점에서 그건 전쟁을 해보겠다 강짜를 부린 것과 같다.
“하인스 영지, 아니 라운왕국은 테러리스트 놈들과 길게 협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