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8화
“첫째. 저 여자가 맹에 들어온 건 언제지?”
자성을 따라 나갔던 이실디를 언급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적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제가 말해야 합니까?”
“무림맹이 내 적이었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아. 나는 현재 중립이니까 계속 까불어봐. 악림문 쪽에 붙어도 나는 관계없어.”
“…… 수룡검희가 맹에 투신한 것은 대충 5년 전입니다.”
그때 당시와 비교해도 거의 늙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놀라운 미스테리지만 그녀가 반로환동의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인체의 신비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천열문에서 왔다고 하며 무림맹의 단원을 뽑는 시험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하고 현무대에 들었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정의로운 성정과 뛰어난 무공실력으로 현무대의 단장이 되었다…… 뭐 대답은 이 정도입니다만, 충분하신지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천열문의 1대 제자였다는 점에서 이곳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긴 힘들었다.
“그럼 질문을 하나만 더 추가하지.”
“추가 요금을 주신다면요.”
“받아.”
담담하게 아공간에서 꺼내둔 귀금속을 건네 던지자 그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왜 웃겨?”
“하하…… 아닙니다. 그저…… 맹의 군사에 있는 제가 대가로써 돈을 요구할 리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아실 텐데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다시 묻지. 최근 십수 년 안에 압도적인 괴인이 출몰한 적이 있나?”
내 물음에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압도적인 괴인이라…….”
“뭣하면 무림인도 좋아.”
내 말에 그는 고민하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고강한 무공을 자랑하시는 여러 고수들이 있긴 했지만 단신으로 압도적인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래. 정보 고맙네.”
“질문은 그게 끝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
나는 벽옥 조각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건…… 맹에서 보관하고 있던 보물이군요. 어느 날 대도 유신자가 훔쳐가는 바람에 찾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장물아비들이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이걸 어디서 구했지?”
“…… 글쎄요. 기밀사항이라.”
굳이 이것까지 답해야 하나?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였다.
“당신은 아직 믿기 힘든 존재입니다. 저는 무림맹의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는 이로써 혼란을 야기하는 당신에게 무한정 협조할 순 없습니다.”
“호오.”
“알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한 말 때문에 아주 잠깐이나마 현무대에 큰 문제가 생길 뻔한 것을.”
윤희령의 성격상 악림문과 싸우겠다며 박차고 나갔을 터.
그 일로 악림문이 뻔뻔하게 항의를 해온다면 무림맹의 경우엔…….
“윤희령과 현무대를 버리겠지.”
“……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무능함에 핑계를 달지 마.”
“당신…….”
“대답할 생각이 없나?”
“당신은 강합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
“무림에 나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번이 초행이다.”
“천귀살마를 정말 당신이 제압한 게 맞다면. 저와 거래를 하시죠.”
“거래라.”
“네. 당신은 좀 전 제게 말했습니다. 추가 요금을 지불한다고.”
“해봐.”
“무림맹의 대표로 이번에 백도와 흑도 사이에서 대규모 비무 대회가 개최됩니다.”
“관심 없는데.”
“그곳의 보상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보상?”
“네. 당신은 무슨 이유인지 그 벽옥 조각을 원하시는 듯합니다만…… 말씀드리지요. 저희 무림맹이 가진 그 벽옥 조각은 환나라 황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환나라의 황실에서 이번 비무 대회의 우승자에게 벽옥을 수여한다고 하였습니다.”
보고 있으면 묘하게 아름다운 보석이다.
또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공을 정순하게 만들고 증진효과를 일으킨다.
어느 무인이 그것을 노리지 않을까.
“흐음.”
“양이 걱정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환나라에서 보상으로 내놓은 벽옥은 이런 조각이 아닌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환나라 황실에선 그리 말했습니다. 벽옥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으로 소유자는 영원한 젊음을 얻을 수 있다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저는 그딴 보상 관심 없습니다. 다만 이제 무림 초출로 알려진 당신이라면…… 출전 자격이 충분하지요.”
무림 초행인데, 힘은 천귀살마를 누를 정도로 강하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한가지. 흑도를 짓눌러 주십시오.”
백도의 소속이 되어서.
나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했죠? 뭔가를 얻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랬지.”
“무림맹이 가진 벽옥 조각은 그냥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승하신다면 그 또한 넘겨드리겠습니다. 사실 맹에선 그 물건을 상당히 골치 아파하고 있었거든요. 사도의 물건이다 보니.”
정(正)을 숭상하는 무림맹이 사술이 섞인 돌멩이에 관심을 둬본들 의미가 없다.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 중엔 그걸 노리는 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갈환은 그런 물건을 가지는 걸 오히려 꺼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겨서 그것을 얻었을 경우 생길 내분을 걱정한 것이다.
제갈환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흑도를 누르고 맹의 위상을 높이는 것.
그것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가져올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뿐만은 아니지?”
“당신은 정말 무림 초행 같지가 않네요. 혹시 은거한 고수입니까?”
“초행 맞아.”
경험은 이미 심검을 넘어섰지만.
내 대답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가 당신께 왜 이런 말을 구구절절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라도 조심하십시오. 이번 흑도의 후기지수들은 천재라는 호칭으로도 부족한 자들이 가득합니다. 약관의 나이에 절정은 물론, 초절정의 고수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니까요.”
“그래? 재미는 있겠네. 무림맹엔 그런 인재가 없나?”
“태초 마을에 있는 학관에서 제법 재능있는 후기지수들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그가 짜증스레 중얼거린다.
“흑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재능이 밀립니다.
발버둥 치는 걸 보는 재미는 있으렷다.
“좋아. 거래는 성립이다. 약속은 잊지 마.”
“좋습니다.”
‘데이비. 조용한 수면에 그대 같은 바위가 던져지면 그 파장은…….’
‘아니, 오히려 잘됐어. 천마를 마인으로 몰고 있는 이놈의 세상에 보여주고 떠날 생각이야.’
내 스승이었던 독고준은 가르치는 데엔 젬병이고, 놀라울 정도로 인간말종 같은 술고래였지만.
그를 욕해도 되는 건 그의 제자인 나뿐이지 너희 같은 놈들이 아니다.
나는 장물아비에게서 받았던 벽옥 조각. 즉 무림맹의 물건이었으나 이제는 계약금으로 내게 넘어온 절대보옥의 파편을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케인에게 맡겨놓으면 알아서 합쳐놓겠지.
“어디, 햇병아리들 재롱이나 한번 보자고. 그런데 괜찮나? 내 실력을 직접 보지도 않고?”
“현무대 단장을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현무대 단장은 사신대 단장 중 가장 최연소지만 재능만큼은 진짜니까요.”
그런 그녀를 이긴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강함은 입증된 꼴이라는 소리였다.
“당신은 일단 제갈 세가에서…….”
“아니. 천열문 소속으로 하지.”
“네?”
“낙하산은 맹주의 아들이라고 해도 시기를 받는 법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어그로를 확실히 끄는 게 나아.”
“적어도 비무대회가 열릴 때까지 당신의 실력을 함부로 드러내면 곤란합니다.”
“드러내? 힘을?”
나는 피식 웃어넘겼다.
“적당히 다져놓을 테니까 뒷수습이나 잘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리석었습니다. 그냥 약탈해오시죠. 환나라고 유나라고 사실 당신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지. 그러니까 입 닥쳐.”
내 말에 연락을 주고받는 케인의 목소리에 곤혹스러움이 어렸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유희를 즐기시겠다면 말릴 순 없지만…….]
“양국에서 주최하는 거대 비무 대회다. 그런 만큼 보는 놈도 많아.”
내 말에 케인이 침묵했다.
“거기에 새겨놔야지 않겠냐.”
사이한 사술, 혹은 마공으로 치부하던 천마신공의 근본이 어떤 것인지를.
정도 될 수 있고 사도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천마신공이다.
나는 이번 비무 대회를 통해 그것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벽옥 조각이 심연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보다. 이실디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케인에게 가장 묻고 싶은 사안은 그것이었다.
대체 심연의 공주가 무슨 일을 겪어야 저 지경이 되는 건지 말이다.
[직접 확인할 수단이 없어 확답을 드리긴 뭣하지만 아무래도 부작용 같습니다.]
부작용.
슬리지아가 사라지고 각 세계에 갇혀버린 불순물인 심연의 공주들을 세계가 조금씩 압박하며 부작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듯 보였다.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지금이 기회이니 그녀를 처리해버리십시오.]
“그래. 죽일 거면 지금이 최적기이긴 하지.”
다만 그것도 일단은 벽옥을 손에 넣은 후의 일이다.
“당장 기억이 돌아올 것 같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내가 천천히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다수의 젊은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나?”
자의식과잉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소년들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나를 향해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들었다. 천열문 소속으로 갑자기 우리들을 밀어내고 비무 대회에 참전하게 되었다지?”
그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걸어 그에게 다가간 뒤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발을 움직였다.
[유르그 식(式) 군중 제어기.]
[정강이 까기]
콰작!!
섬뜩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쓰러지는 사내를 보며 나는 심드렁하게 쏘아붙였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제갈환과 거래를 하면서 비무 대회를 나간다.
그곳에서 이겨 나는 벽옥을 온전히 다 얻고 제갈환은 무림맹의 위세를 얻는다.
서로 나쁘지 않은 거래지만 그건 제갈환과 나의 거래일 뿐이었다.
실제로 이 무림의 백도 후기지수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기생오라비이며, 높으신 분의 눈에 들어 그런 귀한 자리에 출전하게 된 운 좋은 파락호에 불과했다.
“크윽?! 감히 서역인의 후예 따위가 대 화산 본파의 제자인 내게 살수를 둬?! 검을 뽑아라! 정정당당하게 비무를 신청한다!!”
그의 외침에 나는 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곤 다시금 다가갔다.
그러자 좀 전 정강이뼈가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차인 경험 때문인지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이내 검을 뽑아내 목에 겨누었다.
“정정당당히 비무를 신청한다!!”
대놓고 악한 짓을 하는 [사도]나, 겉으론 깨끗한 척하며 더러운 짓을 일삼는 [정도]나.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
힘을 드러내면 곤란하다 하였던가.
제갈환이 신신당부했던 사실을 기억하며 나는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얼굴로 그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열문 소속 데이비 올 라운이다. 사용하는 무공은…… 그래. 구타로 하자.”
“뭐? 무슨…… 커헉!!!!”
그 말과 동시에 나뭇가지를 검처럼 쥔 내 행색에 당황한 그가 무어라 소리치려던 찰나.
나는 그 가지를 소년의 머리 위쪽으로 휘두르다 놓친 척 던졌다.
그리고.
[4서클]
[썬더 콜링]
콰지지지직!!!!
명백하게 자연사고로 위장하여 벼락 마법을 소환. 그대로 나뭇가지를 피뢰침 삼아 소년에게 내리 꽂아버렸다.
진짜 벼락보다는 약하지만, 벼락과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갑작스런 벼락에 놀란 소년들이 물러나고 벼락에 직격한 화산파 소년은 온몸이 검게 탄 것처럼 휘청거리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이런, 하늘도 무심하시지. 비무를 하는 이에게 벼락을 내릴 줄이야.”
“이…… 이사형!”
“정신 차리시오! 이사형!”
놀란 소년들이 바닥에 쓰러진 화산파 소년을 둘러메고 급히 벗어나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혀를 내두르고 있는 도화선녀, 곽미영과 그녀의 동생 곽준성, 그리고 언제 만났는지 같이 걸어오던 페르세르크가 있었다.
“데이비. 설마 대회전까지 이럴 생각이야?”
“좋은 생각 같지? 다음번엔 자연발화라도 일으켜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