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586화 (585/1,559)

제 586화

이실디.

케인이 언급한 심연의 공주의 이름이다.

애초에 색목인은 많으나 서역인의 후예는 거의 남지 않은 이 세계에서 이실디라는 이름을 지닌 존재가 실존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말없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자 그녀가 나를 뚱한 얼굴로 바라본다.

“뭘 봐. 씹어먹을 범죄자 x끼야.”

이 년 보게?

기가 막히다는 감정을 뒤로한 채 나는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현무대의 단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보를 가진 금기유가 무림맹원에게 잡히게 생겼다.

하지만 굳이 그를 구할 이유도 없긴 했다.

내가 원하는 건 보옥의 흔적, 그리고 그에게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냈다.

“크윽! 놔라!!”

현무대는 제법 실력이 나쁘지 않게 저항하는 이들을 제압했다.

나름대로 검을 뽑아 들고 저항하는 이들이었지만 현무대는 그들의 전력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처절하게 저항하는 금기유를 제압해 포박한 맹원들은 곧이어 내게도 손을 뻗어왔다.

“저 두 사람도 포박해!!”

이윽고 이실디, 아니 윤희령의 외침에 현무대의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페르세르크와 나의 목에 검을 겨눈다.

함정인가, 아니면 단순히 재수가 없었는가.

상대가 심연의 공주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외려 판단이 어렵다.

머리가 좋으면 좋을수록 사람은 더 많은 가짓수의 변수를 생각하게 된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가짓수의 변수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로 인한 혼란도 만들어낸다.

“데이비.”

어떤 방법이 가장 현명한가. 모조리 살인 멸구 후에 금기유만을 살려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낸 뒤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이 경우. 일은 편하게 굴러갈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맹과는 적대관계가 된다.

굳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갈 이유는 없다는 게 정설이라지만 사실 이곳의 무력 수준을 생각하면 단순침략행위를 하듯 짓밟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대로 협조를 할 경우.

만약 이게 심연의 함정이라면 놓치는 게 많아진다.

‘데이비. 그대가 날뛰면 그대가 신경 써준 그 자성이라는 아이도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게야. 신중하게 선택해.’

페르세르크의 조언에 나는 말 없이 이실디, 아니 윤희령을 바라보았다.

“뭘 봐 이 범죄자 x끼야!”

확실히 그녀의 말투는 이곳 인간들의 기본적인 말투와는 약간 상이한 느낌이었다.

“어디 한번 캐보면 되겠지.”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나는 결과를 위해 그 과정이 돌아가는 짓을 하지 않으리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한쪽 주먹을 허공에 후려쳤다.

쩌엉!!!!

동시에 균열이 열리며 그 안에서 두 자루의 검이 흘러나왔다.

생자를 베는 붉은 검, 홍단이.

사자를 베는 푸른 검, 청단이.

상대가 심연의 공주라면, 전투에 방심이 존재해선 곤란하다.

현재 내 무력은 객관적으로 평할 때 심연의 공주와 비슷한 수준.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는 몰라도, 적당한 존재는 상대가 가능하다.

두 번째 환골탈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마당에 상대가 베르샤처럼 특수한 케이스의 적도 아닌데 힘을 아낀다거나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물러나.”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것일까.

이실디는 곧바로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장님!”

“물러나!!!”

신검보다는 마검에 가까운 것이 홍단이와 청단이라 할 수 있다.

녀석들의 권능은 너무 강해서 오히려 사용하는 사람의 역량을 깎아 먹기 마련이니까.

그런 만큼 두 아이가 내비치는 섬뜩한 힘 또한 확연하게 전해진다.

“너…… 정체가 뭐야.”

나를 향해 질문하는 이실디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두 검을 쥐고 가볍게 기수식을 취했다.

‘페르세르크. 금기유는 포기해. 절대보옥만 챙겨서 이곳에서 빠져나가.’

‘데이비.’

‘이 여자를 살려두면 곤란해.’

베르단데의 경우 변덕스레 상황을 넘겨버리긴 했지만, 심연의 공주는 근본적으로 현재 내 최대의 적이라 봐도 무방하다.

“무슨 이유 때문에 정체까지 숨기고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어디 한번 해보자고.”

싸늘하게 말한 내가 무릎을 살짝 굽힌 뒤 내공을 아주 부드럽게 운용한다.

우선은 상대의 역량과 능력을 알아봐야 한다.‘

심연의 공주는 저마다 각기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마찬가지.

그러니 우선은 그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간다.

[천마신공]

[이검 발아]

[뇌룡아]

콰지지지직!!!

홍단이와 청단이의 검신에 황금빛 뇌광이 서림과 동시에 나는 힘을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섬광처럼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흡?!”

섬광같이 쇄도하는 내 공격에 그녀의 눈이 부릅 뜨여진다.

그리고.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내 두 검이 그녀의 어깨와 복부를 꿰뚫다 못해 그대로 그녀를 창고 저 너머까지 파괴하며 처박아버렸다.

갑작스런 충돌에 반응한 이는 없었다.

심연의 공주.

단신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힘을 지닌 이실디조차도 말이다.

“커헉!!! 쿨럭!”

내 검격에 그녀는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게 무슨…….”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심연의 공주가 조금 전의 공격을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말이 되질 않는다.

그녀의 복부를 밟고 있던 발을 지지대 삼아 튕기듯 그녀와 거리를 벌린 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인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맞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 공격을 방어하기는커녕.

인지하지도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

묘한 느낌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통통 튕기던 륀느는 늘 그렇듯 한가할 땐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양과 눈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빛의 강렬함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지만 륀느는 보통 생명체가 아닌 골렘이다.

비록 그 근본은 백익이라는 생명체에 기반을 두지만, 그녀의 육신과 장기 대부분은 이미 기계 장치로 갈아치운 후였다.

심지어 생명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심장조차도 말이다.

데이비가 신혼여행을 떠난 뒤 륀느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다름 아닌 일리나를 조용히 호위하는 임무이기도 했다.

에나벨과 메라몽을 시녀로 위장시켜 일리나의 곁에 붙여두긴 했지만, 륀느 본인조차 그 시야에서 일리나를 함부로 떼어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보호대상은 현재…….

“언니는 그럼 오빠의 사랑하는 사람이야?”

“응? 아…… 아냐!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니 호호호!”

당황하는 일리나와.

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꺄르륵 거리는 하프 엘프. 뮤우.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뮤우는 하인스 아카데미의 정식 학생으로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공부를 원 없이 하게 되었다.

다른 전쟁고아 출신의 아이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교육난이도에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뮤우는 그런 것 하나하나를 너무도 즐겁게 이행해냈다.

놀라울 정도의 재능을 보이면서 말이다.

한때엔 엘프 마을에서 천덕꾸러기로서 마을 내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지에서 홀로 살아가던 불쌍한 아이였다.

하지만 데이비와의 만남 이후 엘프들은 그녀에 대한 죄를 속죄했고 그녀는 그렇게 하인스 영지와 달의 숲을 오가며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다.

듣기로는 제법 친한 친구도 많이 생겼다는 모양인데.

남자아이들 같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뮤우는 전쟁고아들 사이에서도 빛이 나는 아이였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고 당연히 수많은 남자아이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아이는 없었다.

마치 무언가 겁에 질린 것처럼 말이다.

뮤우는 남자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남자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할 뿐이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말없이 멀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리나와 뮤우를 바라보던 륀느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륀느의 소유자인 데이비가 투덜거리며 쏘아붙이곤 하던 발키리아라는 신비 종족, 케인이었다.

아니. 말투를 보아하니 기본적으로 케인의 인격이 아닌 그 내부에 있는 다른 무언가다.

“륀느, 휴식 중이라 명시.”

장난스레 발을 통통 튕기며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륀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의미 불명, 륀느가 해석을 요청해.”

“별 것 아닙니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그 모습에 륀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륀느, 뛰어난 생체 골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렇습니까. 혹시 당신의 근원에 대해 궁금했던 적은 없습니까?”

“륀느, 관심 없어.”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런 그녀의 대답에 케인은 말없이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과 태생의 사명은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태생의 사명?

그 말에 륀느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가 알고 있는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느긋한 미소를 짓는 케인이 아닌 평소의 철없고 어린아이 같은 케인만이 남아있었다.

“뭘 봐, 깡통! 어머니보다 못 생긴 게!”

빠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륀느는 순식간에 소환한 노루발못뽑이, 즉 빠루를 그대로 집어던져 그에게 직격시켰다.

* * *

“커헉”

피를 토하며 일어나지 못하는 이실디의 모습에 나는 침묵을 고수했다.

심연의 공주의 육신치고는 너무 약하다.

홍단이가 비록 물리법칙계의 모든 것을 베어 넘길 힘을 지니고 있다지만 심연의 공주쯤 되면 그 저항력도 굉장한 편이다.

하지만 이실디의 몸은 조금 단련한 인간의 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쿨럭…… 방금 대체 무슨 일이…….”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키며 검을 지지대 삼아 일으켰다.

“쿨럭!!”

내상까지 입었다.

단번에 전투능력의 7할 이상을 상실해버린 이실디의 모습에 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심연의 공주는 무력을 상징한다. 그곳에 예외는 없고, 그 무력은 편차가 있다 해도 하나같이 세상을 뒤흔들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 보는 그녀의 힘은.

잘 쳐 줘봐야 초절정에서 화경 사이.

티오니스로 치면 익스퍼터 최상급에서 마스터 초입 수준이다.

그녀가 연기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육신이 너무 약했다.

“연기에 천부적인 건가? 아니면, 정말로 돌연변이인 건가?”

내 물음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다.

“x발 잘 생기면 단줄 아나? 뭐 저딴 자식이 다 있어! 야! 너 거기 똑바로 서 있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화끈하게 소리치면서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들고 나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천열문 1대 제자!! 윤희령이다! 여기서 네놈을 쳐 죽여주마!”

그녀의 화끈한 외침과 동시에 천지희가 보여주었던 푸른 화염 같은 것이 그녀의 눈에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한 차례 움츠러드는 듯 싶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녀가 사용한 무공은 천지희가 사용하던 천열신공.

아니 정확히는 자성이 사용하던 정수가 빠진 천열신공과 흡사하다.

크게 모난 무공은 아니지만, 천마신공을 대성해버린 내게 닿기엔 너무 엉성한 무공이었다.

심연의 공주가 육체능력도 떨어지고, 정신적인 방어도 약하다.

거기에 무력도 약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죽여 후환을 없애자.’

심연의 공주에 한해선 냉정하기 그지없다며 혀를 차던 페르세르크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녀의 안전과 차후 내 취미생활의 영위에 방해가 되는 심연은 단 하나라도 남겨놓을 수 없었다.

모두가 긴장한 채 나와 [이실디]를 바라본다.

꼴에 정의를 표방하는 맹이라고 비무 사이에 끼어들지도 않는 멍청이들이었다.

이게 막고라야? 비무로 보이나?

지금 내가 하는 건 엄연한 목숨 투쟁, 즉 생사결이었다.

나는 검 끝에 푸른 기류를 끌어올리며 굉장한 속도로 파고드는 그녀를 향해 홍단이를 바닥에 꽂고 청단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사자를 베는 푸른 검이면 그녀의 근본에 아주 조금이라도 닿으리라.

그리고, 심연의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만들어준 히든카드와도 같은 힘.

금기의 업을 전신에 발현하며 한 발 내디뎠다.

파바바바바박!!!

목표는 빠른 속도로 쇄도해오는 그녀의 목과 상체.

그곳을 비스듬히 베어내어 금기의 업에 담긴 힘을 모조리 방출한다.

눈을 부릅뜬 내가 그녀를 죽이려던 찰나였다.

“대 사저! 안됩니다!!!”

갑작스런 외침에 이실디의 몸이 움찔한다.

서걱!!!!

동시에 내 검이 그녀의 목을 향해 휘둘러 졌고 정확히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내며 허공을 갈랐다.

“…….”

“자…… 자성이?! 게다가 희아까지? 너희들이 여기에 어떻게…….”

당황한 듯 고개를 들어 소리치는 이실디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리고, 나 또한 말없이 청단이가 휘두른 검로를 바라보았다.

심연의 공주치곤 너무 약한데.

내가 그녀를 봐준 것도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그녀가 쓰러지건 말건 나는 그녀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내 검로를 피해내며 넘어졌다.

마치 몸이 아주 조금 전투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

청단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녀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저건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설사 연기가 맞다면 그것은 그녀의 능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결과가 어찌 되었건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그러했다.

자신의 근본에 대한 모든 힘은 물론, 기억까지 잃어버린 팔푼이 심연의 공주.

그것이 아니면 설명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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