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8화
“이, 이를 어찌합니까!”
당황한 볼티즈 왕국의 국왕은 눈앞에 앉아있는 청년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그놈이 알아챘습니다! 귀살대는 왕국 최고 기밀요소로 절대 알려질 리가 없는데…….”
“흐음…… 아무래도 데이비 왕자에게 무언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 보입니다.”
“허, 허면!”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이렇게 강수를 부리면 라운왕국 왕실에서도 한발 물러나 냉정하게 눈치를 살필 겁니다. 데이비 왕자만 없으면 라운왕국은 어차피 볼티즈 왕국에 미치지 못하는 소국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데이비 올 라운 그놈이 있지요!”
“그래 봐야 일개 인간입니다. 전 대륙을 적으로 돌리는 그런 무식한 행각을 할 리 없어요.”
청년, 일루미나티의 총수의 말에 볼티즈 왕국의 국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불안한 듯 볼티즈 국왕이 중얼거렸다.
“그놈이 정말로 강짜를 부리고 이 나라에 행패를 부린다면……”
“애초에 전쟁금지법이 있어서 전쟁을 벌이진 못합니다. 설사 전쟁을 불사한다 해도 상관없지요, 그때엔 그것을 빌려드리지요.”
“아, 그것을 말입니까.”
“이미 어느 정도는 완성되어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자가 아무리 잘나도 저희가 가진 힘에 저항하진 못할 겁니다.”
“흐음……”
“어차피 그가 존재하는 한 볼티즈 왕국은 계속해서 라운왕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혹여라도 제국이 간섭할지도……”
“그건 걱정 마세요. 제국에 있는 저희 일원들이 그것을 막아줄 터이니.”
“알겠습니다.”
국왕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청년은 곧 그에게서 등을 돌린 뒤 걸어나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잘못되면 버려도 그만인 패라서 말입니다.”
물론, 그의 중얼거림을 볼티즈 왕국의 국왕은 듣지 못했다.
* * *
볼티즈 왕국.
그곳은 예전의 악연이 한 차례 겹친 국가다.
과거 펠리스티 공국에서 볼티즈 왕국의 7왕자와 한차례 충돌을 하지 않았던가.
리네스 왕비의 측근이었던 뱀파이어, 샤리의 손에 감염된 볼티즈 왕자는 바리스와의 경기에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고, 바리스와 윈리를 포함한 그곳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게 했다.
이후 이 일이 정식적으로 대두되며 지탄을 받은 볼티즈 왕국은 크나큰 배상을 하고 국고가 휘청였다 정도로 알 수 있다.
“그래. 뭐, 볼티즈 왕국에 가는 건 좋은데.”
내 중얼거림에 바리스가 쓰게 웃어 보였다.
“펠리스티 공국의 공녀께선 무슨 용무이신지.”
바리스의 곁에 착 달라붙어 헤실거리는 소녀의 모습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곧 바리스 왕자님과 혼약할 사이니까요. 비공식적이지만 왕자님의 약혼자랍니다.”
“아…… 예.”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다.
이런 여인은 참 상대가 번거로운 게 흠이다.
듣자 하니 바리스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는데 그 이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바리스 왕자님이요? 음, 귀엽지 않아요?]
바리스는 물 만난 고기마냥 쑥쑥 크고 있어서 체격이 마냥 작다고 할 순 없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마부석에 앉아 발을 통통 튕기며 하품과 함께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는 륀느가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 예전처럼 잠들어있는 페르세르크도 보였다.
바리스의 곁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끈적끈적한 공기가 싫다고 튀어버린 둘이다.
나도 벗어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일단은 위치가 위치인지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꼴이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는 감사인사도 못 드렸네요.”
바리스에게 헤픈 웃음을 지어주던 펠리스티 공국의 공녀가 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그때, 저희 공국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왕자님께서 성자로 각성하시면서 그 영역 일대를 성역으로 바꿔주신 덕분에 공국의 지기가 몰라보게 좋아졌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비록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말씀이라도 정말 감사하다 전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맑은 웃음에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걸로 계산하시죠.”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동그라미를 보여주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는다.
“아하하…… 제가 재정 관련에 권한은 없어서……”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를 보니 어딜 내어놔도 살림은 잘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가까워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리슨은 둘째치고 공녀는 바리스에게 푹 빠져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저 정도로 야무지게 살아가는 공녀라면 바리스의 곁에서 녀석의 힘이 많이 되어주리라.
“고, 공녀, 형님께서 쳐다보시지 않습니까. 조금 떨어져 주시는 게……”
“어머나. 왕자님께선 제가 벌써 질리신 건가요……. 흑…… 흐흑.”
“끄응.”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픽 웃어 보였다.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그것도 볼티즈 왕국에 입성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달그닥거리는 마차의 말발굽 소리만 짙게 들려온다.
* * *
볼티즈 왕국의 분위기는 내가 들었던 것보다 나빠 보였다.
왕성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앉아 고통받는 평민들이 가득했다.
문을 닫은 노점도 다수 보이고 분위기도 심상찮다.
상태가 곱게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형님 탓이 아닙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바리스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볼티즈 왕국의 왕자가 죽은 뒤로 한 차례 왕국 내의 경쟁구도가 흔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 왕과 그 왕을 따르는 귀족 가신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이유 모를 증세가 늘었지요. 평민들은 다량의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먹고 살 식량도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최근 볼티즈 왕국에 지독한 가뭄이 든 것도 한몫하겠네요.”
“가뭄이 들어?”
곧바로 창문을 열어 하늘을 바라본다.
지독하게 마른 공기가 뺨을 스치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상한데. 바람의 흐름을 보면 가뭄은 말이 안 되는데.
성국 쪽에는 커다란 라트마 산맥이 존재한다.
라트마 산맥의 넓은 면을 타고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곤 하는데, 주로 그곳에서 끌어올려진 물이 서쪽으로 향하며 쏟아지곤 한다.
만약 가뭄이 들었다면 볼티즈 왕국의 옆면, 즉 성국의 일부에도 가뭄의 흔적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현재 동부대륙에 가뭄이 온 곳은 없는 거로 아는데.”
“그게 이상한 거죠.”
가뭄도 있고, 갑자기 증세가 일어났다.
말없이 하늘을 보던 나는 짧게 혀를 찼다.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쿵!!
거대한 왕성의 문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병사들이 병장기를 세우고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일렬로 서있는 게 보였다.
단순히 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 의미를 알 수 있다.
무력시위.
제법 귀여운 놈들이로다.
“데이비님. 볼티즈 왕성에 도달했다고 보고해.”
륀느의 말에 나는 마나를 살짝 일으켜 좌표를 찍은 뒤 륀느에게 큐브 몇 개를 건네주었다.
“명령하면 움직여.”
“명령인수.”
륀느가 맹한 얼굴로 경례 포즈를 취하자 나는 녀석의 뺨을 가볍게 꼬집은 뒤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반갑습니다. 라운왕국 1왕자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오신다는 전갈은 미리 받았습니다만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하셔서 준비가 미흡하옵니다. 부디 용서를.”
“신경 쓰지 마시죠. 자잘한 걸 보러 온 게 아니니.”
내 말에 마중을 위해 나온 관리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다시 미소로 표정을 감추었다.
“우선 귀빈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여독이 쌓이셨을 텐데.”
“그건 나중에 하지요. 피차 좋은 일로 온 게 아니니.”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또 한차례 꿈틀거린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시간 벌려는 수작이 훤히 보이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구했다.
“볼티즈 왕국의 국왕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 고해주시지요.”
“으음……. 폐하께서 국정을 다루시느라 지치신 탓에……”
“단순히 신하들의 불찰이라 봐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좋은 말 할 때 아뢔주세요.”
빙그레 웃으며 살기를 흘리자 그가 움찔하더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발 두발 물러났다.
“자,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볼티즈 왕국과는 어떤 의미에서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애초에 라운왕국은 과거부터 볼티즈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특히 볼티즈 왕국은 전쟁금지협약이 맺어지기 전부터 라운왕국과 툭하면 싸움을 일삼았던 왕국이기도 했다.
전생으로 치면 중국과 한국, 혹은 일본과 한국의 느낌과 비슷한 정도.
대신의 안내를 받아 으리으리한 왕궁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내 나와 바리스는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 도열하고 있는 병사나 기사들의 환대를 받았다.
창!!
손에 쥔 핼버드가 부서질 정도로 절도있게 자세를 취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어지간하면 기가 질릴 법도 했지만 나는 그런 그들의 노력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폐하! 라운왕국에서 바리스 올 라운 왕태자, 그리고 데이비 올 라운왕자가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리자 나는 바리스에게 조용히 말했다.
“협상 권한은 내게 있지만, 발언은 네가 하는 거야.”
“제가요?”
“그래. 바리스, 형 믿지?”
“제가 형님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까요,”
“그래. 어디 이 개수작 부린 새끼들 탈탈 털어보자고. 당당하게 들어가. 넌 내 자랑스러운 동생이다.”
내 미소에 바리스도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볼티즈 왕국의 태양께 영광이 있기를.”
“어서 오라.”
거만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는 국왕의 모습에 바리스가 천천히 맞은편 테이블에 자리해 앉았다.
국왕은 상당히 초로 해 보이는 인상의 노인이었다.
오랜 시간 볼티즈 왕국을 집권해온 왕이지만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날카롭다기보단 부리부리한 눈매였다.
아마 최근 있었던 악재들이 겹치고 겹쳐 지친 것이리라.
정확히 평가하자면 사실 그에게서 제대로 된 위압감은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반대로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비릿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바리스 올 라운 왕태자. 그리고, 대륙의 성자, 데이비 올 라운왕자.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볼티즈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지.”
그의 말에 바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헌데……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벌써 짐을 만나러 올 줄 몰랐군.”
“그리 시간을 끌 사안도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한 바리스는 내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왔다.
애초에 협상은 내가 하지만 말은 바리스를 통해서 한다.
이건 단순히 바리스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내가 없는 경우를 노릴 때도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타국에 알리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바리스와 나 사이에 쓸데없는 이간질이 의미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 말이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전해주자 바리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잠시 어렸다.
하지만 곧 자신감을 가졌는지 믿음이 가득한 눈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라운왕국에서 보낸 서신을 받았네. 유감스러운 일이로군.”
“그렇지요. 볼티즈 왕국에서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고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흐음…… 짐은 그런 선물을 보낸 적이 없네만.”
“그래서 라운왕국에서 보답을 할까 합니다.”
바리스의 말에 국왕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보답이 그냥 보답이 아닌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피차 복잡한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라운왕국은 볼티즈 국왕폐하의 진심 어린 사과와 이번 일에 대한 원인 규명, 그리고 귀살대에 대한 사실을 공표하길 바랍니다.”
바리스의 말에 국왕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예의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뒤에 있는 왕자를 너무 믿는 것인가. 앞뒤가 없군, 왕태자.”
그의 말에 바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폐하의 진심 어린 사과와 이번 일에 대한원인규명 및 귀살대의 공표, 그리고, 볼티즈 왕국의 실질적인 배상으로 말 200필을 요구합니다.”
바리스의 말에 국왕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동시에 국왕의 곁에 앉아있던 왕자가 싸늘하게 바리스를 쏘아보았다.
“바리스 올 라운 왕태자. 다짜고짜 찾아와서 말 같지도 않은 요구사항을 늘이다니 제정신이오? 우리가 그것을……”
“폐하의 진정 어린 사과와 이번 일의 진상규명, 그리고 귀살대의 모든 신변을 라운왕국으로 양도하시고 말 200필 밀 80수레를 요구합니다.”
“이보시오 바리스 왕자!!”
볼티즈 왕자의 격노에 바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걸로 넘어가 드리는 겁니다. 부족하십니까?”
바리스의 중얼거림에 볼티즈 국왕이 쓴 한숨을 내쉬며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과거라면 바리스는 한 왕국의 왕을 상대로 이토록 강하게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리네스 왕비의 수작에 살해당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 이 모욕을 짐이 어떻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볼티즈 국왕의 노기 서린 말에 바리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바리스에게는 이미 내 의견을 모두 전했다. 바리스는 이 상황이 그리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협상용 4딸라가 어떤 건지 보여주마.
“국왕 폐하께서 직접 라운왕국으로 출두하시어 라운왕국의 국왕 폐하께 진정 어린 사과를 하시고 이번 일의 모든 진상을 규명하여 세상에 공표, 말 200필과 밀 80수레. 그리고 철광석 5수레를 요구합니다.”
창!!! 창창!!!
더는 듣다 못 한 왕자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며 소리 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인가!!”
“검을 뽑아 드셨습니까?”
“말 같지도 않은 누명을 씌워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게 국가의 도덕인가!? 라운왕국 국왕의 의지인가!”
왕자가 하는 말치고는 오만하기 그지없다.
“라운왕국은 볼티즈 왕국의 속국이 아닙니다. 말씀 가려 하시는 게 좋을듯합니다. 왕자께서 뭐 잘난 게 있으시다고 폐하를 그리 낮춰 부르시는지……”
“네놈!!”
“겁이 없으신 건 보기 좋네요. 좋습니다. 그것도 싫다면 요구사항을 재조정하지요.”
담담하게 말한 바리스가 눈을 감았다.
-잘하고 있다, 바리스. 쫄지 마. 협상은 배짱이야.
전음을 통해 바리스를 격려하자 바리스가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눈을 뜨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출두하시어 라운왕국의 국왕 폐하께 머리를 숙여 진심 어린 사과를 하시고, 볼티즈 왕국의 남부 곡창 지대플 포함한 6개의 영지를 라운왕국에 양도하시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바리스는 뻔뻔하게 계속해서 요구량을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