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0화
163. 자장가 받아라
차원 열쇠를 통해 여러 세계를 이동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유일하게 갈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지구.
그게 넬타리드 신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지구에 대한 정보는 나름대로 필요했다.
적어도 넬타리드가 정말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뭐든 대비해놔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누나, 나 갔다 올게.”
결연한 얼굴로 수소감귤맛스타, 아니 수소가 여성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꼭 부탁드릴게요. 아직 당신을 전부 믿을 순 없어요.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 개자식들이 저희 남매에게 준 고통은 거짓 없는 진짜였어요. 단순히 통각 시스템을 올린다고 해도 그런 고통은 줄 수 없을 테니까요.”
넬타리드 신에 의해 이방인들은 몇 가지 금제를 받고 활동하고 있다.
그 금제 중에 하나가 ‘현실괴리’다. 즉, 이곳을 현실이라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수소의 경우 금기의 업을 통해 그 금제를 살짝 비틀어놓았기 때문에 인지는 가능한 편이다.
실제로 수소는 내가 그 금제를 비틀어버리자 자신이 무슨 최면에 걸려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내가 말한 것들 반드시 명심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내게 고맙다고 말한 수소는 이내 천천히 손을 허공에 뻗더니 그대로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다수의 인간이 차원이동을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이건 또 기가 막힌 방법이네.”
“알 것 같아?”
“링크야.”
겉보기엔 차원이동 같지만 실제로는 링크에 가까웠다.
간단히 말해서 이미 넬타리드가 열어놓은 통로를 타고 아주 작은 용량을 지닌 혼들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에 육신을 만든 뒤 지구의 영혼과 이곳의 육신이 서로 링크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곳에서 죽어도 그쪽에서 멀쩡한 것이고.
“그럼 육신이 사라진 건?”
그 의문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설 하나를 대뜸 던졌다.
“신이 직접 만든 아바타. 형체가 있으면서 형체가 없고 상위의 힘이 마음대로 육신 내부에 스며들 수 있는 몸뚱아리. 넬타리드가 만들었다면…… 아마 넬타리드 신 본인의 아바타가 아닐까 싶은데.”
숨을 쉬고는 있지만, 실제로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는 육신이다.
이게 만약 넬타리드가 만든 신의 육신을 이용해 만든 아바타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다.
이방인들이 지닌 특이한 힘부터, 그들의 생리 현상까지 모두.
숨을 쉬지 않아도 죽지 않고 배설 활동도 없다.
게다가 그들을 구성하는 게임요소에 충실하여 특이한 힘을 다룬다.
이거…….
생각보다 탐나네.
나는 음흉한 웃음을 끝내 숨기지 못했다.
* * *
륀느의 탐지범위는 대륙 전체를 뒤덮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범위를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위치를 바꿔가며 땅따먹기라도 하듯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상대의 규모가 크고 은밀한 만큼 나 혼자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조력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한다.
이미 일리나를 통해 살리반에게 현 상황의 일부를 전달한 나는 암암리에 그들의 세력에 손을 뻗었다.
그 외에 린디스 제국에도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와 데오르트 황제에게, 그리고 적탑의 대현자인 헬리슨 발레스티아.
그 외에 연금학파의 총장이 된 인형사 프란시스까지.
나는 페르세르크를 통해 한 차례 확인한 이들에 한해서만 은밀하게 서신을 보냈다.
물론 그들을 확인할 때 의외였던 점도 있었다.
살리반의 존재였다.
그는 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인간이었다.
실제로 그가 라운 왕국과 볼티즈 왕국의 전쟁에서 다짜고짜 라운 왕국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일리나를 지켜줄 수 있는 이가 나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동생의 안전에 관해선 물불 가리지 않는 그가 일루미나티와 정말 관련이 없을까.
볼티즈 왕국의 국왕마저 일루미나티에 가담해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조직은 황족, 왕족, 평민 귀족 가릴 것 없이 퍼져있는 게 분명했다.
분명 살리반에게도 손을 뻗었을 진데.
이상하리만치 그는 그 조직과 관련이 없었다.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의 현 기사총장인 클로멘과 대면한 나는 벌써 와있었는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데이비 단원 왔는가.”
“어떻게 됐습니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네, 무엇부터 듣겠는가.”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대충 으쓱였다.
“좋은 소식부터 들어봅시다.”
“적들의 은신처 중 한 곳을 찾았네.”
“흐음.”
나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클로멘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왜 그러나?”
“뭘 말입니까?”
“표정이…….”
“아뇨,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주세요.”
“그런가? 그럼 나쁜 소식…….”
“동작 그만.”
그의 말을 끊은 내 표정이 대뜸 찌푸려진다.
“좋은 소식이라면서요.”
“말하지 않았나.”
“언제 말했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반면 일리나는…….
“너…… 벌써 털어먹었구나? 그러니 은신처에 대해서도 심드렁하지.”
“그…… 그게 정말인가?!”
“설마 좋은 소식이라는 게 그게 전부입니까?”
내 물음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그렇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막막하네요.”
“그래도 일단 자네의 앞에 있는 나는 기사총장이네만.”
“그래요. 뭐, 찾아낸 것도 용하긴 하네요. 그래서 나쁜 소식은 뭡니까.”
내 말에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약속해주게.”
“무슨 약속 말입니까.”
“내 말을 듣고도 독단으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약속.”
“뭐, 알겠습니다.”
나쁜 소식이야 어디 한두 번이던가.
말해보라는 듯 내가 기다리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리스 텔만 기사단원과 268기 기사단원들. 즉 자네의 동기들.”
이전 타르타로스 지하 산맥 쪽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같이 있었던 녀석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전부 라스트위스프 총본산으로 압송되었네.”
“…….”
“죄목은 속세의 존재와 무리한 접촉. 내가 막아보려 했네만……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현재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의 권한마저 묶여있는 상태야. 사실상 자네를 도울 수가 없어졌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리나.”
“어…… 응?”
“따라와.”
“응? 어어…… 잠깐 너 설마!”
“전에 내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했던 말 기억해?”
내 물음에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본다.
“무능한 아군이 위협적인 적보다 더 위험하다…….”
“제정신이 아닌 거지.”
“자…… 잠깐!! 약속하지 않았나!”
풍경이 이상하긴 하다. 짜증내는 평기사 단원과 쩔쩔매는 기사 총장이라니.
보통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사단의 상황을 잘 아는 그였기에 문제 삼지 않았다.
그의 외침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뭐?”
“뭐, 성자는 거짓말 못할 줄 아셨습니까? 어지간한 일이면 넘어가주려 했는데. 뭐요? 규율 위반? 장난치세요?”
살기까지 쏟아져 나오는 내 질문에 기사총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일루미나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살하기 위해선 라스트위스프와 국제 연합의 협동이 필요했다.
당연 라스트위스프는 세상에 알려져지지 않은 비밀 결사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는 뱀파이어 때와 같은 방식을 통해 두 세력의 협력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라스트위스프 기사단 본산의 협조를 받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만.
“이 등신들이 진짜…….”
나는 진술조사보고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다짜고짜 찾아와서 죄다 압송해갔다?”
“부끄럽지만 그렇네. 설마 총본산에서 일의 우선순위를 이따위로 잡을 줄은 몰랐군.”
확실히 보리스를 포함해 기사단원들이 속세와 멋대로 접촉한 것은 규율 위반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사단 중 기사단 본부 하나가 궤멸된 시점에서까지 이따위 개 잡스러운 일로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럼 나는, 나와 일리나는?”
“로밍나이트라는 이유로 지금은 대기. 본래대로라면 대기명령이 떨어졌지만 나는 그 명령을 잠시 보류 중일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개트롤 새끼들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게.”
“진정이요? 지금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모르겠습니까?”
“자네의 분노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네. 실제로 지금 이 기사단 본부가 침체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럽니까?”
“나는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건 불만이 없네.”
그의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잊지 말게. 자네는 아직 평기사단원이야. 바깥의 계급이 어떻건 그건 변치 않지.”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하는 거지.
일리나가 짜증이 일었는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면, 이런 부당한 처사와 지금 같은 급박한 사태에도 그들의 판결만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네.”
클로멘의 말에 일리나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고일대로 고였어.”
“하지만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자네들과 같은 생각일세.”
“…….”
“이 일은 순서가 맞지 않아. 상벌을 따지기 위해선 우선 큰일부터 해결했어야 했어. 이번 일은…… 아무리 원리 원칙 위주라 해도 합리성이 너무 떨어지네.”
융통성과 합리성은 다르다.
그는 융통성은 많이 없지만 냉정한 판단과 합리성은 확실히 챙기는 사내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죠.”
그때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일리나가 천천히 말했다.
“반대로? 무슨 말인가.”
“만약 그 수뇌부에도 이미 일루미나티가 잠입해있다면?”
그녀의 말에 총장 클로멘의 표정이 굳는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가설을 부정했다.
“어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가능성 있는…….”
“본산 내에 일루미나티 관련 첩자가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미 라스트위스프 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궤멸 되었을 것이다.
일루미나티는 라스트위스프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기회를 일부러 놓칠 이유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래.”
“그렇구나…….”
“어쨌건, 본산으로 가는 길은 어딥니까.”
“데이비 단원,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었나?”
“그래서, 말해주지 않겠다는 겁니까?”
“말해주고 싶어도 할 수 없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산은 오로지 기사단의 수장께서 윤허하여야 갈 수 있어.”
“그딴 게 지금 중요합니까?”
“불가능할걸세.”
그의 단언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곳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총장 클로멘의 설명대로라면 기사단 총본산은 단순히 대륙에 존재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기사단 총본산으로 가려면 이 반지를 사용해야 하네. 그 위치가 어디인지, 또 어떻게 가는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네.”
기사단 본부로 이동시켜주던 반지와 매우 흡사하고, 특이한 반지다.
특질 능력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건지 마나와는 다른 힘이 느껴졌다.
“다만 지금은 이것도 무용지물일세. 그곳의 문이 굳게 닫혀있으니, 이동도 불가능해.”
“가지가지 하는구나…….”
내가 한숨을 내쉬자 일리나가 짜증이 난 듯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아니 뭐 그런 인간들이 다 있어요?! 지금 일의 우선순위가 뭔지를 모르나?!”
“데이비 단원, 그리고 일리나 단원. 기사단 총본산으로 가는 길은 내가 찾아보겠네.”
“…….”
“하지만 저쪽이 일의 우선순위를 미뤘다고 우리도 똑같이 그래서야 쓰겠는가. 이쪽은 이쪽대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일입니까?”
“좀 전에 말했던 놈들의 은신처. 그곳에 몰래 잠입해 필요한 정보를 캐야 하네.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곧장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그곳을 파괴한다더군. 이미 몇 차례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고 습격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네.”
그러니까 소리소문없이 진입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내가 나서달란 소리였다.
“그걸 내가 해야 됩니까?”
“무슨 소리인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규율을 들먹이는 그 본산도, 이 기사단의 고인 현실도 아니라 눈앞에 있는 적일세!”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본산의 지시입니까?”
“아닐세. 총본산은 지금 일루미나티에 관심이 거의 없어 보여.”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쪽에서 부르지 않는 이상 들어갈 방법이 없다.
한 번만 그곳에 도달하면 좌표 측정 마법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일단은 맡길 수밖에.
“자네가 할 일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일세. 일루미나티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그곳에 몰래 잠입해 그들이 숨기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빼내와 주게. 총본산에서 자네를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공간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작은 조각칼과 투명한 줄을 몇 개 꺼내 들었다.
“조각칼?”
“필요한 물건을 좀 만들어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내가 음유시인으로서 가창능력만큼은 지옥의 세레나데 그 자체라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지독한 반복 노가다 끝에 어떻게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만들려는 것은 ‘현악기’
‘리라’라는 이름의 악기였다.
“리라를 만들 겁니다. 음색이 좋은 악기예요.”
내 설명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기를 만든다고? 데이비 단원,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군.”
“보는 놈이 없으면 학살도 암살이 되는 겁니다.”
“음?”
“잠입도 그래요. 내가 숨어든 걸 본 놈이 없으면 그건 완벽한 잠입이 되는 겁니다.”
조각칼을 빙그르르 돌린 나는 곧바로 아공간에서 마른 목재를 꺼내 오러 블레이드를 얇게 조각칼에 깔았다.
그리고는 빠르게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천, 수만 번을 제작했던 악기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치 신들린 것처럼 손을 놀리며 작업을 시작한 나는 청명하고 우아한 소리를 내뿜는 리라의 줄을 몇 차례 튕겼다.
“대체 그 악기로 뭘 하려고?”
“설마, 데이비. 그걸로 그놈들 머리통을 박살 내버릴 건 아니지?”
“부숴 버릴 거면 차라리 십자가로 부쉈을 거다.”
이건 그런 야만적인 방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