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4화
168. 약속
케인의 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심연이 움직이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아뇨, 제 말은 심연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당신을 개개인의 무력으로 해치우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으니 이제 전력을 다해 당신을 공격하려 들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을 펼쳤다.
“네가 그걸 알 수 있나?”
“발키리아는 본래 심연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종족입니다.”
의외의 기능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은 케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유능해서 쓸모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기시감이 든다.
“심연에는 심연의 공주를 제외한 다른 존재들이 있는 것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지.”
수억의 사념이 모여 만들어진 심연의 공주는 페르세르크를 건드리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녀를 극도로 갈구한다.
실제로 몇 차례 보지 않았던가.
잘려나간 촉수 다발조차 그녀를 원했으니까.
“심연의 무력이나 다름없는 심연의 공주들을 당신이 벌써 둘 이상 처리했습니다. 아마 이제는 단순 무력만으론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하겠죠.”
사실 한명은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고, 한명은 본신의 힘까지 끌어낸 덕분에 이긴 것이지만, 심연이 그것까지 고려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덤벼라, 난 사실 한 대만 맞아도 죽는다! 를 실현하고 있는 꼴이다.
즉, 심연의 생명체들은 내가 슬리지아마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페르세르크의 육신과 영혼.
“신이 쪼개진 파편이라 신이 되기 위한 열쇠인 페르세르크를 원한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항이지만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군요. 심연의 여왕이 될 수 있는 페르세르크 님이 심연의 손에 넘어가면 오래 지나지 않아 타나토스가 깨어날 겁니다.”
“그 여파는?”
“이 땅을 포함한 모든 땅의 몰락. 빛이 꺼지고 영원한 어둠이 찾아올 겁니다. 프리아 여신이 여명이라면, 타나토스는 황혼이니까요.”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와닿은 내용은 참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넬타리드 신께서는 당신께 두 가지 전언 사항을 전하셨습니다.”
“해봐.”
“첫째, 이방인들을 포용하십시오. 그들의 무력은 보잘것없으나 힘의 방식은 넬타리드 님의 은총이 담겨있습니다. 재능을 보고 판별한 것이기에 인성까지는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심연과의 싸움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겁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방인이라, 지구에서 온 게임하는 놈들…… 다 좋아. 아무 문제 없어. 지구출신 인간이라고 문제만 일으키진 않겠지.”
실제로 나는 수소감귤맛스타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쓰는 소년을 구하고 그를 지구로 돌려보낸 바 있다.
문제는 그들의 심성이 아니라, 이 상황이다.
“넬타리드는 이 땅을 게임으로 포장해서 인간들에게 소개시켰다. 나름대로 제약이 있어서 현실이라고 인지 못 하게 인지 부조화를 걸어놨을 거야.”
게임으로 인식시키고 현실이라는 감각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간섭이 가능했던 몇몇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이곳을 현실이라 인식시켜주지 못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이곳에 와서 이곳의 인간들, 이곳의 일에 굉장히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다.
“어디든 그래, 쾌락과 재미에 흥미가 들린 인간만큼 잔인한 것도 없어.”
“당신이라면 현실을 인지시켜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지. 넬타리드 그 신과 접촉이 되면 전해, 이방인 그만 보내라고. 한 번만 더 그림리퍼 같은 사이코패스를 이 땅에 보냈다간 동맹이고 나발이고 이쪽이 가진 최후의 수단을 쓸 거다.”
이방인, 즉 지구 출신의 게임 유저에게 이상은 진실이든 게임이든 즐기기 위한 장소일 뿐이다.
하인스 영지에서 살인을 저질렀던 초기 이방인 그림은 리퍼라는 악마종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뒤틀린 살인 욕구를 원 없이 풀어댔다.
그 결과, 죄 없는 사람이 한둘 죽어 나갔던가.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시죠. 사실 이것이 본제입니다.”
그는 품 안에서 벽옥색의 작은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절대보옥의 흔적입니다.”
“절대보옥?”
내 질문에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별을 창조하는 힘이 담긴 보옥입니다. 신의 일부나 다름없지요. 본래 넬타리드 님의 것이었지만…… 현재엔 그분의 곁에서 떨어져 세상 어딘가에 잠들어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당신께서 찾아주세요. 제가 이 대륙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지만 절대보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당신과 연결된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닐까 싶네요.”
그의 말에 나는 많은 대륙이 떠올랐다.
이바노프가 있던 유르기안 대륙.
데스 로드의 고향인 페스리사 대륙.
베르델. 아트렐리아. 중원, 지구, 등등.
종류는 많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지구는 왜 출입이 안 되지?”
“글쎄요. 그 부분에 관해선 저도 아직 잘 모릅니다.”
넬타리드는 충분히 수상한 신이다.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신하기엔 신이라는 존재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넬타리드라는 신 그 자체이기도 했다.
프리아 여신과 타나토스가 서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면.
대체 넬타리드는 어디서 튀어나온 신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요지는 나보고 대신 보옥을 찾아달라?”
“도와달라는 겁니다. 저 혼자서 찾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말 나온 김에 바로 움직이시죠.”
그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미소를 짓는 소년을 보며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멱살에 손을 뻗었다.
콰악!!
그리고는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뛰는 건 한 번만 용서한다.”
“크읏?!”
내가 전할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남 결혼 조지려 들지 마라.”
“무슨…….”
“둘째, 곧 결혼하는데 훼방 놓지 마라.”
“…….”
“셋째. 당분간 방해하지 마라.”
나는 세상이 멸망하는 한이 있어도 페르세르크를 자빠뜨릴 테니!
싸늘하게 쏘아붙인 나는 그늘 던지듯 놓아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신과 심연 사이에 끼여 내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있다.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다.
젊은 청춘 한번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무엇이든 이루어내리라.
“하면 어느 정도 기다리란 말씀이신지요.”
“그래, 반년 정도?”
“제정신입니까?! 심연은 당신의 사정을 기다려주지 않아요! 그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이 땅은 물론 전 차원이 끝장입니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할 경우에 그렇겠지.”
내 말에 그가 움찔거렸다.
“발키리아, 심연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종족이라면서,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무언가도 있겠지?”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지연시켜보죠. 다만, 절대보옥을 찾는 건 해주셔야 합니다.”
“겸사겸사 해결해볼게.”
그가 건네준 녹색 벽옥의 조각을 받아들자 묘한 느낌이 전신에 감도는 기분이었다.
상당한 고양감, 진취감.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까지.
마치 마약과도 같은 변화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곧 떠나려던 그를 향해 내가 질문을 던졌다.
“이봐, 케인.”
“예?”
“넬타리드 신도 신이지?”
“무슨 불경한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의 반박에 나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신이 가지는 형체는 따로 고정된 형태가 존재하나?”
내 말에 케인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어떤 것부터 답을 드릴까요.”
“신의 형체. 신이 강림했을 때 특정 형체를 가지고 있는 건 확실히 이상현상이다. 틀려?”
“맞습니다. 신께선 형체가 없으신 초월적인 의지, 껍데기라는 형체에 얽매이는 건 피조물의 권한이지 창조주의 족쇄가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인물도 아니고 굳이 륀느의 모습을 했다는 건.”
“과거, 어떤 모종의 이유를 통해 그 모습을 한 존재에게 한번 강신한 바 있을 경우입니다.”
“데이비, 그건 무슨 뜻인 게야.”
그때 내 곁으로 은발의 소녀가 걸어들어왔다.
잠들어있었는데 그새 깨어난 모양이었다.
“페르세르크.”
“데이비. 이런 건 본녀도 좀 들려주면 좋겠어.”
“들어봐야 안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 그래서? 계속해봐 주겠느냐.”
케인에게 페르세르크가 부드럽게 묻자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데이비 당신이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넬타리드 님도, 프리아 여신님도 고정된 형태는 없으실 겁니다.”
신은 한 종족을 위한 신이 아니다.
그렇기에 엘프가 강림한 신을 보는 것과 인간이 강림한 신을 보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륀느의 몸에 한차례 주신 프리아 여신이 강신 한 바가 있다.
“그런 뜻이겠죠.”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침묵을 지켰다.
“두 번째 질문은.”
“신의 신부. 넬타리드 또한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신성력을 담을 때부터 프리아 여신의 신부로 내정되어있었다.”
“신의 신부라…….”
“내가 묻고 싶은 건 두 가지야. 왜 내가 그 신부로 내정되어있는 건지, 또 왜 하필 신부인 건지.”
그런 내 의문에 케인은 그리 답했다.
“글쎄요. 저라고 다 알지는 않지요. 저 또한 불안정합니다. 발키리아라는 종족에 대해 알 뿐 발키리아 종족이 존재하던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흐음…….”
“사실 당신에게만 드리는 말이지만, 발키리아라는 종족이 존재했는지조차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까요.”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를 믿기 힘들다면 차라리 신을 믿으십시오, 무엇이 되었건 넬타리드 님은 현재 프리아 여신님과 같이 심연 타나토스가 부활하는 게 달갑지 않으신 입장이실 겁니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넬타리드와의 관계는 그러했다.
“어쩌시겠습니까?”
“가는 길에 한 번 찾아는 볼게.”
“그럼 다른 세상 쪽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케인은 등 뒤에 커다란 날개를 소환한 뒤 서서히 흩어지듯 사라졌다.
굉장히 어리숙하고 맹탕 같던 케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혼이 둘이라…….”
“영혼이 둘?”
“이중인격 같은 게 아니야. 말 그대로 한 육신에 영혼이 둘 들어있는 거야. 저런 경우는 잘 보기 힘든데…….”
“데이비, 정말 넬타리드라는 그 신을 믿어도 될까?”
“일단 믿어보자, 문제가 있었다면 아마 프리아 여신 쪽에서 내게 무언가 언질을 줬겠지.”
그녀가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은 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써먹을 수 있는 요소가 된다.
“빌어먹을 모든 것은 운명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