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9화
“동부로 가는 길은 알고 있나?”
“저도 무림행은 처음이라…….”
“내가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원…….”
담담하게 말한 나는 눈이 죽은 채 페르세르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천지희를 바라보았다.
한명은 복수를 위해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고, 나머지 한명은 완전히 정신을 놨다.
참 씁쓸한 모습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이윽고 얼마 가지 않아 새하얀 도복을 입은 차분한 인상의 미녀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염검성 곽도영의 첫째 손녀딸인 곽미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뚱한 표정을 지은 채 따라오는 공동파의 2대 제자라던 곽준성이 보였다.
“젠장. 할아버님도 무심하시지 왜 이런 행렬에 끼이라고 하시는 건지 원…… ”
“조용히 하거라. 네 행동이 잘못된 건 아니나 말을 가려서 해야 할 곳과 아닌 곳을 잘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쏘아붙인 미영은 미리 준비한 말을 내밀며 말했다.
“동부까지 가시는 길에 제가 길잡이를 해드릴 겁니다. 가시죠.”
“의뢰를 맡겼는데 직접 사람까지 붙여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 또한 맹에 보고를 하러 가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소협의 행보에 큰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렬은 조용했다.
곽미영은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길잡이로서 길을 안내했다.
곽준성이 계속 투덜거리긴 했지만, 미영의 눈초리에 꼬리를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반대로 자성과 지희의 경우는 무거운 침묵을 계속해서 지켰다.
가족을 잃은 충격에 마음을 반쯤 닫아버린 지희는 눈이 죽어있었고 자성의 경우는 반대로 조용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행렬 속에서 잔잔히 잡담을 나누며 주변을 구경하고 느긋하게 가는 건 페르세르크와 내가 전부였다.
잔잔한 행렬.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만 한자성은 느긋한 여행길조차 조급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거면 되겠지? 마음에 안 들면 말해. 육질 좋은 영수로다가 잡아 올 테니까.”
“이런 여행은 빈티지한 맛이 제격인 게야 데이비.”
키득거리며 내가 잡은 토끼를 보던 그녀는 이런 여행 자체가 너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 아이가 걱정이로고.”
“그 아이?”
“그 지희라는 아이. 점점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 자칫하다간 완전히 정신이 망가져 버릴 게야.”
“심력이 많이 약하니까.”
천지희는 무공을 거의 배우지 않았다.
한 문파의 문주의 딸이라 한 것 치곤 천지희의 모습은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데이비. 그대가 치료할 수 있지 않아?”
“가능하긴 하지.”
“가능해?”
“그래. 기억을 지우면 돼. 그때 당시의 기억을.”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침묵했다.
그건 외려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면 어찌해볼 만하지만 절대 우선될 결정은 아니었다.
“괜히 마음이 쓰여서 두고 보기가 그런 게지.”
천지희는 십 대 중반 정도의 아직 어린 소녀였다.
성장이 빠른 티오니스 대륙과 다르게 이곳에서의 십 대 중반이라면 굉장히 어린 편에 속하니 말이다.
“젠장, 그놈은 글렀습니다. 누님.”
그렇게 야영을 준비하고 있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 나와 페르세르크의 귓가에 곽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성아.”
“솔직히 말입니다. 내가 막 잘났다고 할 순 없지만, 그놈은 심각해요. 할아버님의 말대로 천열문은 대단한 문파라 했지요. 그런 문파에서 대체 왜 저런 둔재를 받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곽준성의 투덜거림이었다.
요 며칠 자성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듯 보이더니 아무래도 그게 잘 안되었던 모양이었다.
“근골은 좋아 보였는데.”
“근골이 좋으면 뭣합니까. 내공을 다루는 게 그렇게 미숙한데. 내공이 쌓이는 양도 일반인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심각해요.”
그의 투덜거림에 미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저대로 가면 복수고 뭐고 객사할 재능이란 말입니다. 무공을 배운지 3년이 넘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삼류낭인만도 못한 내공과 내공운용실력이라니…….”
한숨을 푸욱 내쉬는 그와 미영에게 나와 페르세르크가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데이비 공자님과 페르세르크 소저.”
처음엔 나를 소협이라 부르다 며칠간 지내며 익숙해진 듯 미영이 나를 불러왔다.
“무슨 일인데.”
내 물음에 곽준성이 나를 흘낏 째려본다.
“어째 말이 짧다?”
“적어도 공경할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존대는 해주마.”
“쯧…… 자성이 놈 이야기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골은 좋은데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게다가 어렵게 모은 내공도 제대로 소화 못 해서 죄다 흩어버리질 않나. 내공을 다루는데에도 너무 미숙하다.”
그의 말에 나는 멀지 않은 공터에서 자성이 묵묵히 수련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열정도 좋고 근골도 좋다.
하지만 그는 내공을 너무 다룰 줄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무림인 체질은 아니야.”
그는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이 내공을 받아들이는 재능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무공의 기본이 되는 내공을 모으지 못해서야 근골이고 오성이고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흐음…….”
“나는 포기하렵니다. 저놈은 가르쳐봐야 의미가 없어요.”
그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토끼들을 페르세르크에게 넘겨주었다.
“그대가 봐주게?”
“잠깐 정도는.”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걸어가자 곽준성이 인상을 찌푸린다.
“이봐. 내 말 못 들었어?! 저놈은 가망이 없다니까?”
“그건 네가 못 가르쳐서 그런거고.”
내 말에 곽준성의 인상이 왈칵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수련을 하고 있는 자성에게 다가갔다.
“예전에도 이랬나?”
내 물음에 검을 휘두르던 자성이 멈칫했다.
“은공? 사냥은 다녀오신 겁니까?”
“적당히 토끼 몇 마리 잡아 왔지.”
내 말에 그가 검을 내려놓고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예전에도 이랬냐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내공이 잘 모이지 않았냐고.”
“예. 그렇습니다만…….”
“잠시 앉아봐.”
그렇게 말한 나는 자성을 앉힌 뒤 그의 맥에 손을 올렸다.
“내공을 조금이라도 좋으니 끌어올려 볼래?”
내 말에 자성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주 미약한 내공이 그의 몸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충 알겠구먼.”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공?”
“그냥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그 어르신 말마따나 악림문은 어차피 적이 많아.”
내 말에 그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명줄 재촉할 이유가 있나?”
“직접…… 복수해야 합니다.”
단호하게 그가 말했다.
“악림문이 습격하기 전 사형 중 한 사람이 스승님을 배신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스승님은 큰 부상을 입으셨고. 그 결과 악림문의 공격에 버텨내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그자와 악림문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재능이 없다고 해도?”
“설사 제가 죽더라도.”
독기 하나만큼은 확실한 녀석이 분명했다.
“그래?
담담하게 되물은 나는 말 없이 그를 직시했다.
올곧지만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눈이었다.
“참. 옛날에 누구 보는 기분이네.”
씁쓸한 기분이 들어 나는 근처에 놓인 목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은공?”
“한번 봐줄게. 들어와 봐.”
내 말에 한자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공께서 봐주신다고요?”
“그래. 뭐 마음에 안 드나?”
“그건 아닙니다만…….”
실제로 자성을 포함한 대부분은 내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조금 의뭉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이윽고 기수식을 취한 그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천열파산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나는 엄격한 움직임에 나는 조용히 목검을 가볍게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한 발 내디뎠다.
빠악!!!!
그리고, 그가 다가왔을 때. 나는 어떤 마나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놈의 미간에 목검을 내리쳤다.
“커헉!!”
“목숨 걸고 싸우는 주제에 자기 검술의 이름을 외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뭐, 약속 겨루기라도 하냐?”
“크으?”
“다시 들어와.”
내 말에 비틀거리며 자성이 일어난다.
갑작스런 소란을 들었는지 곽미영과 곽준성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나와 자성을 바라보았다.
“갑니다!!”
이윽고 자성이 다시금 지면을 박차며 덤벼든다.
“그게 아냐 멍청아!”
빠악!!!!
또 다시 아무런 내공도 들지 않은 무식한 힘이 섞인 일검이 그의 몸을 후려쳤다.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나르는 그 모습에 나는 목검을 집어 던지곤 가볍게 손을 풀었다.
맞지 않는 그릇이다.
육신에 맞지 않으니 아무리 노력해본들 내공이 쌓이고 움직일 턱이 있나.
이어서 바닥을 몇 차례 구른 자성이 벌떡 일어나려던 그 순간.
순식간에 달려 그에게 접근한 내가 손을 우드득 소리 내며 풀었다.
“네 가장 큰 문제는 재능도 의지도 아니야.”
몸뚱어리지.
일부러 기혈을 틀어막아 놓은 육신에 내공을 모아봐야 제대로 모일 턱이 없다.
“네 몸에 이딴 짓을 해놓은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 환자였던 놈이 어디 가서 객사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아. 적어도 사람 구실 하게는 해주마.”
이 악물고 버텨라.
그렇게 말한 나는 그대로 그를 바닥에 제압한 채 손가락 마디를 우드득 꺾었다.
“어…… 어이! 이봐 뭐 하는?!”
우드드득!!
멀리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곽준성이 나를 불러 외쳤지만 나는 그대로 자성의 몸을 이리저리 꺾어대기 시작했다.
“좀 많이 아플 거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우드득!! 우득!!!
섬뜩한 뼈 울림소리가 신나게 퍼져나갔다.
한자성의 비명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끔찍한 비명에 곽준성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곽미영 또한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페르세르크 소저. 데이비 공자께서 지금 뭐하시는…….”
“글쎄요. 몸에 좋은 안마라도 해주는 모양입니다.”
키득거리는 페르세르크의 말에 곽 씨 남매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말이다.
* * *
싸늘한 공기가 울려 퍼진다.
어두운 숲속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린 사내가 검은 옷을 입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명줄이 긴 녀석들이구나.”
다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끝내 살아남았다.
천열문의 배신자 지우.
한자성의 사형이며 과거 그의 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 숨길 수 없는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장로님.”
이윽고 말없이 멀리서 비명을 지르는 자성을 노려보던 사내. 지우는 천천히 다가오는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을 향해 물었다.
“허허, 화가 가득한 친구로군. 그리 저들이 밉더냐.”
“저를 속인 스승님도 밉지만. 스승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저 둘만큼은 절대 살려둘 수 없습니다.”
“그럼 그때 죽이고 도망치지 왜 그냥 도망쳐 나왔는가.”
노인의 물음에 지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엔 그리할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당장 스승과의 사투만으로도 죽을 고비를 넘긴 지우였다.
하지만 이제 스승도 죽고 없고 지우 또한 새로운 힘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래. 다른 장로들은 저 청년을 이용해볼 생각인 모양이다만. 나는 자네와 생각이 같네. 후환은 남겨선 곤란하지.”
“다른 이들을 상대해주십시오. 자성 저놈의 명줄은 제가 직접 끊겠습니다.”
“흐음. 도화 선녀에 아직 별호도 없는 공동파의 애송이라…….”
“괜찮겠습니까.”
“충분하다마다. 그나저나 저 서역인 여아는 정말로 탐이 나는구나. 허리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야.”
“그럼 가시죠.”
“그래. 가야지. 가서 어디 한번 신명 나게 놀아보세.”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는 지우와 노인의 뒤로 땅속이 한 차례 울렁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지면 안에서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가자꾸나. 천령강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