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1화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몸이 전부다.
처음엔 들려오던 옅은 목소리도 이제는 완전히 들리지 않게 변해버렸다.
공격 자체는 강력했지만 워낙에 주변에 깔린 안개의 영향이 강한 탓에 실질적으로 놈을 한 방에 보내버리는 건 불가했다.
‘염병, 초월마법 계통은 전부 디스펠이 안 먹히는데.’
페르세르크의 존재도 사라진 탓에 어디다 대고 의견을 교환할 이도 없었다.
“쿨럭…… 쿨럭쿨럭!”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놈의 목소리뿐이었다.
블랙미스트는 기본적으로 초 광범위 마법이다.
그 범위는 작게는 수 미터에서 크게는 수 킬로미터까지 퍼져나가는 힘으로 지독한 난전이 벌어지던 전쟁을 강제로 멈추기 위해 그녀가 사용한 마법이었다.
기본적으로 데스로드의 초월마법은 그녀 이외에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 이외에 디스펠을 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없다.
그녀가 만든 마법은 그만큼 초월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내가 궁금한 점은 그 점이었다.
콱!!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과는 정반대 쪽을 향해 바라보며 손을 뻗은 나는 나머지 한 손에 청단이를 불러 그대로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청단이의 푸른 검신이 푸른빛을 띠며 검은 안개의 일부를 잘라냈다.
“호오. 이건 먹히네.”
내가 이런 마법을 사용해 볼 일이 있어야 판단을 하지.
청단이의 힘이 예전보다 더 강해졌으니 잠깐이라도 효과를 보는 것일 터다.
나는 벽면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모르나 디센트라는 호칭을 지니고 있다.
“정말, 괴물 같은 자로군요…….”
그는 자신이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 가장 황당한 모양이었다.
“이 안개 안에선 시전자인 저를 제외하고 모두가 격리될 텐데. 어떻게 저를 찾아낸 겁니까.”
“한 번 당해보고 원리도 알면 약점도 알지.”
물론, 그걸 실행에 옮기려면 심검 이상급의 경지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회랑에서 열렸던 자존심 싸움. 영웅들의 그 난투 속에서 홀로 참가하지 않고 있던 로 아이아스가 내게 피해가 올까 펼쳤던 마법이었다.
그 후 심검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까지 그녀의 마법을 수차례나 헤맨 경험도 없잖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가 내게서 물러났다.
“당신은 마치 데스로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또 이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
“그렇습니다. 당신은 데스로드를 모릅니다. 알아서도 안 되고, 감히 알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가 품 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다만 당신의 발언은 제법 흥미롭군요. 여기서 제게 모두 말해주셔야겠습니다.”
개소리는 수준급이로구나.
다만 그가 그렇게 큰소리칠 만큼 대단한 물건을 들이민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갑옷의 기사가 절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겉보기엔 단순한 다크나이트지만 뭔가 내부에 위험한 것이 뒤틀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데스로드께서는 생전에 모든 인간을 위한 거대한 대업을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분의 그런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저하기만 했죠.”
스르릉…….
촤악!!
그 말과 동시에 검을 뽑은 기사의 검은빛으로 만들어진 광검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내 뺨에 옅은 실선이 생겨났다.
호신강기에, 기본적으로 깔린 마나실드가 모조리 찢겨져 나갔다.
“우리는 데스로드의 의지를 이어받아 세상을 순수한 초기로 되돌릴 겁니다. 욕망과 죄악으로 뒤덮인 지금의 인류를 치료할 거란 말이지요.”
단순한 금속이 아닌 빛으로 만들어진 검을 내게 겨누며 그가 말을 이어 나간다.
“이 기사는 데스로드의 손으로 직접 만든 다크나이트. 데스로드의 유적에서 어렵게 발견한 존재입니다. 본래엔 데스로드를 지키는 충복이었지만, 이제는 저를 지키도록 되어 있지요. 설사 당신이 강하다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이곳에서 이런 강한 존재를 상대로 살아남을 순 없을 겁니다.”
그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확실히 좀 전 청단이의 힘을 응축시켜 한 번에 터뜨리면서 만들어낸 이 거대한 검은 안개의 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리라.
디스펠이 되지 않는 영역에서, 검선급의 힘을 발휘하는 기사와 마냥 싸우는 것은 아주 죽여 달라고 발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나라도 출력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하니 말이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그는 여유로운 기색을 되찾았다.
서걱!!
동시에 섬뜩한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앙!!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쳐내지만 제대로 감각이 남아 있지 않아 만족스러운 방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촤악!
그 좋은 예로 내 팔에 작은 자상이 생겨난다.
“…….”
따끔거리는 상처에는 흑광검이 만들어낸 잔상이 남아 내 육신을 갉아먹으려 들고 있었다.
[조금 전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가급적이면 비명을 질러 주십시오.]
디센트의 목소리는 안개가 다시 짙게 깔리며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동시에 감각이 다시 엉망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 강한 힘을 지닌 게 아닌 디센트는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데 이 다크나이트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치 허깨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역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그 모습에 나는 계속해서 피하기만을 반복했다.
유일하게 감지 가능한 것은 그의 살기.
본래대로라면 살기는커녕 촉각조차 엉망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블랙미스트 마법이지만 그는 데스로드가 전개한 블랙미스트처럼 완벽한 마법을 구사하진 못했다.
카앙!! 캉!!
오로지 본능과 날카로운 살기를 감지해내는 것으로 반격을 가하던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마법은 오로지 로 아이아스만 사용할 수 있다. 고위 서클 마법사도 아닌 그가 이런 힘을 발현한다는 건 아마 그가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보여주었던 기괴한 물건이 그 이유이리라.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복잡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카앙!!
촤악!!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는지 손등에 큰 자상이 생겨난다.
대체 페르리사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마냥 생각하고 있기엔 상대도 보통 위험한 게 아니었다.
‘우선은 이 거슬리는 안개부터 어떻게 처리하자.’
블랙미스트는 단순히 쓰고 싶다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야 한다.
아마 디센트는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쯤 되니 왜 왕성 수도에 극도로 정령 에너지가 희박했는지 알 것 같았다.
블랙미스트 마법은 균형이 뒤틀린 초월계통 마법.
그렇기에 가장 조화로운 에너지인 정령에너지와 상극의 마법이다.
정령에너지가 풍부해지면 그만큼 마법의 발현이 어려워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상 이변을 일으켜 그 균형을 깨뜨리고 정령의 힘을 약화시킨 게 분명했다.
머리 좋은 새끼.
스르릉…….
카아앙!!
묵직한 힘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탓에 육신이 부웅 떠서 쭈욱 밀려난다.
페르세르크나 바리스도 이 안개에 휘말렸을 텐데.
아직까지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디센트는 자신의 힘과 이 상황에 굉장히 자신감이 넘친다.
그렇다면.
기회는 단 한번.
[한 번 활성화된 블랙미스트 마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멈출 수 없습니다.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웃기고 자빠졌네.”
[당신은 아직 모르는군요! 허면 어디 한번 이 마법을 파훼해 보시지요!]
그는 절대 내가 마법을 파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쪽은 감사할 수밖에.
청단이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분명 놈의 마법은 로 아이아스의 블랙미스터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파고들 틈이 있다.
청단이를 빠르고 부드럽게 납도한 뒤 남은 손에 홍단이를 검집째로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두 자루의 검을 허공으로 던진 뒤 양손을 부딪히듯 끌어모았다.
디센트가 만든 이 불완전한 마법인 블랙미스트의 약점은 단 하나.
이 마법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약점이지만 내겐 분명히 보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나와라, 방화광.
내 의지에 부응하듯 전신으로 화염 같은 정령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내 몸을 기준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발현되기 시작했고 이내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존재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이면 돼. 안개를 불태우면서 네 힘을 모조리 방출시켜. 그 방향은 내가 지시한다.”
블랙미스트는 거대한 필드 마법임과 동시에, 거대한 진법 마법진이다.
생문과 사문이 있듯 이 마법엔 약점과 동시에 마법을 유지하는 기둥 또한 존재한다.
본래대로라면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덕에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로 아이아스의 초월마법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그녀 본인이 사용한 완벽한 마법이 아닌 이상 겁먹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 의지에 대변하듯 거대한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순간적으로 검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불태우는 검이자 다른 정령왕에겐 없고 오로지 이 방화광 녀석에게만 있는 화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초의 땅을 불태우는 검.
레바테인의 화염이 일렁이며 마법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 무슨?!]
“내가 이 마법에 대해서 너보단 수백 년은 더 연구했어, 이 새끼야.”
[다크나이트여! 그, 그를 당장 죽여라!]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디센트가 검은 기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내게 들리는 건 나와 연결된 존재.
그리고 오로지 디센트의 목소리가 전부인 만큼 다크나이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살기 또한 일순간 지워진다.
화르르륵!!
하지만 방화광 이프리트의 레바테인이 마법의 근간을 뒤흔들기 시작하자 아주 옅게 노이즈가 낀 것처럼 다크나이트의 기척이 다시금 잡히기 시작했다.
언제 내 뒤를 장악했는지 검은 광검을 내 목을 향해 휘두르는 기사의 모습이 감지되었다.
반응하기엔 너무 빠른 속도라 늦었다고 볼 수 있지만.
나는 허공에 던졌던 홍단이와 청단이, 아니 서로 융합하여 만들어진 초단이를 검집째로 잡았다.
그리고는 검집의 끝이 아래로 향하게 만든 뒤 한 손은 검집을 나머지 한 손은 검을 잡았다.
[월령보]
[백 히트]
쒜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섬뜩한 소리를 울리는 광검이 내 몸을 반으로 쪼갤 듯 가른다.
서걱!!
하지만 그가 내 몸을 갈라도 내 몸에서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베어낸 것이 내 육신이 아닌 내 형상을 지니고 있던 연기였기 때문이었다.
블랙 미스트와는 다른 검은 연기의 잔상이 흑광검에 베어져 흩어지기가 무섭게 색을 잃고 사라졌다.
명백히 유형화된 잔상이었다.
[무슨?!]
당황한 디센트의 웅웅 울리는 경악성이 들려오지만 이미 나는 기사의 뒤를 점한 후였다.
방향은 정확히 일직선.
다크나이트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디센트를 정확히 일렬로 바라보게끔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 치의 오차도 용서할 수 없다.
몸을 숨인 채 발검술의 자세를 취한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집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검의 그립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마령검]
[72초식 발검술]
[흑뢰일개(黑雷日開)]
검은 벼락을 통해 태양을 가른다는 의미를 지닌 발검술은 명백히 천마 독고준이 만들어낸 발검술 최후반대의 오의나 다름없다.
비록 진짜 태양을 가른 적은 없지만 일개 인간이 검술로 하늘을 갈라낸다는 건 대단한 경지인 것이다.
콰지지직!!
순간적으로 검집에서 초단이의 청적색 검신이 뽑혀 나온다.
그리고 그 검신에서 초단이의 청적색 기류 이외에 검은 벼락이 머금어졌다.
쩌억!
검이 뽑히는 모습을 본 이는 없었다.
하지만 초단이의 긴 검 끝은 이미 궤적을 그리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정령마나를 희박하게 만들어 이 마법을 발현하고 있으니 정령왕과 레바테인의 힘으로 블랙미스트에 균열을 만들고 정령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내 오감을 엉망으로 만든 마법의 방해가 잠시나마 사라졌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검은 벼락이 머금어진 초단이의 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은 나는 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콰작!
동시에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흑광검을 만들어내던 다크나이트의 검에서 빛으로 된 검신이 사라졌다.
쩌억!
그리고 그가 나를 추적하기 위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수백 갈래의 실선이 드러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찰그락…….
그리고, 아주 잠깐의 균열을 기준으로.
다크나이트의 갑옷이 잘게 바스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여파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와 다크나이트가 서 있는 천장이 잘려나가면서 하늘에 뜬 맑은 하늘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졌다.
검기가 터져나가며 기상의 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신기한 그 잔상은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낮은 구름도 아니고 창공 저 높은 구름까지 벨 정도면 내 힘이 제법 많이 돌아온 것과 초단이의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다크나이트는 제법 단단한 존재이니까. 잘게 잘라버리지 않는 이상 쉽게 죽지 않는다.
[마…… 말도 안 돼! 마인드마스터급의 힘을 지닌 다크나이트였을진데!]
마인드마스터라…….
페스리사 대륙의 구분법이네. 소드마스터의 상위 단계.
다크나이트가 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게 놀라워? 방금 베어 버린 안개가 왜 복구되지 않는지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물음에 그가 침묵한다.
실제로 다크나이트는 물론, 천장과 하늘의 구름까지 베어 버린 검기로 생긴 안개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흩어진다.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건 그게 아닌데.”
쩌저적!!
뒤이어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변을 가득 메우던 블랙미스트의 검은 안개가 완전히 흩어졌다.
마법 자체를 그가 가진 아티펙트를 통해 발현했으니, 그 아티펙트가 유일한 약점이 된다.
그리고 그 아티펙트는 내가 다크나이트와 함께 일직선으로 베어 버린 대로 아주 바스러지듯 조각이 되어 버렸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아본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마법에 내가 간섭할 수 없다면 그가 몰랐던 약점을 파고들어 부수면 되는 일인 것을.
“대체 어떻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너희들은 본인들이 가장 데스로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내 미소에 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팔다리가 언제 잘려나간 건지 잘려나가며 검은 연기로 산화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육신이 잘려나가자마자 산화한다라.
역시나 이것도 더미 육신이다.
“그냥 내가 너희보다 데스로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너희들이 생각한 것보다 너희들이 쓴 마법을 많이 봐왔다는 것뿐이야.”
실제로 내가 이 마법의 구조를 그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외려 내 쪽에서 큰 낭패를 봤을지 모른다.
놈이 자만하지 않고 바리스부터 노렸다면 어쩌면 바리스를 완벽하게 지켜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생각 이상으로 위험성이 높다.
로 아이아스의 흔적을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진짜로 그녀의 초월마법을 흉내낼 정도라면…….
앞으로 일루미나티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는 건 불가능해진다.
안개가 흩어지고 모습을 드러내는 페르세르크와 바리스의 멍한 얼굴을 확인한 나는 팔다리를 잃고 무너져내린 디센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멀리서 소란을 듣고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블랙미스트에 노출된 기사들이 이렇게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이곳으로 온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그는 이 왕성 전체를 장악했다 말했지만 사실 그가 검은 안개를 덧씌운 곳은 내가 있는 이 복도의 일부가 전부였다는 소리다.
“기가 막히는군요. 그저 허풍이라 생각했건만.”
블랙미스트를 이딴 식으로 파훼했다는 점에서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다.
내가 단순히 허풍으로 그 존재에 대해 알고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함부로 수작을 부렸다간 역으로 이쪽에서 당하겠어요.”
“걱정 마. 조만간 널 찾아 죽일 테니.”
“불가합니다. 당신은 절대 저를 찾지 못해요.”
지금 육신도 가짜일 뿐이니까.
일루미나티가 기괴한 구조를 지닌 [점조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추적이 힘들 순 없을 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콘타스 제국에서 널 위해 큰 선물을 준비 중이니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당신의 그 뻔한 함정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그거야 네 마음이긴 한데.”
빙그레 웃어 보인 나는 그를 놀리듯 말했다.
“함정인 걸 알아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을걸?”
그 존재 자체가 너희들의 조직 근간을 흔들어 버릴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청적색의 검기가 그의 목을 갈라냈다.
허공에 떠오른 그의 머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먼지였던 것처럼 검게 바스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가던 그의 목소리가 흩어지기 전에 내 귓가에 닿았다.
[볼티즈 국왕의 목숨은 이쪽에서 거둬가지요. 당신에게 맡겨놓았다간 이쪽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끝까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는 놈들이었다.
콰앙!!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지하 감옥이 있는 쪽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고, 이내 내가 볼티즈 국왕의 몸에 심어둔 마나가 흩어졌다.
국왕의 육신이 하나도 남김없이 조각조각 터져버렸다는 증거였다.
멍하니 내 뒤에 소환된 방화광 이프리트를 돌아본 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화염의 거인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일 끝났으니 돌아가도 좋아, 방화광.”
[이…… 이 쳐죽일 놈!]
격한 이프리트의 분노가 터진 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