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2화
167. 말살
주신 프리아 여신의 힘이 서서히 사라진다.
멈춘 시간은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고, 디센트의 손에 의해 파괴된 세상의 흔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돌아왔다.
신의 흔적, 신의 계시. 혹은 신물.
그 어떤 것을 봐도 이토록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콘타스 제국의 기사들은 주신 프리아 여신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삼 제국 중 가장 자유로운 제국이 바로 이 콘타스 제국이다.
당연히 격식보단 실질적인 것을 따지는 국가이다 보니 야만적이라는 소리는 듣지만 그만큼 자신들만의 문화가 존재한다.
그 문화중에 하나가 종교의 의존도가 굉장히 낮다는 점이었다.
신관의 회복능력은 높게 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교를 자애의 여신인 주신 프리아 여신 교단으로 내세우지 않고 그저 종교의 자유만을 보장한다.
당연히 콘타스 제국의 인간들은 당장 신이랍시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은 인간들이 모인 국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쉽게 머리를 들지 못한다.
유일하게 멍한 얼굴로 정신을 차리고 있던 이는 콘타스 대제였다.
“왜 그러십니까.”
프리아 여신이 떠난 직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콘타스 대제에게 향한 내가 조용히 묻자 그가 떨떠름하게 질문해왔다.
“데이비…… 왕자, 맞는가?”
“예.”
“그럼 방금은…….”
“주신 프리아 여신이 잠시 제 몸에 강신한 겁니다.”
설명을 들은 대제는 한참 동안 멍한 얼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신의 흔적도 아니고.
실체를 본 이가 아무도 없는 여신 본인이 강림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거대했다.
“신성력에 대해 잘 모르는 짐조차 이곳이 너무 성스럽게 느껴지는군…….”
“아마 향후 10년 정도는 대륙 최고의 성역으로 유명해질 겁니다.”
“그렇군…… 그리 달가운 반응은 아니야.”
“가능하면 숨겨주세요. 여신이 강림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반향을 일으키니까.”
내 말에 공감하듯 그가 침묵했다.
성역, 좋은 단어이긴 하다.
하지만 그만큼 너무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함부로 개발할 수 없다는 점부터 해서 하필이면 종교를 그저 추가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콘타스 제국의 수도가 성역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제국 내에 신전의 입김이 극도로 강해진다.
아마 그가 고민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리라.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기사들을 향해 역정을 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대제는 일이 일인 만큼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부분을 짚어 내게 의문을 던져왔다.
“한데…… 프리아 여신의 모습이 자네를 통해 투영된 것이라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 저 소녀는…… 설마 여신님이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떨떠름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아 여신이 내 몸에 강신하며 변화했던 모습은 누가 봐도 원반과 날개가 없는 륀느의 모습이었다.
나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간 대제는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륀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쓰러진 륀느의 목덜미와 허벅지를 받쳤다.
“허리 조심하세요.”
“무슨 말을…… 커헉?!”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대제는 륀느를 들어 올리려다 그대로 자세가 무너지며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다.
“커흠!! 크흠!”
륀느의 위로 엎어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눈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대제는 곧 그를 바라보는 기사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대…… 대제…….”
“지워라.”
“예?”
“지금 본 것을 지우란 말이다. 당장.”
“예, 옙!!”
“목숨을 바쳐 머릿속에서 지우겠나이다!”
찢어 죽일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인 대제는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자세를 바로잡은 후 나를 노려보았다.
왜 나를 보시나.
물론 내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려주지 않은 탓에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륀느를 내려다보다 다시금 힘을 주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륀느 잘못 들다간 허리 다칩니다.”
“짐을 우습게 보지 마라, 흐읍!!”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다량의 마나가 쏟아져나오며 륀느의 몸이 처음과 다르게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새, 생각보다 튼실하군. 제국의 여인들보다 더 든든한 느낌이야.”
마나를 사용하여 부담 없이 들어 올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 이상의 무게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였다.
륀느의 중량은 대략적으로 200kg이 조금 넘는다.
겉보기엔 작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내부에 든 부품들이 그만큼 묵직한 무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내막을 그가 잘 알 리가 없다.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를 향한 경의인지는 몰라도 대제는 그녀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본제로 돌아가지. 프리아 여신의 모습은 이 소녀와 흡사, 아니 완전히 같았다. 이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나도 모릅니다.”
“뭐라? 그대는 신의 성자가 아닌가.”
“성경이나 역대 고서 다 뒤져봐도 신의 모습에 대해 제대로 설명된 건 단 한 곳도 없어요.”
모두가 두루뭉술한 설명뿐이었다.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겠나.”
“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내 심플한 대답에 대제는 한참 동안 멍하니 륀느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하면 그녀를 우리 콘타스 제국의 황성에 모셔서 신녀로써 대접하겠네.”
그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대제.”
싸늘하게 웃으며 그를 밀어내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왕자는 참 겁이 없군.”
“겁이 많았으면 이런 계획도 못 세울 겁니다.”
“그래. 아직 남은 잔당들이 있었지.”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말해보라, 아직 남은 잔당들은 어찌할 생각이지?”
“어쩌긴요. 냅두면 됩니다.”
“뭐?”
심드렁한 륀느를 고쳐 업은 내가 느긋하게 말했다.
“기다리면 소식이 올 겁니다.”
프리아 여신은 내게 말살을 명했고, 나 또한 내 방식대로 그놈들을 뿌리 끝까지 말살할 생각이었다.
프리아 여신의 여파가 닿지 않은 것은 일루미나티의 근원, 총수 디센트가 넘어왔던 페스리사 대륙 출신의 흑마법사들.
비록 총수가 죽었다지만 그들은 아직 남아있다.
그렇기에.
나는 말살 대상들을 정리한 인원을 보낸 바 있다.
* * *
본래라면 하인스 영지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심력의 소모가 너무 막심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주신 프리아 여신의 존재가 강림함으로 인해 대부분의 심력이 고갈되어버려 상당한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데이비, 심력의 소모가 많이 심해?”
“그래. 죽을 거 같다.”
성경 원본을 써도 이 정도라니. 성녀나 성자 급의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한번 강신을 한 것만으로도 그대로 혼이 육신을 떠나 윤회의 고리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부작용이었다.
“마나는 충분한데 말이야.”
지친 얼굴로 늘어지듯 앉아있는 나는 한 쪽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있는 륀느를 바라보았다.
“깨어나서 물어본들 제대로 알아낼 수 있는 건…… 흐아아암……. 없겠지.”
내 말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데이비.”
내가 하품을 하며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자 페르세르크는 머리를 묶은 커다란 리본을 가볍게 풀었다.
그러자 은빛의 머리카락이 사르륵하며 풀리며 아름답게 흩날렸다.
“엎드려 보겠어?”
그녀의 말에 내가 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 몸을 부축해 나를 넓은 침대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내 등위에 올라앉았다.
“뭐 하는 거야.”
“심력의 소모는 자연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어. 그대는 이번 일 이외에도 많은 시력을 소모해왔으니까. 이 정도는 본녀가 도와줄 게야.”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엉덩이 위쪽에 앉아 작고 흰 손으로 내 등을 지압하듯 꾹꾹 눌렀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다리를 간질이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이렇게 접촉하고 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거, 좀 버티기 힘드니까 내려올래?”
“가만히 있어.”
고혹적이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양손으로 내 척추를 꾹꾹 눌렀다.
“마사지의 일종인 게지, 그대가 하는 무식하고 우악스런 마사지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과 팔꿈치를 이용하여 등을 이리저리 마사지하는 그녀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처음엔 저항하던 나였지만 이내 괜한 저항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파묻어버렸다.
“데이비? 귀가 빨갛다만.”
“혼인하고 두고 보자.”
“쿡쿡, 그때까진 본녀가 우세하겠구나.”
키득거리며 그녀는 내 등위에 올라앉아 손장난을 쳤다.
장난기가 심해도 스스로 부끄러워 이런 짓을 잘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나도 의문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 질문에 내 등을 마사지하던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등의 촉감을 느끼기라도 하듯 다시금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주신께서 그대를 거둬 가려 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솔직히 상당히 무서웠다네.”
“…….”
“욕심이고 오만인 건 알고 있다만…… 좀 무서웠어…….”
이윽고 그녀가 상체를 엎드려 내 등위에 몸을 포개었다.
그리고는 내 날개뼈 쪽에 고개를 묻으며 조용히, 그리고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지 마, 데이비…….”
“…….”
“본녀의 마음을 흔들 대로 흔들어놓았으면 이제는 책임을 져야지.”
“어디 안가.”
짧게 일축한 나는 침묵했다.
프리아 여신이 내 영혼을 신부로서 거두어 가려 했다면 나도 죽기 살기로 저항할 생각이었다.
내겐 그녀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하나 존재했으니 말이다.
다만,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이리 두려워서 스스로 나서는 페르세르크를 보니 금기의 업보를 사용하지 않은 게 외려 잘된 것인가 싶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로 있어 주라.”
내 말에 평소라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떨어졌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등에 머리를 파묻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
“일루미나티 소식은 금방 전해져올 거야. 그놈들 처리 끝나면…….”
말끝을 흐린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혼인하자.”
굳이 스케일 넓게 할 필요는 없다.
“신혼여행도 가고.”
엎드린 자세로 얼굴을 파묻은 채 내가 킥 웃자 페르세르크의 몸이 짧게 움찔거렸다.
“본녀는 아이를 가지지 못해. 이 육신은 가짜니까.”
“아이가 필요한가?”
자식이라는 결실을 꼭 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자식을 위해서 너와 혼인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페르세르크 또한 내 등위에 엎드린 채 내 수마에 휩쓸린 듯 그대로 잠들었다.
셋 모두가 눈을 뜨지 않고 잠든 고요함이 이어진다.
그날은, 놀라울 정도로 꿈 하나 꾸지 않은 채 포근함을 느끼며 잠들었다.
“일어났냐 인간!”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품 안에 잠들어있는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가 눈앞에 있는 청발의 소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니가 여기서 왜 나와?”
내 눈앞에 있는 건 심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키리아.
케인이 있었다.
“전언이다.”
페르세르크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뒤 그녀를 눕힌 나는 이전과 다르게 상쾌한 몸을 가볍게 풀며 물었다.
“전언? 일리나에게서?”
“아니, 나의 주신께서.”
그 말과 동시에. 철없고 성격대로 사는 케인과 다르게 상당히 느긋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데이비 올 라운. 나는 발키리아, 케인을 통해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넬타리드 본인인가?”
“아뇨, 그분은 저 같은 피조물이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분이십니다. 제가 전해드릴 말씀은…….”
케인은 케인인데, 마치 이중인격이라도 된 것처럼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이제야 진짜 신의 사도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케인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심연의 근원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