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3화
날뛰던 소녀가 꼴에 재능이 있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경지는 절정 정도.
놀라울 정도의 재능이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이이익…….”
자신의 패배를 인지한 흑도의 소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이런 패배는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차전에서, 그것도 상대가 스스로 발이 걸려 넘어지며 휘두른 검에 제압당하다니! 무림인이라면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를 단 것이다.
무림인에게 있어서 명성은 곧 힘이며, 목숨이다.
흑도 백도를 가리지 않는 절대적인 진실로, 그 명성에 금이 가버린 그녀가 느낄 절망감과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야유하는 좌중들의 반응이 들려온다.
“운 또한 실력! 스…… 승패에 번복은 없소!”
이윽고 심판을 보던 사내가 소리치자 그녀는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대련장 아래로 뛰어 사라져버렸다.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표정이 굳어진 채 짧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보니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리한 반동으로 팔 근육에 무리가 왔다.
“저런…… 얼마나 긴장했었으면, 쯧쯔…… 표정이 죽을상이군.”
“세상에…… 이런 볼품없는 경기를 흑백 비무 대회에서 보게 될 줄이야.”
“어이, 흑백이 아니라, 백흑이겠지!”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이들은 오해를 단단히 한 듯 보였다.
‘데이비, 괜찮은 게야?’
‘그래…….’
말없이 검을 갈무리한 나는 세레머니고 뭐고 그대로 돌아섰다.
환나라의 태자, 월계우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 고민거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까.
신중한 결정이 앞으로의 행보를 정한다지만 이럴 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봐요.”
연무대를 빠져나와 대기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나를 불러세운 소녀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예현화가 있었다.
흑도의 현화 공주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정체는 모르지만, 그녀는 흑도 입장. 나는 백도인 만큼 그리 대화를 나눌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당신…… 대체 뭘 하는 거죠?”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데.”
“방금 당신…… 얼마나 지독한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나요?”
그녀는 내 무력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 전의 비무에서 괴리감을 느낀 존재가 되었다.
단신의 힘으로 거대 고릴라와 힘겨루기를 할 정도의 무인이 스스로의 발에 걸려 넘어져서 상대를 제압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일부러 그랬죠? 상대를 망신시키기 위해. 어디서 그런 극악무도한 검술을 배운 거죠?”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 쓰지 마.”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당신이 한 짓 때문에 그 소저는 평생 치욕을 안고 살아가야 할 거예요!”
그녀의 입장에선 나라는 강자가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아 으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검을 쥘 때마다 오늘이 생각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수도 있겠죠.”
“그걸 따지러 왔나?”
“제가 묻고 싶은 건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대련이 끝나고 팔이 떨리고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던 일을 떠올렸다.
“…….”
“뭐라고 말을 좀…….”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랬다.
월계우가 한 말은 이 세상 사람들에겐 진리로 알려져 있다.
역사는 승자의 손에 쓰이고. 독고준의 만행은 모르는 이가 없다.
비록 무림맹이 독고 가문을 내다 버리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독고준을 공격했으며, 환마교가 그에 가담해 같이 손을 잡았다지만 그런 사실을 알린다고 과거가 변하진 않는다.
과정이 어쨌건, 독고준은 수많은 정사마의 무림인들을 죽인 존재이니까.
이 근본적으로 뒤틀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림 전체를 아예 싹 다 갈아엎어야 했다.
그 말인 즉. 이 세상의 근원을 파괴하여 없앤다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다.
“죽는 것…… 보단 낫다니…….”
“살았으면 됐잖아?”
내 말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랬다.
나는 방금 대련에서 월계우의 말에 머리가 조금 복잡해져 있었고.
자칫 상대의 몸을 그 자리에서 조각내버릴 뻔했다.
그러니까.
본디 나는 취검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고, 살기가 흘러나갔다.
반사적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소녀를 죽이려던 몸을 억지로 제어해 취검으로 바꾼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매끈한 대련장 바닥에 울퉁불퉁한 돌이 있을 리 없다.
정말로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내디딘 지면에 그대로 힘을 방출했고, 아주 살짝 지면을 부서뜨려 세워 올린 후 일부러 턱에 발을 걸었다.
취검은 상대가 살아있을 경우 더더욱 효과가 증폭되는 수치심 전가용 검술.
본능적으로 멈추는 몸의 버릇이 그녀를 살린 꼴이다.
덕분에 더없이 완벽한 취검이 되어버렸지만.
“월계우라고 했나? 대단한 놈이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이렇게 심란하게 만들 줄도 알고 말이야.
그가 의도한 일은 아니겠지만, 효과는 좋았다.
이놈의 세상. 확 망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적어도 죄 없는 인간이 죽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마치 무의식이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죄가 왜 없어? 알려고 들지 않는 것도 죄야. 진실을 외면한 것도 죄다. 이들 모두 죄를 지었다. 흑도와 백도는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잘못은 모두 숨긴 죄. 다른 이들은 진실을 외면한 죄.]
마치 나를 설득하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담담하게 속으로 답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 알려고 들지 않는 게 죄지, 그러니까 x이나 먹으라지.’
개 같은 논리는 나오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 * *
당연한 일이지만 나와 첫 대결을 했던 흑도의 소녀는 수많은 질타를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이제 그녀는 무인의 생이 끝날지도 몰라요.”
“무인의 생이 왜 끝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검을 집어 들었나?”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 흑도도 아니고 백도의 기재에게. 그것도 단순한 공방전도 아닌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진 게 문제지! 당신도 문제에요! 지금 밖에서 당신을 뭐라 부르는지는 알고 있어요?!”
백도 놈들도 전혀 교류가 없는 이 마당에 이 흑도의 소녀, 예현화는 틈이 날 때마다 나를 찾아왔다.
물론, 그때마다 설렁설렁 넘기긴 했지만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화 공주 예 소저, 그만하시지요.”
“도화 선녀, 당신이 제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있나요?”
“소저가 여기 있으므로 인해 이분께 어떤 영향이 가는지 전혀 모르나요?”
도화선녀, 곽미영의 싸늘한 질문에 예현화가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후기지수들의 재능을 꽃피우는 이런 대회에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존재하는 걸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그는 천열문의 후계 소속으로 무림 초출이 맞습니다. 또한, 규정에 따라 약관의 나이이기도 하지요.”
“…….”
곽미영의 싸늘한 일침에 예현화가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예요? 세상에…… 대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실력자가 약관의 나이라니…… 난 분명 수백 년은 늙은 반로환동의 고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저, 소저께선 마치 이분에 대해 잘 아시는 듯한 말투로군요?”
“어떻게 몰라요!? 지금은 거의 실전된 금강불괴공으로 거대한 고릴라를 힘으로 때려눕히질 않나! 백 년 넘은 영수인 적치호를 물어 죽이질 않나! 닿기만 해도 괴사하는 독을 품은 광라지주의 독니를 맨손으로 잡아 뽑아 챙기질 않나…….”
예현화의 말에 곽미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진짜…… 그랬습니까?”
“…….”
그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 때문이었다.
‘데이비. 그대답지 않게 고민을 많이 하는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잘댔다고 소문이 날까.’
“저기…… 데이비 공자님?”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도화 선녀, 곽미영의 행동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 큰 누님이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그 모습을 본 곽미영의 동생, 공동파의 2대 제자 곽준성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곽미영은 반응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진짜…… 예 소저의 말대로 그런 짓을 동굴에서 하신 겁니까?”
“무슨 짓?”
“과…… 광라지주의 독니를 맨손으로 잡아 뽑으셨다고…….”
“이거 말입니까?”
나는 아공간에 넣어두었던 거대한 거미의 독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보통 같으면 내공으로 몸을 보호해도 독니의 극독에 손이 괴사할만한 물건이다.
하지만 헤라클래스 덕분에 어지간한 독은 다 먹어본 입장에서 웬만한 독은 죄다 내성이 있는 편이기도 했다.
“세상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말해봐요. 혹시 뭐, 천년 묵은 용이 인간으로 둔갑한 거 아니에요. 혹시? 아니면, 구미호나 이무기 같은…….”
“쓸데없는 소리말고 돌아가.”
담담하게 말한 나는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으며 이곳에서 사용하는 검인 은빛의 철검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답이 내려졌나 보구나.’
페르세르크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마 독고준은 모두의 구원자라기보단 단 한 명을 위한 영웅이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하는 건 독고준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천마 독고준의 과거 세탁은 과감하게 포기한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대로, 독고준의 손자가 살아서 천마신공을 사용하려면 천마신공에 씌워진 탈을 벗겨내는 게 제자로서 할 일이다.
천마신공은 정확히 만류 근원 무공에 가깝다.
비무 대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것은 없다.
비무 대회는 백도와 흑도 총 33명이 출전한다.
한 명의 부전승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토너먼트식으로 진행되는 만큼 다음 순서는 오래가지 않아 내게 닿았다.
비무 대회가 시작된 이상 이제는 흑도와 백도로 나눌 순 없었다.
최종승자가 백도에 있는가, 흑도에 있는가였으니 말이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향해 대뜸 말하는 소년이었다.
“청성파, 본가 제자 유경손이다. 절기는 청운적하검과 칠십이파검.”
제법 실력이 있는 녀석인지 기도가 제법 안정적이다.
하지만 인성은 도가 놈 답지 않게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첫 경기 잘 보았다. 설마 우승 후보 중 한 명을 그렇게 꺾고 올라올 줄은 몰랐다만 감사 인사 정도는 해두도록 하지.”
“감사 인사?”
“적어도 2차전은 낙승으로 끝날 테니!”
그렇게 말한 그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 절도있게 기수식을 잡았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이곳까지 올라온 낙하산. 그렇기에 오랫동안 노력해온 구파일방의 본가 제자로서 제대로 붙으면 질 리 없다고 판단하는 그였다.
“네 잘난 신에게 빌어봐라. 하면 너를 가엽게 여겨 벼락이라도 내려주실지 아느냐. 하하하하하!!”
유경손의 도발에 나는 말 없이 검 두 자루 중 한 자루만 꺼내든 채 검신을 매만졌다.
운수대통 행운아. 내게 붙어있는 조롱의 별호였다.
퍽 웃긴 일이지만 나는 그 별호를 딱히 나쁘게 보진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비무 대회의 참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심 없이 시선을 꺼버렸던 나와 다르게 그들은 각기의 사정으로 참가자들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상당히 긴장한 소년, 차가운 인상의 소녀. 그 외에 초탈한 듯 무관심한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소녀. 혹은.
‘저 푸른 머리의 아이는 진짜배기 천재로고.’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기도를 완전히 숨긴 채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는 푸른 머리칼을 가진 흑도 출신의 소년까지.
그 수는 다양했다.
그 외에 비무를 보러온 내로라하는 이들이 다 보이는 만큼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검을 천천히 내렸다.
“뭐냐. 검을 내리다니, 포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런 내 행동에 주변에서 야유가 쏟아지고 빈정거림이 터져 나왔다.
“첫판부터 이상하다 했어! 저딴 놈이 무슨 백도와 흑도의 자존심 대련에 나선다는 건지 원!”
“흥! 운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곳이 무공이다! 썩 꺼져라!!”
백도 흑도 가릴 것 없이 사방에서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천열문 소속, 데이비 올 라운이다.”
동시에, 주변의 부산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갑작스레 끌어올려진 내공이 뭔가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내게서 내공을 느끼지 못하던 이들은 갑작스레 심상찮은 내공이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눈을 부릅떴다.
시작은…… 그래. 이놈으로 간다.
“사용 절기는…… 소림의 백보신권. 이외 나한기공과 금강불괴공.”
“무슨?!”
소림은 현재 봉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확히 말해서 소림의 불가 무공은 현재 무림에서 볼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천열문의 소속이라는 작자가 다른 무공도 아니고 소림의 백보신권을 쓴다?
“감히…… 봉문한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겠다고?! 네놈은 무가에 대한 예우도 없느냐!! 내 청성파의 이름을 걸고 네놈을 곱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유경손이 순식간에 검을 찔러넣듯 파고들었다.
살초를 써도 상관없다던 규정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까지 오면서 나에 대한 적개심이 바짝 올라서인지 그 검기가 날카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검을 내려 세우고 있던 나는 검을 바닥에 가볍게 던져 꽂아버린 뒤 양손을 우드득 소리 나게 꺾고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소림공]
[금강불괴신공]
스스스슷!!!
이윽고, 내 주변에 황금빛 기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검을 찔러넣는 유경순의 검을 향해 내 손이 천천히 뻗어졌다.
카가가가각!!!
마치 금속이 마주치는 듯한 소리였다.
순식간에 놈의 검을 검지와 중지의 사이 틈으로 잡아버린 나는 검이 손의 살을 파고들지 못하고 이가 나가버리자 기겁하는 유경순을 검째로 당겼다.
“으억?!”
전신의 균형을 잃어버린 놈을 내 정면까지 끌고 온 내 손에 빛이 머금어진다.
그리고, 내 주먹이 그의 복부에 거의 닿았을 무렵.
내 전신에 넘실거리던 황금빛 기류가 일순간 폭발하듯 엄청난 소리를 내며 퍼져나갔다.
[백보신권]
[만근격]
천근추와 만근추의 묘리와 비슷한 힘을 주목하나에 담는다.
천마 독고준이 이것을 익혔을 당시, 만근격을 사용할 수 있던 소림의 스님은 단 한 명뿐이었다.
쩌엉!!!!!
콰아앙!!!!
엄연히 급소를 노린 공격이었다.
“커…… 헉…….”
피를 토하며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다는 듯 추욱 늘어져 버리는 유경순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날아간 자리엔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훑고 지나간 듯 섬뜩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 세상에! 탈신지체?!”
“마…… 말도 안 돼! 고작 약관의 나이에 탈신지체에 들어섰단 말인가?!”
경악하는 고수들을 뒤로한 채 말아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편 나는 소림의 황금빛 내공을 서서히 꺼뜨리고는 돌아섰다.
그들이 그저 행운아라고 비웃었던 이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 탓에 혼란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경악은 내 두 번째 대련에서 더욱 거대해졌다.
“흑도, 흑상문의 본가 제자. 흑태고다. 절기는 흑철파황공.”
“천열문 소속 데이비다. 사용 절기는 무당의 태극묵기검.”
소림에 이어 무당.
내 말에 주변에서 또 한 번의 경악이 일었다.
천열문에 대해 알만한 이들은 알고 있다.
천열문은 천열신공이라는 특유의 무공을 사용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온 놈이 사용한 무공은…… 봉문한 소림사의 절기였으며, 이번엔 무당산의 절기. 태극 기공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빼든 채 내가 가볍게 검을 움직이자 바람 같은 칼바람이 불며 내 주변 바닥에 상흔을 남겼다.
태극의 문양이 순식간에 새겨지자 흑상문의 제자 흑태고의 표정이 심상찮게 굳어진다.
“저…… 저?! 어떻게 본가의 무공을 외부인이?!”
봉문한 소림사야 항의할 이도 없다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당파의 소속 무인들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한 자루의 검을 내려 세운 채 나머지 검을 들어 흑태고를 가리키고 까딱거렸다.
“이…… 이놈이?!”
“먼저 가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나는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두 손가락만 펼친 채 절도있는 움직임으로 비스듬히 아래로 튕겼다가 끌어올렸다.
일순간 공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변을 장악한 내공은 사방을 뒤흔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흑태고의 거대한 체격을 들어 내 쪽으로 날려버렸다.
마치 강대한 인력이 그와 나 사이에 작용해 그가 허공으로 튕겨 끌려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큭?!”
태극기공치고는 너무도 당혹스러운 모습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을 즈음.
나는 손에 쥔 검 한 자루를 가볍게 튕겼다.
투웅…….
청명한 소리와 함께 마치 흰 화선지에 먹물이 튀기듯 기이한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털썩…….
그리고, 그 형상이 사라졌을 때.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최고의 기재라고 뽑혀온 흑도의 기재 중 하나인 흑태고가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말이다.
“마, 말도 안 된다…… 무당파의 본가 일원도 아닌 자가 어떻게 태극묵화를…….”
마치 묵색의 꽃이 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태극묵화.
그게 어떤 무공인지 아는 이들에겐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호오…… 굉장해.”
침묵한 좌중들 사이에서 대련을 지켜보던 환나라의 태자. 월계우가 손을 까딱거렸다.
“부르셨습니까.”
“저자와 대화를 해보고 싶구나.”
“곧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래. 되도록 정중히 데려오거라.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도록.”
그는 차후에 큰 도움이 될 자 같으니.
월계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쓸모없는 년이 왜 살아서 이곳까지 온 거지?”
“그것이…….”
“쓸모없는 놈. 꺼져라.”
“예. 태자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