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3화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속옷만 남은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그녀가 당황하여 허둥지둥거리자 나는 근처에 휘날려온 찢겨진 로브를 그녀에게 던져 덮었다.
그러자 그녀는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로 로브를 생명줄처럼 잡아당겨 몸을 가렸다.
묘한 기류가 돌긴 하지만 의료활동이 우선이다.
목숨의 경종이 중요하냐! 눈 호강이 눈앞에 있는데!
아, 반대로구나.
“자, 날 따라 해봐.”
그리고는 양손을 들어 작은 별 율동을 하듯 손을 흔들자 그녀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빨리.”
하지만 내 재촉에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다 천천히 한 손으로 로브를 여미고 나머지 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전혀 움직이지 못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독을 빼는 일련의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움직였다.
대부분 해독되어버린 것이다.
“독이 생각보다 약한 거 같긴 한데.”
요르간의 그 끔찍한 독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 리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응급처치 후 이곳을 초토화 시키고 곧바로 벗어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요르간은 데스 로드의 힘이 아닌 데스 로드가 봉인한 것.
그 두 가지의 차이는 확연하기에 사실 이 정도까지 겁이 없는 짓을 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던 나였다.
요르간의 독은 단순히 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기괴한 무언가가 분명 있는 극독 중에서도 극독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요르간과 이놈은 좀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독이 굉장히 약한 것이다.
[요르간이라…… 그 근원은 끔찍한 권능과 수많은 아이의 원념이 모여 만들어진 원귀예요, 시간이 흐를수록,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한계 없이 성장하죠, 하지만, 불쌍한 아이예요. 원치 않게 태어났고, 그 미움을 풀 곳이 없어서 계속 울기만 하니까요.]
[얼마나 강해지는데요?]
[요르간의 존재는 금기 중에서도 금기에요. 혹여라도 그 아이를 다시 깨우는 짓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거 다시 깨어나면?]
[…… 글쎄요.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는 한 번의 월권은 용서해도 두 번은 용서가 없겠죠.]
금기로 치부될 정도로 위헌한 생명체.
금기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요소들이다.
어쩌면, 그녀가 봉인했다라는 건 단순히 요르간이 아니라, 요르간의 근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애애애애!!”
서럽게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페르세르크를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아기 머리 뱀 요르간의 공세가 점차 강해진다.
아기 얼굴이 더욱 찌푸려질수록, 더욱 큰 울음소리를 낼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짙어지며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힘이 넘치는구나.”
장막을 비스듬히 생성해 요르간의 돌진을 수차례나 빗겨낸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죽인다고 했지만, 그녀의 힘으론 상당히 벅찬 모양이었다.
“그 단단한 방어 장막이 빗겨내는 것만으로도 이리 깨지려 들다니…….”
페르세르크는 상대가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섣불리 공격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현재 육신이 가진 역량으론 이것이 한계였다.
“데이비…… 저건…… 대체 뭐야?”
“요르간. 그리고, 단두대가 될 거다.”
짧게 답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홍단이와 청단이를 꺼내 들었다.
데스 로드는 놈을 죽이지 않고 봉인했다.
정확히 봉인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녀석에게 죽일 틈이라는 게 생겼다면, 나는 그 녀석을 죽인다.
“난 로 아이아스가 아니야.”
나는 그녀만큼 강해질 수도 없으니 후에 강대해져 스스로 봉인을 깨버릴지 모를 놈을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스르릉…….
“미안한데 여기서 죽자.”
요르간에 얽힌 불쌍한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녀석의 형태는 끝도 없이 기괴하지만, 실체는 수백의 갓난아기의 원념과 고대의 저주가 모여 만들어진 응집체일 뿐이다.
원해서 죽은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청단이와 홍단이를 띄운 나는 녀석의 육체 특성상 지금 완전히 성장도 못 한 홍단이와 청단이의 힘만으론 해결이 힘들 가능성이 있다.
스펙이 딸리면 아이템으로 보강하는 게 내 전력이 아니던가.
순식간에 초단이를 융합해낸 나는 초단이를 유지하면서 대량의 마나가 소모되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필살기 필살기 하는구나.
“페르세르크. 바톤터치.”
내 말에 초월의 종언을 이용해 장막을 수차례 중첩시킨 그녀가 수 미터에 달하는 요르간의 길고 가는 몸뚱이를 빗겨 쳐냈다.
실드를 만드는 것을 넘어 그것을 용용,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놈의 육체가 가져오는 엄청난 힘을 빗겨낸 것이다.
쩌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아기 머리 뱀. 요르간의 거대한 육신이 튕겨 나간다.
아주 잠깐의 틈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응애애애애!!!”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덤벼든 녀석이 순식간에 내가 펼친 호신강기를 둥글게 말아 감싸며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압력에 서서히 강기가 찌그러지기 시작하자 일리나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초단이를 든 채 눈을 감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구원을 바라는 자. 안식에 들지 못하는 자에게 신의 자비가 함께 하기를.”
냉정하게 판단했지만 사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욕심 많은 어른들의 끔찍한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인 것을.
“미안하다.”
짧게 중얼거린 나는 초단이의 검면에 방대한 신성력을 담았다.
주신 프리아 여신의 신성력이 아주 미약하게 감돌기 시작한다.
보고는 있었다 이겁니까. 그럼 이야기가 좀 빨라지겠네요.
기도가 닿지 않았던 건 아닌 모양이다.
미약한 의지가 전해져오기가 무섭게 내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평소와 같은 거친 검격이나 날카로운 검격은 아니었다.
쩌적! 쩡!!
호신강기가 기어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난다.
요르간은 그대로 내 몸을 으스러뜨릴 듯 파고들어 온다.
하지만 마치 바람이 옅게 몰아치듯 일대에 부드럽고 잔잔한 바람이 몰아쳤다.
서걱!!
동시에.
나를 감쌌던 요르간의 육신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티잉!!!
금속이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붉은 핏방울이 초단이의 검신에 서린 신성력에 닿아 증발하듯 흩어진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무너진 요르간의 육신은 신성력에 의해 서서히 바스러져 갔고 이내 녀석의 핵이나 다름없는 머리만이 남았다.
바닥에 쓰러져 아이 울음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는 요르간에게 천천히 다가간 나는 천천히 요르간의 머리 부분인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럽게 우는 아이는 날카로운 이빨로 내 다리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행동에서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요르간이 내 다리를 물어뜯은 것은, 나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알아달라고,
자기가 이렇게 괴롭다고.
그렇게 외치는 것이다.
태어나서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힘들면 울고, 배고파도 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란 그게 전부였다.
“도…… 독이?!”
한차례 복부를 물리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경험할 뻔한 일리나였기에 그녀는 요르간이 내 다리를 물어뜯은 것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요르간의 독은.
내 몸에서 퍼져나가지 못했다.
요르간의 이빨은 내 피부를 뚫기 전에 천천히 흩어졌고, 요르간의 핵이나 다름없는 끝이 갈라진 혓바닥의 중앙, 그곳에 돋아난 하나의 눈은 마치 풍화되듯 검게 변하며 바스러지고 있었다.
“응애애애…… 응애애…….”
바스러져 가는 요르간의 울음소리는 너무 처연했다.
어찌나 처연했는지 좀 전 요르간에게 죽어가던 일리나 조차 입을 틀어막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사라져가는 요르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자 나는 아공간에서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신이 지켜본다. 금기를 어긴 자들에게 신은 가차 없이 벌을 내린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네.”
내 말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복잡한 과정은 이제 필요 없게 되어버렸다.
상황은 분명 최고로 좋은 상황이지만, 요르간으로 인해 죽어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건 절대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결과였다.
“지뢰?”
“지뢰가 뭐에요?”
“흐음……. 밟으면 폭발하는 함정 무기인 게야.”
페르세르크의 설명에 일리나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금기를 어긴 놈은.”
신창 롱기누스를 십자가의 형태로 바꾼 내가 정방향으로 바닥에 꽂아 넣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이 벌하는 법이다.”
[차마 쳐다보기 황송한 이 땅의 주신이시여, 그대의 성자. 그대의 악동, 혹은 그대의 신부가 될 데이비 올 라운이 간청하옵나이다.]
옅은 신성력이 흘러나온다.
새까만 재로 변하며 사라지는 아이들을 향해 나는 조용히 말을 읊었다.
[자애의 여신께서 내려주실 한줄기 자비로 타의에 의해 금기를 범하게 된 불쌍하고 순수한 영혼들을……. 됐고, 일단 불쌍한 애들 잘 좀 부탁합니다.]
우우우웅!!!
거대한 빛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며 요르간이 분해되어 만들어진 검은 재들을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쉽게 갑시다. 내 계획에 당신의 손을 빌려주세요. 당신의 권위에 도전한 놈에게 당신의 자비를 거두어 그 분노를 여지없이 보여주기를.]
일반적인 제령에 사용되는 신성력과는 달랐다.
주신 프리아 여신과 바라는 점이 일치한다.
[그놈들 머리통 깨버릴 성경 하나 내려주시지요.]
주신 프리아 여신이 마냥 선한 신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베르단데를 통해 확인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보여달라고.
당신이 금한 금기를 범한 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스팡!!!!!
거대한 힘이 내가 아닌 세상 전역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윽?!”
“무슨 신성력이?!”
본능적으로 내가 내뿜은 신성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페르세르크와 일리나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주신은 세상에 간섭할 수 없다.
그녀가 성자나 성녀를 만들고 미약한 계시를 내리는 건 엄연히 그녀가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규칙을 아무런 대가 없이 어기고, 금기마저 밥 먹듯이 범한 이놈들에게는.
더 이상 신의 자비는 바랄 수 없으리라.
거대한 빛 속에서 나타난 커다란 책 한 권을 한 손으로 받아내자 묵직함이 손끝으로 전해져온다.
[주신의 이름으로 명한다. 금기를 범한 자들을 모두 단죄하여 나의 곁으로 보낼지니, 가로되 내가 말하노라.]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스 로드의 육신은 금기라고 하기엔 애매한 선이 있지만, 그녀가 봉인한 것들은 엄연히 금기 중에 하나다.
일루미나티의 총수는 데스 로드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유산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것을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한다.
요르간의 부활 또한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단순히 힘이 되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자는 마음에서 한 일일 테지만.
그것으로 놈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말 그대로 신이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곳은 신이 없던 지구와는 다르니까.
그렇기에 생명은 신을 갈구하고, 신을 숭배한다.
[금기를 범한 자. 자비를 거두어들이겠노라.]
신에게 버림받은 생명체라…….
일순간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요동치던 신성력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내 앞으로 마치 깃털 날리듯 노란 카드 한 장이 천천히 내려와 내 손에 안착하였다.
“씁…….”
일루미나티도 일루미나티지만, 프리아 여신은 내게도 경고장을 던져왔다.
“데이비…… 그건?”
“옐로우 카드.”
경고라는 뜻이다.
벌써부터 프리아 여신의 분노를 사면 곤란한데.
기회는 이제 한번.
저 노란 카드가 붉은색으로 바뀌기 전에.
회랑에서 돌아온 내 본래 목적도 끝을 내야 한다.
“계시를 받은 게야?”
“그래.”
“그런 것 치고는 변한 게 없는데.”
“왜 없어. 이게 내려왔잖아.”
내가 손에 든 가로 10센티, 세로 20센티 정도 되는 경건한 디자인의 서적을 들어 보여주자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법을 어긴 법조관은 법전으로 맞아 죽었지만, 신이 만든 신의 금기를 범한 놈들은…….”
성전으로 처맞아야지.
“그냥 성전?”
“그냥이라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나는 묵묵히 책장을 펼치고 그 첫 장을 열었다.
동시에 빛이 스며들며 내 몸 안에 방대한 힘이 눈뜨기 시작했다.
게으름의 선두주자였던 신성력이.
순식간에 활성화되며 그 활발한 사령마나마저 짓누르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광신도가 따로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사용해달라고 소리치는 신성력을 그대로 풀어헤쳤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책의 두 번째 장을 펼쳤다.
[신께서 가로되]
[이 땅을 성전의 성역으로 선포하셨도다.]
쿠우우우웅!!!!!
동시에 내가 서 있던 하늘 위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신의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성역이라.
미약한 인간이 만든 성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성력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절로 경건함 느낌이 들게 할 정도로 방대한 힘이 일대 영역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천사의 깃털 같은 것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며 오염된 지면들이 정화되듯 퍼져나간다.
아이의 원념이 모여 만들어진 요르간으로 인해 생겨난 죽음의 땅도 대번에 증발하듯 정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무식한 영역이 단순 이곳뿐만 아니라 대륙 전역에 퍼져나갔으니 그 힘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프리아 주신의 극대노가 아주 판을 깔았구나.
나는 조용히 통신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기사총장, 데이비입니다.”
-데이비 단원?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겐가!?
역시나.
신의 분노가 세상 전역에 퍼진 모양이다.
세상에는 두 번의 금기가 먼저 범해졌었다.
첫째는 주신의 몽환의 세계에서 내가 금기의 업을 발현한 것이고,
둘째는 베르단데가 키웠던 국왕 그리드 국왕이 저질렀던,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저질러졌던 금기의 연금술이다.
하지만 전자는 정확히 말해서 주신 프리아 여신의 계략 중 일부였고, 후자는 금기가 완성되기 전에 내가 저지한 바 있다.
그런 마당에, 감히 외부의 존재가 이 땅에 스며들어와 금기를 범했으니.
주신 프리아 여신의 분노를 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신성력 한 줌 없던 인간조차 경건함에 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 정도로 방대한 힘에 기사총장 클로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얼요. 선 넘은 놈들을 자비로우신 신께서 직접 조지기로 작정한 거지. 그보다 여긴 몰살시켰으니 사후처리 부탁합니다.”
-뭐…… 뭣?! 저들이 경계하지 않게 조용히 잠입만 하라고…….
“아뇨, 그 자식들 이제 숨지도, 도망치지도 못해요.”
설사 차원을 넘는다 해도.
남은 건 자신들을 버린 신의 앞으로 끌려가 제발 한치의 자비만 내려주기를 바랄 수밖에.
자비의 대명사인 자비의 신이 자비를 버린 게 뭘 의미하는지 그놈들은 알 필요가 있다.
* * *
소왕국 알타샤.
알타샤 왕국의 재무대신이자 알타샤 왕국의 실세이기도 한 돈마나는 이마에 노예의 낙인이 찍혀 비명을 지르는 소년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끄아아아악!!!”
“허허허, 누구인가?”
왕국의 어전에서. 재무대신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 거만하기 짝이 없다.
“누가 비명을 내었어!”
“재…… 재무대신.”
“폐하! 폐하께서 계신 이 경건한 어전에서 감히 비명을 내는 자는 그에 걸맞은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전 국왕이 어린 아들을 두고 서거한 탓에 고작 12살 된 아이가 왕이 된 기괴한 현상에 놓인 알타샤 왕국은 사실 재무대신 돈마나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많은 비리를 저질러왔고 권력을 이용해 약자들을 철저히 괴롭히고 짓밟아왔다.
지금 또한 그러했다.
재무대신 돈마나는 바닥에 쓰러진 소년, 브루고스 후작을 며칠 만에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본래 후작이었던 브루고스 후작을 누명을 씌워 죽인 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인 어린 소년을 후작에 앉히고 또 다시 괴롭힌 것이다.
괴롭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이 50이 넘은 돈마나는 브루고스 후작이 된 소년의 어린 여동생 또한 노렸다.
“폐하. 신이 보아하니, 저자의 머릿속엔 악귀가 가득하옵니다. 여보시게 기사단장. 뭘 하는가.”
돈마나의 말에 기사단장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악귀의 머리를 베어 죽이지 않고.”
국왕의 어전에서, 국왕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귀족을 베어 죽이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침묵하는 기사단장의 모습에 재무대신은 천천히 걸어 나가 소년의 턱을 잡아 끌어올렸다.
“악랄한 놈.”
노예의 낙인이 찍힌 이마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브루고스 후작이 된 소년이 침을 뱉었다.
“네놈이 정체불명의 조직에 국고의 자금을 대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남들이 들리지 않게 씹어뱉으며 노려보는 브루고스 후작의 말에 재무대신 돈마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렇네. 일루미나티라고, 제법 이용가치가 높은 조직이지. 인정하지.”
“이 악랄한 놈.”
“한데, 후작은 그걸 알면 안 되었네.”
빙그레 웃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그 모습에 후작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광기와 즐거움, 그리고 여유가 가득 담긴 괴물 같은 미소를 지은 재무대신 돈마나의 표정에 후작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격분했다.
“잘 가시게. 자네 같은 충신이 몇이 있어도 정세는 변하지 않아. 그리고…… 자네의 여동생 말이네만…….”
그 말에 후작의 눈이 부릅 뜨여지자 돈마나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제법 즐거웠네.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긴 했지만, 사람의 몸은 죽고 나서도 잠깐은 따뜻하거든.”
모욕의 극치를 달리는 그 말에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썼다.
몸이 묶인 쇠사슬을 잘그락 소리 내며 발버둥 치는 그 모습에 재무대신 돈마나는 관심 없다는 듯 천천히 돌아섰다.
후작 소년은 빌고 빌었다. 제발 저 악랄한 괴물을 처치해달라고, 제발 자신과 국가, 그리고 어린 국왕을 구해달라고.
그때였다.
새하얀 빛이 재무대신 돈마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성스러운 빛이었지만, 데이비가 성경을 펼침으로 인해 생겨난 변화라는 걸 그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