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6화
[반가워요, 오늘부터 당신에게 흑마법과 사령마법을 가르쳐줄 로 아이아스라고 해요.]
그녀와의 만남은 제법 소박했다.
[우선은…… 그래요. 낮잠을 자도록 해요.]
그녀는 내게 마법을 가르치기 전 휴식을 종용했다.
다른 어떤 영웅들도 시작부터 휴식을 권한 이는 없었다.
[당신의 내면은 오랜 시간 수련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으니까요.]
단순한 배려였지만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품었던 첫 번째 이유가 아니었을까.
부드럽고 청초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 미녀는 내게 손을 뻗어와 뺨을 쓸어내리며 푹 쉴 것을 요청했었다.
[푹 자도록 해요.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테니 따뜻한 꿈을 꿀 수 있게 해드릴게요.]
완전 기억능력 때문에 영웅들과의 대화 하나하나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다른 어떤 영웅보다 오래 가슴에 남아있다.
그런 그녀가.
개인의 이유와 사정으로 자신의 존재까지 지워버린 그녀의 육신이 이렇게 악용되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일루미나티는 겉으로는 수많은 국가와 제국, 단체나 평범한 농민, 혹은 용병 등등으로 위장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런 집단의 내부로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자와 같이 대놓고 활동하는 흑마법사들이 있다.
이들이 모시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데스로드.
로 아이아스.
[누가 제일 강한데요?]
내가 했던 그 한마디에 시작되었었던 종말의 아포칼립스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회랑 영웅 최고위 강자 중 하나이다.
웃긴 점은 그녀의 존재는 분명 회랑에 오기 전부터 지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이도 아닌 그녀 본인의 선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나는 말 없이 눈앞에 포박된 괴인을 바라보았다.
신관장의 모습은 많이 변해있었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고 했던가.
그는 데스로드의 흔적이 서린 아티펙트를 총수처럼 완벽하게 다뤄내지 못했고, 그 결과 육신의 붕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버린 육신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약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고, 끔찍한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검은 그의 머리는 새하얗게 탈색되어있었고 얼굴은 수십 년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늙어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그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했는지 검게 변색되어 당장이라도 으깨질 것처럼 문드러져 있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그의 상태는 외견이나 내면이나 놀라울 정도로 끔찍했다.
“네게서 필요한 걸 들을 생각은 없다.”
신관장 정도면 제법 뛰어난 직위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놈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좋아, 정보 얻겠답시고 굳이 고문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당장 푸는 게 좋을 거다. 이 배교도놈.”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놈의 피부를 손등으로 가볍게 툭! 하고 두드리자 놈의 안광이 더욱 흉흉하게 변한다.
“날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라니. 오만하기도 하시네.”
그렇게 말한 나는 미련 없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시험관 안으로 기이한 색의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세상을 가던 극도로 잔인한 법은 존재해. 들어는 봤지? 살인을 한 자는 사형으로, 남의 얼굴을 때려 이를 부러뜨린 자는 똑같이 이를 부숴버리는 것으로.”
지구에선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세상에도 그 정도로 극단적인 법은 존재한다.
인간의 생각은 인종이나 환경이 극단적으로 다르지 않는 이상 시간이 흐를수록 어차피 결국은 비슷한 법이다.
“생산성이라곤 쥐뿔도 없지만 치안 문제를 억누르기엔 그만한 최고의 법도 없긴 하지?”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지금부터, 고인의 육신을 부관참시한 너희 개XX들에게 그 사람의 제자가 분풀이를 할 거다.”
네게 어떤 정보도 받지 않는 건 그 이유다.
“지금 네 입에서 하나라도 로 아이아스 그 사람에 대해 언급이 되면 널 어떻게 찢어버릴지 내가 감이 안 잡혀.”
죽은 스승의 유해를 재료로 사용해 그녀의 힘을 발현한 놈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답은 뻔했다.
똑같이 갚아준다.
나는 놈을 말없이 노려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침묵하고 있던 륀느가 다가와 놈의 거대해지고 비대해진 몸을 들어 올렸다.
키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작은 륀느였지만 녀석은 그 작은 체격 어디에서 나오는지 미스테리한 힘을 뽐내며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공동의 한편에 있는 시험 광에 그를 던져넣어 버렸다.
“네놈을 씹어먹겠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네년을 씹어먹어 버릴 것이다!”
그의 저주성 어린 멘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운명을 읊어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대로 널 판단할 거다.”
“오만하구나 인간!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데스로드의 존재를 심판…….”
“아까도 말했지. 남의 스승의 육신으로 그딴 걸 만든 것도 모자라 그걸 제자의 눈앞에 들이민 이상 좋게 넘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멀쩡히 그 안에서 나올 수야 있다면, 어디 한번 마음껏 씹어보라지.
지금 그와 내가 있는 이곳은 하인스 영지이되 하인스 영지에서 한참 떨어진 달의 숲 인간에 만든 지하 시설이었다.
어지간해선 들킬 염려가 없게 마법으로 결계를 수 겹 쳐두었다.
나는,
이자를 산채로 녹여 아티펙트의 재료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 일이 대륙에 알려지는 순간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 중 일부를 그대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애초에 그딴 건 상관이 없었다.
성자로 만들어진 허명은 그저 인간들이 씌운 굴레일 뿐이니 말이다.
“외로워하진 마. 곧 친구들 데려올 테니까.”
* * *
넓은 황야로 나온 나는 말 없이 주변을 지키는 메가로드리아와 그런 메가로드리아의 두껍고 푹신푹신한 날개에 기대어 장난을 치고 있는 륀느에게 다가갔다.
“륀느, 흡수하려면 얼마나 걸려?”
“륀느, 수학적인 계산능력을 높게 평가. 냉정한 수식 분식대로라면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걸릴지 모른다고 판단.”
데스로드의 육신은 오로지 그녀만의 소유물이었다.
그런 그녀의 고유 사령마나를 이런 식으로라도 흡수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전부다.
실제로 일루미나티가 뛰어난 정보능력을 지니고 있다지만 륀느를 통해 지금 내가 놈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터였다.
설사 내가 놈들을 찾아내 박멸한다 해도 그걸 우연이나 단순 내통으로 알아낸 정보라고 착각하지 자신들의 밑천이 된 아티펙트 때문이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데이비 님. 뛰어난 륀느의 기억력에 따르면 근방에 한곳이 더 있다고 보고.”
륀느가 처음 공명마법진을 발현했을 때, 나는 지금 내가 잡아 온 신관장 이외에 다른 한 곳의 정보 또한 습득했다.
그 외에는 신호가 미약해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메가로드리아.”
[계약자. 나는 가지 않을 거다.]
돌아가지도 않고 마치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기다리고 있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자신을 매번 운반꾼, 청소부, 뒤치다꺼리용으로만 써대는 게 그토록 불만인지 메가로드리아의 목소리에 날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넌 지금 네 브레스 한방이 가지는 위력이 얼마나 무식한지는 알고 있는 거지?”
메가로드리아의 표면 경지는 현재 나보다 높은 편이다.
그만큼 놈이 날뛰기 시작하면 단순한 공격에도 어마어마한 여파가 생길 수 있다는 걸 감안해야 했다.
“알았어, 이번엔 네가 나서게 해줄게.”
내 말에 눈을 감고 있던 메가로드리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린다.
“약속을 지켜라. 계약자.”
“그래.”
륀느와 함께 다시 그의 등 뒤로 올라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북쪽이다.”
목적지는 동부대륙 최북단.
륀느의 추적마법에 사용될 사령마나가 부족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순 없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메가로드리아에게 사탕발린 발언을 내던진 것이니 말이다.
자신이 날뛸 기회를 준다는 말에 혹한 메가로드리아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 생각인지 거대한 날개들을 펄럭이며 그대로 륀느와 나를 데리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녀석의 이동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도 그럴 것이 메가로드리아의 주 무대는 지상이 아닌 창공이니 말이다.
괜히 창공의 폭풍용왕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수의 날개가 펄럭이며 순식간에 지형이 돌변한다.
갑작스런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면 온몸에 오한이 돋는다고 하는데 기계 출신인 륀느나 그보다 더한 것도 겪어본 내게 그 속도는 사실 그리 막 적응이 안 되지는 않았다.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든 메가로드리아는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동부대륙의 최북단.
이곳은 날아서 오지 않는 이상 진입이 굉장히 어려운 장소 중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인간이 걸어서 도달할 수 없는 초대형 크레바스와 자연 폭풍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이상기후가 최근에 비해 극도로 심해졌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성국 쪽에서 조사단을 파견한다곤 하지만 사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낼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애초에 알아낸다 한들 상관없으니 말이다.
“죄다 얼음투성이네.”
새삼 놀라울 정도로 동부의 최북단 빙하 지역은 찬 기운으로 가득했다.
아마 티오니스 대륙표 온난화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이곳이 녹아내리는 일은 잘 없으리라.
“데이비 님. 추가 공명마법진 발현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륀느가 낮은 사령마나량을 낮게 평가.”
풀이 죽은 륀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이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상관이야. 몰라도 돼.”
내 말에 륀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나는 륀느를 품에 안아 들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상공 수백 미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낙하하자 륀느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메가로드리아. 네 진가를 발휘할 때가 됐다. 쫄지 말고 지워버려.”
적어도 이런 곳에는 누가 잡혀있진 않을 테니까.
지상으로 추락하면서 나를 보던 륀느는 곧이어 하늘에 떠오른 메가로드리아의 묘한 기척에 맹한 시선을 그에게 고정했다.
마치 2족 보행형 존재처럼 날아오른 메가로드리아는 양손을 가볍게 후려치고는 거대한 포효를 흘리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내 광기에. 하늘이 울부짖고.]
휘이이이잉…….
처음엔 그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칼바람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주변 지면을 강타하기 시작하자 나는 가볍게 방어마법을 펼쳐 공간 일대를 격리시킨다.
[내 분노에 지상이 공포에 떨리라!]
뒤이어 메가로드리아의 저 손발 오그라드는 광오한 외침에 또 한차례 들려온다.
물론, 외침에 뒤따르는 여파가 어마어마하니 단순히 오그라든다는 표현도 웃긴 일이다.
거대한 폭풍은 지면의 근원을 자극하며 판을 이동시켰고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보면 현재 이 거대한 극지방의 하늘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도저히 단순 생명체의 힘으로 끌어낼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폭풍이지만 상대는 폭풍을 다루는 용왕.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하늘을 조작해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고 지면을 뒤튼다.
순식간에 지면이 진동하며 그 지진파를 일으키자 메가로드리아의 안광이 한 차례 번뜩였다.
애초에 이곳에선 나보다 메가로드리아가 더 정확한 수색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치직…….
이윽고 메가로드리아의 입이 쩍 벌어지며.
거대한 에너지가 마치 스파크 모이듯 모이기 시작했다.
“야!!!”
그때 내가 놈을 격하게 불렀지만, 놈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우두머리 놈 살려놔라. 죽이면 넌 내 손에 뒤져.”
섬뜩한 경고조차 무시하며 거대한 에너지를 모으던 메가로드리아는 짧게 코웃음 친다.
[흥! 계약자 네놈의 힘으로 감히 나를 위협하려 들다니 아직 한참 멀었다!]
아무리 현명해도 일단은 환수의 왕이다.
폭거가 일상적인 이 거대한 환수왕에게 이딴 협박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상관없는 일이다.
[못이긴 척 넘어가 주는 것도 왕의 소양일지니!]
이놈은 반드시 내 말을 들을 테니까.
일대 영역을 모조리 지워버릴 것처럼 강대하게 모여들던 브레스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축소 압축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얇게 변한 에너지 구체가 완전히 모이자 메가로드리아는 거침없이 아무것도 없는 빙산을 향해 브레스를 내리꽂았다.
초고밀도의 에너지가 사람의 몸 두세 겹 정도의 크기로 어마어마하게 압축된다.
출력은 같은데 면적이 좁아지니 당연히 위력과 압력은 상승할 수밖에.
그의 추적이 빙고였는지 빙산 쪽에서 검은 장막이 펼쳐진다.
“데이비 님! 대량의 사령마나 검출!”
“상관없어.”
내 말과 함께.
부욱!!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소형으로 응축시킨 브레스를 방출하여 그대로 그어 올려버린 메가로드리아의 행동에 방어장막은 물론이고 빙산 전체가 마치 레이저 절단기로 잘라버린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저래 봬도 그랜드마스터 급 환수였다.
현재 내가 폭주하면 나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실상 세계수와 저놈이 전부였다.
그만큼 메가로드리아의 힘은 폭군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