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3화
무림에서 도화선녀라 불리며 많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곽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곽준성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기절한 천지희와 자성을 바라볼 뿐이다.
자성은 딱히 놀라울 정도의 힘을 보여주진 않았다.
오히려 무공을 배운 적 없이 내공만을 쌓았다던 천지희가 보여준 천열신공의 극의가 더 놀라웠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큰 누님…….”
“응. 준성아.”
“대체 제가 뭘 본 겁니까?”
“그런 말 하지 말렴…… 내가 더 혼란스러우니까.”
그녀는 먼저 괴현상을 목격했다.
특이한 장을 지닌 채 사뿐사뿐 걸어가던 페르세르크 소저.
그리고 그녀의 앞을 막아서던 악림문의 장로, 천귀살마와 두 마리의 천령 강시.
천귀살마는 어마어마한 경지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천령 강시가 둘.
천령 강시가 어떤 존재이던가.
절정 급 고수들도 두려워하는 백령강시의 위 단계로 천명의 육신과 천명의 원혼을 엮어 만든다 말하는 끔찍한 생체 괴물이다.
그 육신은 강기도 먹히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그 힘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짓밟고 으깬다.
도화선녀 곽미영으로썬 그 셋 중 하나라도 감당하라 수 없는 적이었다.
페르세르크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나선 길이 죽을 길이라 여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허허허허, 펄떡펄떡한 처자들이 둘이나 제 발로 걸어들어왔구나. 허리가 뻐근해서 참을 수가 없어. 목숨을 살려줄 테니 개처럼 엎드리거라.]
천귀살마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치 명령하듯 말하는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지 않았다.
천귀살마의 주색은 이미 무림 내에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수많은 무인과 아낙들이 그의 손에 정조를 잃었고 비관하며 죽어갔다.
그는 여인을 강제로 취한 뒤 끔찍한 쾌락 속에서 여인을 죽이는 걸 즐기는 변태였으니 말이다.
온몸에 벌레가 기는듯한 공포 속에서 도화선녀 곽미영이 검을 꺼내 들려던 그 순간.
“본녀의 몸을 너무 건방지게 바라보는구나.”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시꺼먼 기류가 퍼져나가기가 무섭게 지면에서 시꺼먼 빛의 줄기들이 쏘아져 나왔고 천귀살마와 천령 강시들을 그대로 묶어버렸다.
그것도 놀라운데.
그 이후 벌어진 일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페르세르크 소저는.
손을 튕기는 것으로 거대한 백염을 만들어냈고.
천령 강시를 일거에 소각시켜버린 뒤 천귀살마가 반항하기도 전에 그를 완전히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본녀의 몸은 오로지 데이비의 것인 게야. 건방진 놈.”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우아하고 고고한 느낌보다는 굉장히 거칠고 화끈한 느낌.
천귀살마가 반응도 하기 전에 그를 제압해버린 페르세르크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녀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멍하니 굳어있는 곽미영이 보는 앞에서 천귀살마의 고환을 기이한 힘으로 터뜨려버렸다.
끔찍한 고통에 천귀살마는 애걸했지만, 페르세르크는 거침없이 그를 끝장내버렸다.
그리고,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밧줄로 그를 묶은 채 질질 끌고 돌아왔다.
그랬는데.
돌아오고 나니 천지를 진동하는 말도 안 되는 내공의 양을 내뿜는 데이비 공자가 보인다.
“대체…… 내가 본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저 두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 생각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조용히 고개를 들어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자 그녀는 옅게 웃어 보였다.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지 못하는 광경.
하지만 분명 일자전승 문파라는 사실이 알려진 천열문의 오의를 사용한 천지희의 무화낙섬을…….
데이비는 더욱 완벽하고 안정적으로 사용했다.
천지희의 경지가 떨어져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부터가 다르다.
천열신공 극의 무화낙섬 또한 대단한 무공이지만 데이비가 사용한 무화낙섬은 외려 천열신공의 무화낙섬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들 뭐합니까.”
그때 도망친 이를 잡으러 떠났던 데이비가 돌아오며 묻자 곽준성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님…… 제 목…… 잘 붙어있죠?”
“그래…… 타락한 영수를 잡았다고 하기에 솔직히 조금 의심스러웠는데…… 저 정도면 영수가 문제겠니…….”
신수도 잡겠네.
그가 데이비를 향해 얼마나 까불거렸는지 아는 미영으로선 그가 목이 붙어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내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정말 내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물극필반의 경지인지 궁금해하는.
또한, 도대체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두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져 묻고 싶어도 물을 명분도, 실력도 없기에 그저 눈치를 살피듯 침묵할 뿐.
한자성이 다시 깨어난 것은 비가 쏟아지는 날 동굴로 비를 피했을 때였다.
“크윽…… 여긴…….”
끙끙 앓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천지희가 눈을 크게 뜨며 그에게 달려갔다.
“오라버니!”
그녀는 무화낙섬을 사용한 이후로 정신이 강화되었는지 서서히 회복되는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류라곤 하나 그래도 천마신공의 일부다.
그 효과가 가볍지는 않으리라.
“크으…… 희아야…….”
“오라버니!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엉엉 울며 자성에게 매달리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큭!”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닿자 나는 미리 준비해둔 책 한 권을 그에게 던졌다.
“받아.”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가장 먼저 자성이 던진 질문은 그것이었다.
그 질문에 곽준성과 곽미영 또한 귀를 쫑긋하며 나를 흘끗 본다.
“내 정체라…… 그걸 알아서 뭐하게.”
“당신이 사용한 건 분명 무화낙섬이었어요. 스승님이 한때 보여주셨던 천열신공의 극의…… 하지만…… 스승님도 당신 같은 짙은 검기를 만들어내진 못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뭐 묻고 싶은 게 많은 것 같은데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널 배신했다던 지우인지 뭔지 하는 놈은 강제로 우화등선시켰으니 걱정 말고. 페르가 잡아 온 그 노인네는 내 친히 지옥에 처박아버렸으니 걱정 마라.”
“…….”
세상에 천귀살마를 저렇게 간단하게 처리하는 게 가능한가 싶어 기가 차는 네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여준 게 뭔지 정말 궁금해하는 모양인데…….”
짧게 고민한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냥 여행자야. 그것도 신혼여행을 온.”
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정체보다 네 상태가 더 궁금하지 않나?”
내 물음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그의 단전, 즉 무인으로써의 생명이 박살 났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오라버니…… 흑…….”
“전…… 이제 무공을 쓸 수 없는 겁니까…….”
그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나는 손을 까딱였다.
“너 기억력은 좋지?”
“예? 아…… 예 기억력은 좋은 편입니다.”
“그 책 달달 외워.”
내 말에 그가 의아한 듯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펼쳐보더니 눈을 부릅뜬다.
“토씨 하나 빼지 말고 싸그리.”
이어지는 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마치 홀린 것처럼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 내용이 궁금했는지 천지희가 가까이 가서 보려 했지만 내가 그녀를 제지했다.
“넌 저걸 봐도 도움 안 돼. 괜한 짓 하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모르는 게 약일 거다.”
“흐끅!”
자성이 책을 덮은 건 그 침묵으로부터 약 네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천혼지체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다.
아마 두어 번 읽는 것으로 내용을 모조리 기억했으리라.
“이건…….”
“그래. 천마신공의 원본.”
내 대답에 모두가 경악한다.
“처…… 천마신공의 원본?!”
“세상에 천마의 무공 원본이라고?!”
천마의 무공 원본.
그것이 가져오는 여파는 크다.
그는 그 무공으로 전 무림을 벌벌 떨게 만들었으니까.
경악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넌 천마 독고준의 손자다. 그건 내가 알려줘서 알고 있겠지?”
“…….”
“그렇기에 넌 유일하게 천마신공을 배우고도 몸이 박살 나지 않는 인물이야.”
천마신공이 왜 마공으로 취급되는지 처음엔 의아했으나 그 이유는 사실상 간단했다.
천혼지체도 아닌 게 그걸 익히면 몸이 터져나갈 수밖에.
“넌 그걸 지금부터 익히면 된다. 기초는 내가 다져줄 테지만 그 이후는 네 일이야.”
내 말에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겁니까.”
“내가 원본을 보고 필사했거든. 아 걱정 마. 주해서라서 이해도 쉬울 거다.”
쓸데없이 두루뭉술하게 적어놓지도 않았다.
“내가 네게 이걸 주는 이유는 그냥 빚을 갚는 거야. 그 이유 그 이상도 아니고.”
내 말에 그는 쓰게 말했다.
“하지만 전 단전이 박살 났는데요.”
“초기화 한 거지. 천혼지체는 단전 한 번 부서지는 정도로 무인 생명 안 끝나. 오히려 천열신공을 담고 있던 네 몸의 단전은 없느니만 못한 거다. 말 끝났으면 앉아. 내공을 쏟아 넣어줄 테니까.”
내 말에 자성은 마치 홀린 것처럼 가부좌를 틀었다.
동시에 내가 그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입 열지 마라. 혈도 다 찢겨 죽기 싫으면.”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내 손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이 그에게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의 몸이 크게 움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몸에서 쏟아져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에 경악한 곽 씨 남매와 천지희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구만…….”
“이게…… 사람이 몸에 담을 수 있는 내공인가요.”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내공을 받아들이는 한자성이다.
물론, 이게 하루아침에 콩 볶아먹듯 완성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야 천마신공의 기본을 터득할 수 있고,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야 힘을 발현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러했고.
하지만 이놈은 진짜배기 천혼지체.
그것도.
“넌 네 할아버지보다 더 무식한 체질이네.”
압도적인 천재(天災)에 가까운 육신.
그의 성장 속도는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몸을 소주천시키자 그의 몸에 새로운 단전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단전이…….”
“축하한다. 실전된 천마신공을 다시 익힌 유일한 인간이 됐으니.”
“…….”
“천마신공은 네가 생각하는 마공이 아니야. 오히려 마와 정 두 가지를 어우르는 최상의 신공이다.”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쓰는 놈을 경계해라.
그것이 무공을 배우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었다.
“혹시 천마 본인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괴물 같은 내공이 설명이 돼?”
기가 막힌다는 듯 곽준성이 말하자 반사적으로 미영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커헉! 큰 누님!”
“넌 입이 화근이로구나. 조용히 하렴.”
“크으…….”
울상을 짓는 그를 보며 나는 자성에게서 받은 비급을 가볍게 허공에 던졌다.
따악!!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화르르륵!!!
새파란 화염이 일어나며 비급을 불태워버린다.
“천마신공도 일자전승이다. 천마신교는 그걸 어떻게든 해보려고 모인 놈들이겠지만 사실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결국, 이제 남은 건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 원본의 전부라는 소리였다.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내 말에 곽미영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곽준성은 달랐다.
“흥. 맨입으로?”
“…….”
“준성아!”
기겁하며 미영이 곽준성을 말렸지만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뭘 원하나?”
“넌 정말로 강하지? 압도적으로…….”
그의 물음에 나는 침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그의 질문에 미영 또한 난색을 보였지만 궁금하다는 낌새였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냐라…….”
사실 저들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한 천년 가까이 살면서 노력해봐. 뭐라도 될지 알까.”
내 미소에 두 남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담 같은데.
그것을 반박할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자. 머릿속 정리 끝났으면 일어나. 내가 그 빌어먹을 술고래에게 받은 게 있으니 기초 정도는 박아넣어 주마.”
“지…… 지금 말입니까?!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한 손을 지면에 짚은 뒤 짧게 튕겼다.
[8서클]
[공간 마법]
[커스텀 스페이스]
우우우웅!!!!!
공간제어마법.
순식간에 좁은 동굴이 거대한 공간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으…… 아아악?! 이게 뭐야!”
“꺅! 오라버니!”
난데없는 동굴의 해괴한 변화에 기겁한 이들이 벌떡 일어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틀 정도면 되겠지?”
정신은 기억 못 해도 몸은 기억한다.
이틀간 나는 독고준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아주 토씨 하나 빠짐없이 그대로.
박아 넣어줄 생각이었다.
“넌 이바노프 반 호엔하임이 아니니까.”
클론에 가깝던 이바노프와는 다르게.
이놈은 진짜배기 손자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다.
“걱정하지 마. 내가 확실하게 새겨줄 테니. 말 나온 김에 나머지 두 사람도 봐줄 테니 같이 들어와.”
내 말에 곽준성은 눈을 부릅뜨며 내게 빠르게 다가왔고 곽미영 또한 우물쭈물하다 검을 꼭 쥔 채 다가왔다.
절정고수고, 별호 없는 애송이고, 단전 방금 만든 초짜고 간에.
어마어마한 실력가가 봐준다는 말에 반응하는 건 무림인 전 공통의 특징인 듯 싶었다.
“페르세르크. 시간 제어 부탁해.”
참고로, 내 교육은 많이 매운맛일 거다.
체감시간도 조금만 늘려주마. 내게 한 수 배워보겠다고 한 말을…….
너희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후 동굴 내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나와 페르세르크의 무력을 본 이가 있었고. 그들로 인해 두 사람의 존재가 퍼져나가는 것을 나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