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6화
태초 마을에서 멀지 않은 작은 섬.
그곳에는 오래된 전통 명문 문파인 천열문이 존재한다.
문파인이라고 해봐야 총합 10명 남짓한 작은 문파지만 천열문이 가지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천열문주, 천 금!
과거 각 문파의 끝없는 전쟁 속에서 단신으로 일어나. 수많은 강자들을 꺾고 절대 무위라 칭해지는 절대 오성중 한 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약 30여 년 전 무슨 일을 계기로 무림에서 은퇴하였다지만 천열문이 가진 이름은 이미 무림 곳곳에 퍼져나간 후였다.
다만, 그런 스승조차 죽임을 당했다.
빌어먹을 사형. 아니 배신자 지우에 의해서. 어째서 그가 스승님을 갑자기 공격했는지, 또 스승님은 어째서 그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는지 스승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막내, 한자성으로썬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자의 행동으로 인해 스승님은 너무 큰 상처를 입었고. 과거부터 천열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다는 악림문에 의해 멸문당했으니까.
맹으로 떠난 윤 사저를 제외한 다른 사형과 사저들.
민 사저, 독 사저, 진 사형, 길 사형, 유 사저에 이어 스승님까지!
뿌드득!
정신을 차린 자성은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코를 찌르는 약방의 냄새. 그리고 푹신푹신한 이불의 감촉이었다.
“일어났느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 노인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는 처음 보는 아이로구나. 천열문주가 들였다던 막내인가?”
“…… 네.”
“그래. 반갑구나. 나는 오박세라는 노인이다. 네 녀석과 희아를 치료한 늙은이…… 아니지. 깨어나도록 약을 투약한 노인네일 뿐이지.”
“대체 무슨 일이…….”
“내가 묻고 싶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자경단인 한지욱이 얼마 전 천열문이 있는 섬에 다녀왔다. 그곳에는 폐허밖에 없었다.”
그의 설명에 한자성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희아…… 희아는 어디 있습니까!”
“원, 호들갑은…… 운영이가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말거라. 희아는 그나마 멀쩡한 편이지만 심각한 건 네놈이다.”
“…….”
“말해 보아라. 네 사형과 사부는 다 어디로 간 것이냐.”
그의 물음에 한자성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괴인들이…… 침략했습니다…… 수는 일백…… 그리고 괴이한 강자들이…….”
“괴인?”
“스승님은 그들을 지휘하는 자를 악림문의 장로 태상제라고 불렀습니다.”
“태상제라…… 그렇구나……. 네 녀석의 몸에 남아있는 내공의 흔적. 상대의 몸을 잠식해 갉아먹는 독인 대살악귀의 흔적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그런데……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사형과 사저들의 시신이…….”
분명 섬을 도망칠 때 자성은 보았다. 자신의 스승과 사형, 사저들이 괴인들의 검에 죽어가던 모습을 말이다.
“시신은커녕 핏자국도 없었다. 해서 다들 무사한가 했더니…….”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곰방대를 툭툭 털어냈다.
“쉬어라.”
“제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분명 도망치던 도중 저희를 먼저 발견한 건 녹림도였습니다. 의식을 잃어 알 순 없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녹림도들은 없었구요. 그리고…… 태상제의 곁에 있던 괴물 같은 여자가 저희를 추적해왔었습니다.”
그때 분명 그녀는 희아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희아는 멀쩡하다. 대체 그럼 누가 자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는가.
“흐음 그 청년과 아리따운 소저를 말하는 것인가? 네 녀석을 이곳에 데려다준 후 곧바로 떠났다.”
“그럼 그들이 저를 구해준 겁니까?”
“흠? 그건 아닐 게다. 두 사람 모두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거든.”
오박세의 말에 한자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럼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자신을 기절시킨 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 손을 대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것일까.
중요한 건 일단 그들을 만나봐야 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 했고,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하지만 상황이 여의찮았다.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겠지.”
“무…… 슨 뜻입니까.”
“이 늙은이가 실언을 했다네.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원…….”
그 뒤에 들은 자초지종은 기가 막힌 소리였다.
태초 마을의 근처에서 대량의 실종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존재해선 안 될 재앙이나 다름없는 강시. 그것도 상위 강시인 백령강시가 움직인다.
백령강시. 백여 명의 원한과 육신을 조합해 만드는 것으로 그 하나의 힘이 절정고수에 이른다.
문제는 지금 발견된 백령강시는 단순한 백령강시가 아니라 백령강시 중에서도 특히 이질적인 존재.
초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승리를 쉽게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경단원과 공동파의 2대 제자인 곽준성이 가긴 했지만…… 제때에 도착할 수 있을런…… 자네! 뭐 하는 겐가!”
“찾아야 합니다! 구해준 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게…… 쿨럭!!”
소리치며 일어나려던 한자성의 몸이 기우뚱했다.
“쿨럭!”
“아서게! 지금 자네는 살아있는 송장과도 같아! 그토록 큰 부상을 입고도 살아있는 게 용하단 말이네!”
정확히는 죽은 이를 살려낸 꼴이다.
오박세 의원은 대체 그 청년이 무슨 치료를 했길래 시체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본래 그의 생각대로라면 이 청년이 살아있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가야만 합니다.”
“닥치고 다시 눕게.”
“가야 합니다.”
“누우라고.”
“가야 합니다.”
앵무새마냥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한자성의 모습에 결국 오박세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환단이 든 상자 세 개를 꺼내와 내밀며 말했다.
“하나 골라가게. 비록 큰 효능은 없고, 중복 복용 시 부작용이 따르니 하나만 가져가게. 선택은 자네 몫일세.”
“감사합니다.”
“자경단원에게 일러둘 터이니 칼날 협곡 쪽으로 가보게나. 칼날 협곡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나올 것이네.”
상자 중 하나를 고민하다 골라 떠나는 한자성을 보던 오박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곽준성과 한지욱을 포함한 자경단이 떠났으니 못해도 추가적인 인명피해는 없으리라.
‘후우…… 악재가 겹치는구먼…… 부디 모두 무사해야 할 텐데. 쯧쯧.’
그의 걱정과는 별개로 페르세르크와 데이비는 현재 백령강시로 추정되는 강시를 사진기사로 데리고 다니며 신나게 절경을 구경하고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 * *
숲속에서 차갑고 싸한 감촉에 눈을 뜬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인상을 찌푸린 채 일어났다.
“윽…… 머리야.”
둔탁한 통증이 목덜미 전체에 알싸하게 퍼져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주군인 악림문의 장로 태상제의 명령을 받아 사망한 천열문의 문주를 제외한 유일한 혈육인 천지희를 데려가기 위해 그 애송이 청년을 추적한 것은 좋았다.
주군의 힘인 대살악귀의 힘에 노출된 그가 도망쳐봐야 손바닥 안이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실제로 금방 찾아내기도 했고 말이다.
운이 좋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듯 보였지만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천지희를 데리고 돌아가면 그만인 임무였다.
그래서 애송이 청년을 제압한 것까진 좋은데.
왜 그 뒤의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곧이어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듯 일어난 그녀는 꽈악 조이는 가죽옷을 툭툭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실패했다고?
“예.”
-어째서지?
들려온 목소리는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녀는 전신에 오한이 돋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흐음. 그놈에게 무슨 수가 숨겨져 있었나?
“아니요. 천열문의 도망자들은 분명 제압했습니다만…… 갑자기 기억이 끊어졌습니다.”
-흐음…… 뭐 좋다. 복귀하도록 해라. 다 죽어가는 시체는 언제든 모으면 되는 일이니.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고 붉은 머리의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호리 동굴에 대량의 요귀들을 재배 중이니까요. 게다가 영수의 변이도 완벽합니다. 태초 마을의 방비로는 절대 그들을 막아서지 못할 겁니다.”
-믿겠다. 천열문의 후손과 태초 마을에 보관된 천마의 비급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뒤 침묵하는 목소리에 붉은 머리칼의 여성은 언제 떨었냐는 듯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스르륵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어느 동굴에 도착했을 때 즈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든 요귀와 변이된 영수가 있는 호리 동굴에 겁도 없이 들어온 몇몇 인물들을 말이다.
“젠장 당하진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소저! 소저 어디 계시오! 나 곽준성이 소저를 보호하러 왔소!”
“괜히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혹여라도 백령강시가 나타나면…….”
“흥! 백령강시 따위! 내 검의 일초지적이나 될 것 같은가!”
백령강시는커녕 일반 강시도 못 이길 것 같으니 더 울화통이 터지는 표정들이다.
그들의 표정을 읽어보면 그 속마음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저 망할 말코 놈이 정말 도움이 되긴 되는 건가?’
다만 공동파라는 위세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여는 자경단원은 없었다.
침입자로구나.
아직 들키면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어찌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 중 익숙한 인물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천열문을 멸문시킬 때 보였던 청년.
무공수위는 참 가련하기 그지없던 애송이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몸 안에 서린 대살악귀의 힘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뭐가 되었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죽이지 말라곤 했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다리 정도는 못쓰게 만들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은 방법이리라.
모든 요귀가 깨어나진 않았지만 이 근처를 돌며 행인들을 납치하도록 지시해둔 백령강시와 깨어난 요귀들만 있어도 충분히 저들을 몰살시킬 전력은 되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거리낄 것 없이 가볍게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보아하니 먼저 이곳 안으로 들어간 누군가를 찾으러 온 모양인데…….
“누군가를 찾으러 왔어? 오빠들?”
그녀의 느긋한 물음에 사내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린다.
“누…… 누구냐!”
“기…… 기척도 없이?!”
모두가 한가락 한다는 무림인들이다.
그런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기감을 벗어나 나타난 살수와도 같은 그녀의 존재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한 가닥 하는 이들로만 왔거니와 공동파의 2대 제자인 곽준성까지 있음에도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강적!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들의 몸이 움직이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넌?!”
그때 그녀를 알아본 청년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알고 있는 사람인가?!”
“저 여자입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을 죽인 악림문!!”
그 외침에 자경단원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에 경악이 서린다.
“어머나. 명줄이 긴 꼬마구나. 다 죽어가던 주제에 이런 곳까지 올 줄이야. 그럼 내가 선물을 줘야겠지?”
“대체 여기서 뭘 꾸미고 있는 것이냐!”
다급한 그들의 외침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느긋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뭐, 죽을 이들에게 못 알려줄 것도 없긴 한데…….”
그렇게 말한 그녀가 스르륵 사라진다.
스릉!!!
동시에 가장 선두에 자신만만하게 서 있던 곽준성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어어?!”
그도 그럴 것이 인지하기도 전에 그의 검이 뽑혀 나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었다.
무인으로써 무기를 빼앗긴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걸 감지도 못했다는 건 목숨에 경종을 울리게 만들었다.
“뭘 꾸미냐라…… 뭐 별건 없어. 태초 마을을 쓸어버리고 그곳에 보관된 천마의 비급을 가져갈 거니까.”
“우…… 웃기지 마라!! 마공서를 가져가겠다고?! 네년이 지금 제정신이더냐!!”
자경단원인 한지욱의 외침에 그녀는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글쎄?”
“네년의 생각대로 쉽게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걱정 마. 다 방법이 있으니. 저기 말이야.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