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3화
대륙 곳곳에서 동시에 많은 일이 있었다.
페르세르크와 데이비가 잠들었던 그 시각.
남부 요새 전투지역에서는 인간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 마법 장벽이 붕괴되면서 흑마법사들의 공세가 제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새가 뚫리면 수도까지 직선으로 지름길이 뚫리는 것과 같다. 절대로 사수해야 했다.
“젠장 괴물 놈들!”
악마의 현신마냥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 언데드들을 밀개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던 실바는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마법을 보고 본능적으로 자리를 이탈해 숨기고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쾅!!! 쾅쾅쾅!!!
수많은 마법 폭격이 이어진다.
마법에 대한 방어능력이 뛰어난 요새였다.
대 마법 방진으로 인해 어지간한 마법은 닿기도 전에 멈추게 하는 것으로 요새의 난해함을 더해왔다.
그런 방진이 부서진 탓에 사방에서 비명이 가득하다.
한차례 마법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실바는 몸을 벌벌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였다.
요새는 난장판,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함성을 지르며 적과 싸운다.
용감함이 기본탑재되어있다는 콘타스 제국민 답지 않게 겁이 많은 실바였지만 그 겁이 이번엔 그의 목숨을 개죽음에서 구원해냈다.
와들와들 떨며 몸을 일으킨 그는 그제야 전장의 현황을 볼 수 있었다.
전보다 더 많아진 언데드 군단. 그리고 넓은 성벽을 부숴버릴 듯 계속해서 날아드는 검은 마법들까지.
문득 실바는 이것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목숨을 구걸하듯 숨어본들, 저들이 이곳을 점령하는 순간 자신은 죽을 것이다.
도망칠까? 도망쳤다간 이곳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의 손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여긴 콘타스다!!]
헐벗은 듯한 몸으로 박력 넘치게 그렇게 외치며, 도망치자던 휘하 장군을 우물 안으로 걷어차 떨어뜨려 버린 장군의 일화는 유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압!!!”
성벽을 기어 올라온 언데드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군의 모습에 실바는 섬뜩함을 느꼈다.
용감한 건 좋은데 이건 너무 무모하지 않나.
저들은 숨기고 있는 한 수가 더 많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한다!
본능적인 생각이 든 그는 장군을 향해 뛰어갔다.
자리를 이탈한 꼴이 되긴 했지만 알려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개죽음이라고, 차라리 물러나 전열을 정비하는 게 더 옳다고.“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다. 겁쟁이는 필요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곳을 지키는 수천의 병사들을 모두 죽게 둘 순 없었다.
“자…… 장군님!!”
말단 병사였지만 실바는 맨몸으로 언데드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장군을 향해 뛰어가다 눈을 부릅떴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언데드가 그의 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장군을 밀어낸 실바는 기습 공격을 당할뻔한 그를 구해냈다.
갑작스런 힘에 바닥에 쓰러진 장군은 실바의 그런 행동에 놀란 듯, 또 분노한 듯 했지만 이내 눈을 부릅떴다.
“자네!!!”
그도 그럴 것이 장군을 향해 덤벼들던 언데드가 타깃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검을 휘둘러 실바를 죽이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걱!!
이윽고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장군도 실바도 모두가 언데드의 무기가 실바를 베어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멀쩡한 실바의 모습에 장군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건 일개 병사가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바는 멀쩡했다.
그렇다면 방금의 파육음은 대체 무엇인가.
멍하니 있던 장군은 문득 실바를 베어버린 언데드의 머리가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언데드 중에서도 상위 언데드였다. 그런 언데드의 머리통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스르릉…….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어마어마한 투기를 개방한 한 사내가 검을 든 채 내려섰다.
“부상자는 물러나라.”
오만할 정도로 짧은 발언이었지만 장군을 포함한 실바도 놀란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검엔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머금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 내의 마스터 급 유저들은 현재 다른 요새를 지키고 있기에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성의 얼굴에 놀란 장군과 실바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바사라.”
짧게 일축한 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서걱!!
동시에 부드럽고 불규칙한 검로가 일대를 휘감았고 성벽을 타고 기어 올라오던 언데드들이 일거에 반 토막이 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데이비 왕자의 용병으로 지원을 왔다.”
데이비 왕자의 용병?
요즘 용병들은 죄다 마스터 급인가?
기가 막히는 현실이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사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혼자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되는데 성자 데이비 왕자의 용병은 그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성벽의 다른 부분에서 각기 어마어마한 투기를 지닌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수는 일곱.
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가 마스터 급 존재들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었다.
“규율에 따라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라.”
바사라의 선언에 각기 지역에서 대량의 투기를 뿜어내던 이들이 한발 두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곱 모두가 일제히 성벽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적들이 바글바글한 적진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행동은 마스터라 할지라도 무식한 짓이었다.
개미 떼마냥 몰려오는 언데드의 파도는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7명의 남녀는 하나의 지우개가 되듯 움직였다.
그들이 닿는 곳에는 새카맣던 언데드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져만 갔다.
멍한 얼굴로 성벽에 기대어 선 채 전장을 유린하고 있는 일곱 남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른 병사들도 같은 생각인지 그저 멍청한 얼굴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물론 흑마법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갑자기 난입한 일곱의 마스터 급 강자로 인해 힘의 밸런스가 한순간에 기울어버리자 그들은 무리하게 다시금 처음 사용했던 아티펙트를 사용했다.
공기의 변화.
검은 구슬을 꺼내든 그들은 다시금 대기를 뒤틀고 흔들었다.
질소가 대부분, 산소가 일부인 공기의 구조를 뒤바꿔 산소를 지워버린 것이다.
산소를 잃어버린 인간들은 숨을 쉬지 못해 목을 쥐고 컥컥거리며 괴로워했다.
처음 이 마법이 발현되었을 때, 그때엔 범위가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좁은 범위로도 요격을 위해 움직였던 용감한 기동타격대가 모조리 몰살당해버렸다.
인간에게 호흡이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전장 전역에 걸쳐 어마어마한 저주를 퍼붓는 그 행동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실바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던 실바는 서서히 시야가 노랗게 뜨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였다.
하늘 위로 새까만 무언가가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새까만 형체의 주변으로 토네이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찮은 미물들이 감히 내 앞에서 대기를 조절하려 드는가.]
강제로 하강기류를 만들어 공기를 순환, 산소가 제거된 공기를 갈아 치워버린 거대한 형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다.
“커헉…… 헉…… 헉…….”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거대한 흑룡을 바라본 실바는 곧이어 흑룡의 입에 모여드는 녹광의 구체를 보고 주저앉아버렸다.
흑룡은 정확히 흑마법사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죽어라, 벌레 같은 놈들.]
급히 흑마법사들이 도망치거나 방어마법을 전개한다.
하지만.
부욱!!!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속도로 브레스가 지면부터 흑마법사들이 있는 평원, 그리고 하늘까지 갈라버릴 듯 쏘아졌다.
마치 거대한 수압을 이용하는 칼처럼 아래에서 위로 갈라버린 것이다.
* * *
어두운 동굴 속, 그곳에서 누군가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총수께서 당했어요. 일단은 고향으로 후퇴해서 재정비해야 합니다.”
“이미 넘어왔습니다. 돌아가는 게 쉬운 줄 아시오? 데스 로드 님의 은총이 없다면 불가능할 거요.”
작당모의를 하듯 떠드는 그들의 모습은 조급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움직이지요. 저는 재물을 가지고 돌아오겠…….”
한발 두발 물러나며 도망칠 궁리를 하던 사내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무언가에 굳어버렸다.
“크르르르르르…….”
낮게 울음을 흘리는 녀석은 다름 아닌 새하얀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호랑이의 출현에 놀란 사내가 다시 도망치려던 순간.
거대한 백호는 조용히 손을 들어 간을 보는 듯 하더니 그대로 사내를 후려쳐 버렸다.
“그게 그 유명한 냥냥펀치야?”
고양이 특유의 버릇.
백호 흰둥이의 행동에 이어 모두의 시선에 당혹스러움이 어린다.
하지만 곧 백호의 곁으로 나온 여인을 발견한 이들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
“찾느라 고생 좀 했어, 개자식들아.”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그런 이들에게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마어마한 무력과 삼 신수를 데리고 다니는 대륙의 용사.
레이나.
그녀의 출현에 기겁한 일루미나티의 잔당들이 허겁지겁 그녀에게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끄아아아아악!!!”
“불이!! 불이 내 몸에!!”
이미 포위가 끝난 상태에서 도망가본들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 * *
그 외가 라스트위스프 기사단원들은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으로 향했다.
솔직히 그들 모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하는 것은 일루미나티가 만든 최후의 보루이자 히든카드를 제시간 안에 파괴하는 것.
넓은 지역을 수색해야 하는 만큼 중요한 임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군.”
“요호호호호, 주신 프리아 여신께서는 신을 모시는 자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기사단으로써 그들은 많은 일을 겪어왔다.
하지만, 결단코 이번 일은 이야기가 달랐다.
신을 믿는 리치라니.
리치라는 존재만 해도 기겁하겠는데 그 리치가 신을 믿고 있으니 더욱 기겁할 수밖에.
뒤늦게 기사단에 배치되어온 268기 기사단원들인 필디르와 루시아 쉘만은 선배 기사들을 따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치에게 다가갔다.
데이비가 참 많은 일을 했지만, 정말 이럴 땐 그가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으흠? 무엇인가요? 의심스러운 얼굴이시군요?”
신을 믿는 정신 나간 리치, 이오의 말에 필디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당신도 데이비에게 엮인 겁니까?”
“모든 것은 프리아 여신님의 의지대로.”
뼈밖에 없는 턱을 딱딱거리며 웃어대는 그 모습에 기가 막힌 지 루시아 쉘만이 이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뼈만 남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초대 성녀 다프네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제가 초대 성녀님의 생가에 갔던 이야기………….”
갑자기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이오와 루시아의 모습에 다른 선배기사들이 적절히 당황한 듯 했지만 이미 스위치 올라가 버린 루시아 쉘만은 초대 성녀 다프네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아닌데요?”
그때였다.
“다프네 씨가 그럴 리가 없는데.”
혼란스레 중얼거린 이오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네? 무슨 말씀이시죠?”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호호호호호!!!”
허허 웃어 보이는 그 모습에 필디르는 괜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리치 이오는 그가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따로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필디르는 처음부터 이오를 보며 거슬렸던 두개골 사이에 끼인 털을 천천히 붙잡았다.
동시에.
파악!!!
“동작 그만, 남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 뽑기 있어 없어. 어?”
방금까지 여유롭던 이오의 기세가 한순간에 흉포하게 변했다.
“이…… 이오 씨?!”
“…… 헙! 제가 잠시 정신을 놨나 봅니다. 얼마 전에 데이비 님이 제 소중한 머리카락을 왕창 뽑아버리셔서…….”
그 말에 탈모가 온 기사단원들의 표정에 아련함이 어린다.
그와는 별개로 데이비의 말대로 대륙 각지에서 일루미나티의 말살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