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6화
165. 정리해고
“리인포스 알파, 기사단. 데이비 올 라운 단원…….”
말끝을 흐린 노인 하나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호자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수호자들을 모두 처리한 것도 모자라 총괄 수호단장인 바사라마저 당할 거라곤 예상치 못한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노령의 원로들의 표정에는 공포감 같은 건 묻어있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한 채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조금만 더 가까워져도 당장 공격이 닿을 법한 위치였지만 원로들은 당황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묻고 있네.”
“그 대답을 들으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바사라의 손이 꿈틀거렸다.
“현실이 바뀌기라도 합니까?”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겠지.”
“간단해요, 독버섯인지 식용버섯인지 구분도 못 하는 멍청이 수뇌부는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내 빈정거림에 원로 몇몇의 표정이 굳었다.
“데이비 단원!! 감히 일개 단원이 지금 중앙 3원로님께 무슨 말버릇인가!”
저들의 말은 모순이 있었다.
기사단의 수뇌부와 원로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기사단을 하나로 규합해 좀 더 체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수뇌부의 어리석음으로 기사단 근본의 이념이 흔들린다면, 그 수뇌부의 존재 필요성은 없는 것과 같다.
격분한 이들의 외침을 무시한 채 나는 몸을 돌렸다.
공허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이들에게 향할 뿐이었다.
“사고는 제가 일으켰는데 왜 선생님이 이러고 계십니까.”
“제자의 규율위반은 스승이 감당해야 할 몫이네.”
지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보리스에겐 놀란 감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담담한 체념이었다.
“데이비. 그만, 그만하게.”
“그건 안되죠.”
가볍게 쇠사슬을 끊어내자 보리스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잡았다.
저 단단한 육신에서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장기적으로 고문을 가한 흔적이 보였다.
“이곳은 기사단의 심장부!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다 하여도 이곳에서 결정 난 사안은 절대적일세. 그리고 규율을 어긴 건 사실이지 않나…….”
“아뇨, 규율을 어긴 건 선생님이 아니라 저쪽에 앉은 노친네들입니다.”
“데이비…….”
보리스를 뒤로한 채 필디르나 지친 얼굴로 주저앉아있는 루시아 쉘만의 뺨을 잡아 동공을 확인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빛을 밝혔다.
예상대로 루시아 쉘만의 동공은 나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시력이 망가졌구나.’
‘강한 빛을 장시간 강제로 쬐거나 안구에 무리를 장시간 가하면 생기는 증상이야.’
채찍에 얼마나 맞았는지 전신이 피 칠갑인 샤이르렌다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공포에 질려있었고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 펜디르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재판 당시만 해도 별문제가 없던 이들이 싸움 소리에 곧장 반응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몰골을 말없이 지켜보던 내가 천천히 물었다.
“이들을 고문한 게 누굽니까.”
“네 이놈!”
“누구냐고.”
삭막할 정도로 무신경한 목소리에 주변 분위기가 일변한다.
허공에 떠오른 검들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대답 안 한다 이거지.”
짧게 한숨을 내쉰 내가 손을 가볍게 흔든다.
동시에 하늘에 떠 있던 철검들이 오러 블레이드를 강하게 뿜어내며 지상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한다.
쾅!! 쾅! 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지면을 갈라버리며 내리꽂히는 지옥이 펼쳐지자 원로들 중 일부가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하라!”
그때 중앙 3원로중 한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게 호통을 쳐왔다.
“일개 단원이 무슨 권한으로 이리한단 말인가! 네놈의 행동 어디에 정의가 있고 어디에 숭고한 이념이 있는가!”
“정의, 이념. 말은 좋네. 규율의 틈을 이용해서 죄 없는 이들을 사형시키려 드는 이들이 정의나 이념을 찾나?”
내 빈정거림에 한 노인이 격하게 소리 질렀다.
“어쭙잖은 궤변을! 저들이 규율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한 항목만 보면 그렇겠지.”
“무슨 소리냐.”
“기사단의 활동 규율에 따르면 특수한 경우 바깥의 존재와 접촉을 하여 문제를 해결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항목이 있을 텐데…….”
“네놈의 말은 즉 현재 속세의 일이 그런 특수상황을 접목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 말하고 있는 것이냐?”
“웃기는 소리입니다. 헥토르 원로. 바깥 속세의 일은 인간의 마찰입니다. 기사단이 끼어들 이유는 없지요. 저 철없고 어린 단원이 그저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들의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
내가 보낸 보고서를 읽지도 않았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기사총장님, 제가 추가한 보고서를 보낸 건 맞죠?”
그렇게 말한 내가 클로멘 기사총장을 불렀다.
“맞네. 자네의 첨언 또한 직접 확인했고 직접 상층부로 올려보냈네.”
그런데도 저런 태도라…….
‘페르세르크.’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우선순위를 처형에 먼저 둔 거지.’
‘그렇단 말이지.’
침묵 속에서 나는 천천히 성경 원본을 꺼내 들었다.
육신의 붕괴는 회복마법으로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지만, 정신 마법은 자아가 유지되고 기억이 있는 이상 어떻게든 트라우마가 된다.
쌍둥이 정령사 자매는 무엇이 두려운지 계속해서 몸을 떨었고, 루시아는 예전의 발랄함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성경 원본의 아직 펼쳐지지 않은 네 번째 장을 펼쳤다.
[네 번째 장]
[공란]
공란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담는 것이 곧 힘이다.
[다섯 장중에 네 장이 징벌이라면 한 장 정도는 줘도 상관없잖아요. 안 그래요? 히스테리 부리고 싶은 건 이해하는데. 한 장은 내가 씁니다.]
우우우웅!!!
내 의지가 기도가 되어 성경의 공란에 스며들자 그곳에 신비로운 문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요지는.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힐]
프리아 여신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성경 원본이 빛을 내는 것을 확인한 뒤 가볍게 신성력을 끌어내 다섯의 남녀에게 간단한 회복마법을 걸었다.
늘 사용하던 신성 마법과 비슷하지만, 마법은 책에서 흘러나온 힘에 집어 삼켜지며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했다.
그 증거로, 육신을 치료하는 힐 마법이 그들에게 스며들자 그들의 표정이 공포에서 안정감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따스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잠들 듯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을 치유한다.
트라우마 같은 기억조차 아물어버린 것처럼 그저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의 고위치유능력이 바로 지금의 기적이었다.
빛에 휩싸여 서서히 잠이 들 듯 쓰러진 그들을 륀느와 일리나가 천천히 옮겼다.
“잘 들어라, 바깥의 일은 인간끼리의 분쟁일 뿐 기사단이 나설 일은 아니다. 따라서, 외부인원과 접촉한 앵커나이트소속의 기사들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보고서엔 분명히 중요 첨언을 적어두었었다.
일루미나티는 분명 외차원에서 온 침략자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시 인간 속세의 문제를 넘어서 대륙의 존망에 큰 문제가 될 거라는 것을 밀이다.
“이전엔 그래도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네 이놈!!!”
원로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창을 쾅! 소리 내며 지면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그 나잇대의 노인답지 않은 빠른 움직임으로 내 앞에 내려서며 창끝을 내게 겨누었다.
“드높은 기사단의 규율은 임무를 받고 속세로 나간 자가 바깥의 존재와 접촉하는 걸 엄격히 금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네놈은 그 규율위반의 원흉이 아니더냐!! 그런 주제에 이런 태도라니! 뻔뻔하구나!”
“내 죄라면, 지인도 아닌 이들을 처형하는 당신들이 무능해서 해고시키는 것 뿐이야.”
“닥쳐라!! 그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격하게 외친 그가 창대를 또 한 번 바닥에 내리쳤다.
동시에 그가 쥔 창이 주홍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내 재판장의 허공에 거대한 문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슈르르르르르륵!!!
그리고, 그 거대한 문양이 빛을 뿌림과 동시에 수십 갈래의 주홍빛 밧줄이 지면에서 쏟아져 나와 나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주홍빛 밧줄의 힘은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나를 포박함과 동시에 내 몸 안의 마나를 빠른 속도로 빼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로들이 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삼 놀랄 것도 없긴 하다만.
“판결을 내리겠다. 데이비 올 라운 기사단원, 그대는 본디 기사단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온바, 그 공헌을 인정하여 이번 사태에서 근신처분 정도로 처벌을 끝내려 하였으나 반역을 일으킨 죄목을 덮긴 힘들다고 판단. 사형을 선고한다.”
동시에 그의 창끝에서 빛이 나오며 사방에 주홍빛 형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 심판자!”
놀란 기사총장 클로멘의 경악 어린 외침이 들려온다.
심판자라.
“라스트위스프 기사단의 창립자들의 힘 일부를 담아놓은 최후의 보루다. 저들의 힘이 깨어난 이상 그 잘난 신성력도, 마법도 이곳에서 더는 사용할 수 없을 거다.”
그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자신들만의 신념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바깥에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창을 든 원로의 행동에 따르듯 주홍빛의 형체들이 각기 무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무…… 무슨?! 움직여라! 움직여! 저놈을 처단하라!”
생각외의 모습에 당황한 원로가 급히 창을 휘둘러보지만, 주홍빛의 형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를 향해 소리치는 원로를 보며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물건을 보여주었다.
아공간에서 나온 것은 접이식 금속으로 만들어진 단궁이었다.
투박한 외모를 지니는 접이식 단궁일 텐데도 그 외향은 유려하고 깔끔했다.
작지만 특이한 문양을 지닌 단궁의 이름은 신궁 브류나크.
라스트위스프의 창립자인 신궁 아폴론의 근본이며, 그의 상징이기도 한 무기다.
무엇보다 이 활은.
기사단의 힘인 저 창의 열쇠이자, 진품 아닌 진품이라는 점.
내 아공간에서 꺼낸 물건들은 하나같이 진품이 따로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이 가짜일 리는 없다.
신의 힘으로 인해 구현된 그것을 사용한 존재가 만들어낸 복사본이니 말이다.
진품이면서 진품이 아닌 것.
그것이 내가 가진 신물들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철컥! 찌이이익!!
단궁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활이 주홍빛의 빛을 뿌리기 시작하자 나를 포박하던 밧줄들이 일제히 바스러지듯 무너져 내린다.
이윽고 손발이 자유로워진 나는 단궁을 가볍게 조작했고 무언가 기계장치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낚싯줄을 당기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마어마한 장력을 품은 장궁이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내뿜자 원로들의 얼굴에 경악성이 어린다.
“그…… 그건 설마!!”
“신궁 아폴론은 몰라도 초대 성녀 다프네가 당신네 꼬라지를 봤으면 지옥 끝에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을 거다.”
일생을 바쳐 만들어낸 숭고한 기사단이 이토록 타락한 것을 알면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으…… 으응…… 아니에요…….”
“음?”
그때 내 말을 부정하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잠에 빠져든 루시아 쉘만이 잠꼬대를 하는 게 보였다.
“으음…… 초대 성녀 다프네 님은…… 위대하신……. 음냐…….”
“자면서도 극성이네…….”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돌린 나는 머쓱함에 헛기침을 한 뒤 활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동시에 주홍빛의 화살이 만들어지며 활대에 걸렸다.
“그…… 그건 분명히 선조께서 부숴버렸을 텐데 어떻게?!”
어쩐지, 기사단 내에 브류나크를 아는 이가 없더라니.
치지지직…….
정자세로 활시위를 당긴 나는 화살의 끝을 하늘에 뜬 커다란 기사단 문양의 정 중앙을 향해 겨누었다.
창을 통해 일어난 주홍빛 형체들은 내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마치 진짜 주인을 모시듯 말이다.
투웅!!
어마어마한 반동과 함께 활시위가 문양을 꿰뚫는다.
동시에 주홍빛 형체들이 일순간 흩어지듯 뒤틀리더니 이내 서서히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결되어있던 신성력과 마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단 규율 첫 번째.”
[라스트위스프, 대륙의 그림자로써 대륙의 존재의 존폐에 위험을 끼치는 외부존재, 마물을 방어하고, 처단하는 것에 신념을 바친다.]
“외차원에서 온 침략자라는 보고를 올렸음에도 당신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보고를 의도적으로 무시. 기사단의 소중한 인원을 죽이려 했다.”
“…….”
“보고서를 안 읽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일부러 무시한 거지?”
그래야 보리스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보고서대로라면 보리스를 죽일 명분이 사라지니 저들은 어쩔 수 없이 이번 일을 무시하고 그를 죽인다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내 빈정거림에 원로 하나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외차원의 존재는 속세의 문제가 아니야. 마물보다 한 단계 높은 위험한 적이다. 그걸 모른다고 할 리는 없을 테고.”
“흥! 그렇다 한들 네놈이 우릴 어찌할 테지? 그 잘난 규율대로 움직이고 싶으면 우리를 죽일 순 없을 거다!”
그의 말대로였다.
원로급의 존재는 국회의원처럼 불구속특권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은 내가 신궁 브류나크를 들었다는 게 이 기사단에 무슨 위치를 대신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가장 혐오한다.”
악법은 고쳐야지.
“내가 말했잖아. 기사단 창립자의 후계자의 위치로 당신네를 처벌하겠다고.”
기사단은 왕족이 없다. 모두가 협력하는 동지들.
하지만, 창립자인 아폴론은 후대에 기사단이 부패할 것을 우려하여 다프네와 상의 후 한가지 약속을 남겼다.
창립자의 후계자는 암행어사로서, 기사단의 잘못된 점을 고칠 권한, 그리고 원로마저 처벌할 권한을 지닌다.
별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해 그것을 제대로 전승하지 않았지만, 아폴론이 회랑에서 나를 만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지금 원로들의 선조는 신궁의 무기 브류나크를 부수면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제거했다.
하지만 설마 신궁이 하나 더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들은 전부 직위해제, 및 해고야.”
짐이나 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