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1화
170. 허당신혼
숨이 콱콱 막힌다는 것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벌컥벌컥 들이킨 와인은 당연히 취기 따윈 전해주지 않았다.
“돌아버리겠네.”
어두운 방, 방을 밝히는 것이라곤 은은한 빛을 내뿜는 마석등 하나가 전부다.
말없이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채 와인만 들이키던 그녀와 나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이비.”
“더 센 거로 가져올까?”
어지간한 술로는 취할 수가 없으니, 열반주나 우화등선 주 정도라면……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공간을 열려던 찰나.
페르세르크가 내 팔을 잡아 제지했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기절하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네…….”
담담하게 말한 나는 눈을 부릅떴다.
모든 것이 어색한 상황 속에서 익숙한 게 나오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나는 그녀가 낀 반지와 내가 낀 반지를 빼낸 뒤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말했다.
“요시아의 권능을 담아놨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건 서로를 느낄 수 있을 거야.”
“피의 계약.”
내 말에 금방 눈치챈 듯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마, 요시아 그 아이가 벌써 이 정도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게야?”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어색한 것들 사이에서 익숙한 게 나왔으니 좀 반가울까.
“그래. 내 피는 이미 담아놨어. 이제 네 것을 담으면 돼.”
내 말에 그녀는 말없이 반지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다가 작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끝에 상처를 내 핏방울을 돋게 만들었고 반지에 떨어뜨렸다.
투웅!
동시에 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녀의 피가 완전히 스며들었고, 이내 반지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손 줘.”
이후 그녀의 손을 받아든 나는 신성력을 끌어올려 그녀의 손을 치유한 뒤 미리 준비해둔 붕대로 손가락 끝을 감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말없이 반지를 다시 손에 끼우자 마치 서로가 연결된 것처럼 묘한 감각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반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빼지마.”
“본녀가 할 말이야.”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오간다. 페르세르크와 이토록 어색한 분위기에 놓여본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러니 그녀와 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
“후우…….”
침묵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데이비. 본녀가 알 것 같아.”
“안다고? 어떻게?”
“수르트에게 들은바 있는 게야. 이런 경우엔…….”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스멀스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한쪽에 자리 잡고 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이,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시뻘게진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는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 아닌가?”
“맞는 거 아닐까?”
어색한 웃음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한참을 침묵하던 도중 나는 쭈뼛쭈뼛 걸어가 그녀가 팡팡 두드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실감이 잘 안 나네.”
“본녀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다시 침묵이 오갔다.
“데이비. 아이를 가지고 싶진 않아?”
“신경 쓰지 마. 그런 건.”
아이를 위해서 정략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존재는 당연 여러 면에서 좋은 점이 존재한다.
키운다는 보람. 그리고,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그 묘한 느낌.
다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어떻게든 만들고자 노력할 이유는 아직 없었다.
아빠가 되었다는 기분은 내가 느낄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해결책이 나오겠지.”
“만약에 아이가 정말로 가지고 싶다면.”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꼭 본녀를 고집하진 말아 주었으면 해.”
“이 자리에서까지 그런 소리 하는 게 그 입이냐?”
손을 대뜸 뻗어 그녀의 입술을 콱 잡아버리자 그녀가 울상을 지어 보였다.
“…….”
그리고, 침묵 속에서 나는 아공간에 고이 모셔둔 그것을 꺼내 들었다.
“짜잔.”
“그걸 꼭 써야 해?”
“원래 네 꺼잖아.”
“만들어진 뿔 따위.”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것을 직시하다 천천히 자신의 머리에 뿔을 다시 부착시켰다.
역시 탈부착 테크놀러지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푸훕…….”
이런 상황이 웃겼던 것일까.
페르세르크는 잠시동안 쿡쿡 웃어넘기더니 천천히 내게 말해왔다.
“데이비.”
“그래.”
“본녀를 끝까지 지켜줄 게야?”
“믿어봐.”
“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게야?”
“그럴 일 없을 거다. 네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검에만 매진한 게 아니니까.”
불가능한 게 있다면 회랑 모든 영웅들의 기술과 지식을 동원해서라도 가능하게 만들리라.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페르세르크는 잠시 침묵 후에 내게 안겨들었다.
“그래…… 그거면 된 게야.”
내 품에 안긴 그녀를 천천히 떼어낸 뒤 마치 홀린 것처럼 입을 맞춘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던 마석등의 마나가 차단되며 방 안이 어둡게 변했다.
* * *
평소 잠이 많지 않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페르세르크 그녀 본인은 물론이고 데이비는 그녀보다 한술 더 떴으면 더 떴지 덜하진 않았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태양이 하늘 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윽…….”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격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고이 잠들어있었다.
데이비는 너무 푹 잠들어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그는 제대로 잠 한번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마스터 급이 인체를 초월하고 있다지만 잠이라는 것은 지성을 가진 이들이 취해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족쇄나 다름없다.
실제로 그 잘난 드래곤조차 동화 속에선 동면이라는 것을 취한다고 적혀있지 않았던가.
곤히 잠든 데이비의 뺨에 새하얀 손을 올려놓은 그녀는 문득 잠든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이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충족되는 기분이 든다는 건 새삼스러운 기분이다.
하지만 그는 알아야 했다.
“데이비. 본녀의 사랑은 작은 화톳불과 같아.”
아련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자기의 말을 듣지 못할 데이비의 뺨을 쓸어내리며 이불로 본인의 몸을 감싸듯 가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만약. 그대가 본녀를 배신한다면…….”
옅게 웃어 보인 그녀의 얼굴에 화사함이 어렸다.
"망할, 그대를 불태워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놀란 듯 한 손으로 입을 찰싹 때린 그녀였다.
“어머나, 상스러운 말을.”
방금 전의 표정, 말투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데이비의 뺨을 쓸어내리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다 인상을 찌푸렸다.
“끄응…… 몸이 말이 아니로구나.”
초야 전쟁의 여파로 인해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한 페르세르크는답지 않게 멍하니 있다 천천히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에 데이비를 끌어당겨 꼬옥 안은 채 눈을 감으며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던 말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사랑해, 데이비.”
전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 * *
라운 왕국의 국왕의 가족들은 일차적으로 왕성 내부의 묘지에 묻히곤 한다.
본래 1왕자인 내 어머니는 리네스 왕비의 미움을 받아 시신조차 곱게 안치되지 못했지만 바리에타 공작가와 귀족파의 몰락 이후 정식으로 묘지에 안치되었다.
잔디가 깔린 묘지에 고요하게 안치된 커다란 묘를 보며 나는 침묵했다.
이미 화장하고 남은 것은 뼛가루뿐이지만 그 뼛가루조차 한때 왕족이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안치된 것이다.
비효율적이라면 정말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이 대륙의 사상 중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중 하나가 신혼부부의 커플 의상이라 할 수 있다.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
남성용으로도 여성용으로도 특정하기 힘든 디자인의 복장을 똑같이 입은 채 왕족의 묘지로 들어선 나는 의외의 인물 두 명이 어머니의 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다가갔다.
“레니, 당신의 아들이 자랑스레 장성하여 혼약을 맺었소.”
씁쓸함이 서린 남성의 목소리였다.
“두 분은 이제 행복할 거예요. 그러니, 이제 마음 놓고 푹 쉬셔요.”
그 뒤를 따라 씁쓸함이 묻어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국의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정중하게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페르세르크도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갑작스런 우리의 등장에 놀란 크리아네스 국왕과 아니샤 현 왕비는 잠시 나와 페르의 복장을 바라보는 듯 하더니 이내 옅게 웃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왕자.”
“몸은 괜찮으십니까.”
“보내주신 약들 덕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졌어요.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아니샤 왕비의 대답에 크리아네스 국왕이 물어왔다.
“복식이 특이하구나.”
“커플룩이라는 겁니다.”
“커플룩?”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면 많은 걸 공유하고 싶어 하죠. 실제로 혼약의 맹세를 나누는 반지가 같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니까요.”
“흐음.”
“반지도 되는데 옷이나 액세서리라고 안될 게 뭡니까.”
내가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들어 흔들어 보이자 페르세르크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따라서 희고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팔에도 나와 같은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크흠. 이 아비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구나.”
“어머나 로맨틱하네요.”
두 사람의 반응은 남달랐다.
“커플 옷에, 팔찌라…… 괜찮은 것 같아요.”
“안목이 높으시네요. 왕비저하.”
“폐하. 저희도 한 쌍 만드는 건 어떠할는지요.”
“크흠…… 마…… 마음대로 하시오.”
키득키득 웃으며 크리아네스 국왕을 이끌고 나를 지나친 아니샤 왕비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저희는 돌아갈 테니 신혼께선 어머니를 뵙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왕비저하.”
두 사람이 떠난 이후 나는 말 없이 라운 왕국의 전통대로 묘지에 예를 표했다.
“어머니.”
짧은 침묵이 일었다.
“아들, 이렇게 잘살고 있습니다. 계속 지켜봐 주세요.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테니.”
그것이 목적이고, 수단이며, 방법이니까.
나는 말 없이 묘비의 벽면을 말없이 쓸어내렸다.
스르륵…….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왔고 나는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낄 때, 안 낄 때 구분 못 하나?”
“이쪽도 나름대로 중요한 상황이니까요.”
모습을 드러낸 건 케인, 아니 케인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발키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