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7화
네 마리의 거대한 힘을 품은 신수들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두 국가의 연합군 수장인 조순과 구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상에 사뿐히 내려선 세 명의 선녀를 바라보았다.
“선계의 존재에 대해선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었을 뿐이오만. 이리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대 환나라의 장군 조순이라 하오.”
“구환이라 하오이다.”
“선계에 존재하시는 상제의 일곱 번째 흔적인 소린이라 하옵니다. 듬직하고 기개 있으신 장군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페르세르크는 제법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며 두 남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그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맨 모습으로 나가는 건 큰 위험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 더 외향을 바꾸어 언뜻 보면 못 알아보게끔 스스로를 변모시키는 센스를 선보였다.
“허흠! 선계의 존재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이 중원의 땅에서 선계의 존재는 마냥 가볍게 여겨지는 요소가 아니었다.
티오니스로 치면 프리아 여신이 직접 신의 사도들을 내려보낸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비록 황궁이 아니라 융숭한 대접을 해드리지 못하여 송구하오. 선계의 분께서 진짜 신수님들과 함께 강림한 모습을 보니 나로서도 든든하오.”
그렇게 말한 그가 손을 들어 보인다.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다가왔다.
“선계의 선녀분들이시다. 정중히 모셔라.”
“잠깐만요.”
“죄송하오나 선계의 분들이시여. 현재 이 하계를 어지럽히는 자를 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참이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잠시 말미를 주었으면 하오이다.”
조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군세를 지켜보던 신수를 바라보았다.
“혹…… 가짜 신수도 있소?”
“신수들은 세상을 조율하는 고귀한 존재, 둘은 없답니다.”
그래 없지.
지금은.
염원과 힘을 끌어모아 신수를 태어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주술사가 어디 흔한 줄 아는가.
나의 경우는 약간 특이한 케이스로.
실질적인 경지도 경지이지만 내 몸엔 신수를 한차례 모두 태어나게 했던 우치의 도력이 존재한다.
다른 이들은 이만한 경지도 경지이지만 하고 싶다고 태어날 수 없는 것이 신수라는 소리였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하면…… 우리 환나라 군대를 공격한 신수들은…….”
“네. 그들입니다.”
챙!! 챙챙!!
그 말과 동시에 조순이 검을 뽑아 페르세르크의 목에 검을 겨눈다.
“저 괴물들은 우리 환나라의 병사들을 죽였소.”
“저는 현재 장군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보다 더욱 중요하면서 진실된 이야기를 하고자 온 것입니다.”
애초에 대부분은 진실이다.
페르세르크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조순을 향해 말했다.
“현재. 하계에 끔찍한 마귀가 출현했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그냥 둘 경우 이 하계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게 말한 페르세르크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한 손을 내밀었다.
“선계의 상제께서는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다 하시어 직접 저희와 사신수분들을 내려보내셨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하늘에 부유한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신수들이 그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만. 내가 폐하께 받은 명령은 단 하나요.”
고지식한 말투로 조순이 쏘아붙였다.
“대 환나라의 태자마마를 시해한 극악무도한 자를 잡아 들일 것.”
당연히 갑자기 나타난 선계의 존재랍시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선계의 존재라는 이름을 빌린 이유는 간단했다.
틈을 만들기 위해.
“후우…… 어쩔 수 없군요. 상제께선 하계의 인간들이 현재 눈이 멀어 진정한 적을 보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십니다.”
“이 일이 끝나면 얼마든지 들어주겠소. 하면…… ”
조순이 페르세르크를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잠시 무례를 용서하시기를.”
“무슨?!”
그렇게 말한 페르세르크가 신비롭고 우아한 자태로 양손을 들어 올린다.
우우웅!!!
동시에 조순과 구환을 포함한 선녀로 위장한 세 명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8서클 전이 마법]
[워프]
우웅!!!!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미리 준비된 좌표로 공간을 점프시켰다.
두 국가의 연합군을 지휘하는 두 장군이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병사들이 가득하던 장소가 아니었다.
고용한 숲속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음습한 기분이 드는 장소였다.
“이곳은 대체…….”
“대관절 이게 어찌 된 것이오!”
대뜸 항의하는 두 장군을 향해 페르세르크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이미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오해를 풀기위해선 우선 이것을 설명해야겠지요.”
그렇게 말한 페르세르크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었다.
“저것이 보이십니까.”
모를 수가 있나. 오에돈을 죽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이 천중원 곳곳에 퍼져나간 타락의 늪을.
“본 적은 있소. 탐사하기 위해 접근했던 병사들 다수가 당했지. 고수들의 말에 따르면 태자마마를 죽인 곳에서 이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더이다.”
“그렇지요.”
“그자…… 데이비라는 서역인의 후예가 저지른 일 아니오? 그자만 처리한다면 응당 문제는 해결될 터.”
“그는 태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외려 그를 헤친다면 이 땅에 펼쳐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말한 페르세르크는 보석을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동시에 옅은 빛과 함께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페르세르크가 가진 영상 저장석에 있던 모습.
형체를 잃어버린 심연의 괴물, 오에돈과 내가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격렬 하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빠른 전투 모습에 두 장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건…….”
“직접 듣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천천히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곳으로.
미리 복장을 바꿔 입고 있던 내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거친 초대는 사과하지.”
몸에 밴듯한 오만한 말투.
느긋한 표정에서 상당한 카리스마를 자아냈다.
“네…… 네놈은!”
“정식으로 소개하지. 왕자의 직급에 있는 데이비라고 한다.”
내 말에 두 장군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서…… 선계의?!”
“설마!”
내가 한 말은 그저 왕자라고 소개한 것뿐이다.
하지만.
“왕자마마. 이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언하는 에나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에나벨의 발언에 두 장군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나는 내가 선계의 왕자라고 한마디도 한 적이 없지만.
에나벨이 내게 예우를 갖추는 것만으로 나의 존재가 인간에서 선계의 왕자로 격상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만.
형체를 잃어버린 괴물 오에돈이 선동과 날조를 통해 나를 엿먹이려 들었다면, 나 또한 선동과 날조로 이 사태를 해결하면 그만인 일이렷다.
본모습도 없는 놈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려 들지 마라.
“시간이 없어. 타락의 늪이 생겨난 건 생각지 못한 변수로 이 이상 자네들의 투정을 받아줄 여력이 없다.”
그렇게 말한 나는 페르세르크가 가지고 있던 영상 저장석을 꺼내 활성화 시켰다.
그러자 페르세르크와 내가 이곳 천중원의 절경을 돌아다니며 저장한 영상 목록들이 드러난다.
“음…… 이건 아니고. 이거네.”
그렇게 말한 나는 영상석의 내용물을 활성화 시켰다.
심연의 힘으로 인해 기억이 지워져 버린 월계우와의 대면 장면은 없다.
오에돈은 내가 그런 방식을 통해 결백을 증명해버리는 걸 원치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상 저장석을 통해 놈과 충돌했을 때의 장면은 확실히 보관할 수 있었다.
영상 저장석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나와 촉수로 가득한 짐승인 오에돈이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화려함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것이 아닌 오에돈의 형체였다.
형체를 잃어버린 괴물.
놈의 형체는 냉정하게 분석해봐도 절대 호감이 가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래서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참 간사하고 뻔하기 그지없다.
“지금 당장 믿어달라 하지 않겠다. 본래엔 조용히 놈을 찾아 제거하려 했지만 내가 손을 쓰려 했을 땐 이미 환나라의 태자 월계우가 놈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웃기지 마시오! 그딴 거짓부렁을 믿을 것 같소?!”
“단순한 오기로 믿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내 물음에 유나라의 장군 구환이 천천히 나섰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검을 뽑아 들이밀며 말했다.
“저 일이 사실이라 한들, 당신이 데려온 존재가 우리 유나라의 공주이신 옥화 공주마마를 살해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그의 외침에 내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휘이이잉!!!
동시에 깃털이 휘날리며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바람이 불었다.
“윽…….”
그리고 침묵하고 있던 두 장군의 시야에. 살아있어선 안 될 인물이 나타났다.
“구환 장군.”
“고…… 공주마마!!”
옥화 공주 수윤의 존재를 눈치채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은 구환이 흙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공주마마의 신변을 제때에 지키지 못한 불충한 신을 벌하여주옵소서!!”
그의 외침에 수윤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번 사태는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요.”
“옥화 공주?”
조순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유나라!! 네놈들이 배신을 한 것이냐!!”
조순의 외침에 수윤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소녀가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았을 뿐이니라. 이분께서 나를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또 그들과 연결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
침통한 표정으로 수윤이 우는 척을 하자 조순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대로 구환은 머리를 두어 차례 더 찧으며 소리쳤다.
“마마! 마마의 말씀이 진실이옵니까!”
“시일이 부족하오. 장군. 환나라의 조 장군께서도 소녀의 말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하오. 이번 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이 중원 전체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선계에서 나타나고, 괴이쩍은 존재와 그 존재가 만들어낸 흔적이 있다.
그리고.
가장 신빙성을 더해줄 존재.
유나라의 공주가 살아 나왔다.
“고…… 공주님을 살릴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태자마마를 죽게 내버려 두었는가!”
“나라고 완벽한 게 아니니까.”
씁쓸한 척 능청스레 연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모두가 연기는 아니었다.
월계우의 몸 안에 깃들어있던 오에돈의 힘이 폭주해 그를 죽였을 때.
나는 그것을 간섭해 막기엔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들이 믿든 믿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오에돈과 함께 넘어온 심연의 존재는 이 세상을 침식해나갈 것이고.
나는 그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이곳에서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다.
이기적이지만.
적어도 티오니스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는 것보다 이곳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내 말에 두 장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단 자신의 주군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구환은 침묵했고. 환나라의 조순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굳이 이런 말장난을 하기 위해 굳이 선계의 존재를 불러내고 기절시켜가면서까지 일을 쳐야 했을까.
그럴 필요는 없다.
연합군의 장군 두 명을 납치해 진실을 말해주면 그만이니까.
그리하면 다 해결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
그 이유는.
병사들의 눈 때문이었다.
나를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금의위와 두국가의 군세.
십만에 달하는 그 대규모의 인간들의 눈에 선계의 존재가 나타난다면…….
소문은 알아서 커질 수밖에 없다.
“정말…… 괴이쩍은 존재들이 나타났고 태자마마를 죽인 게 사실이오?”
“그래. 이미 침식은 시작됐고. 이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이 땅에 신수의 왕을 강림시킬 거다.”
“굳이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흘릴 필요 없는 피를 흘려야 할 이유라도 있나?”
내 물음에 조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나를 직시했다.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오.”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저 빌어먹을 늪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이미 조사해봤을 텐데?”
조사를 위해 다가갔던 병사들의 온몸이 검게 변색되어 끔찍하게 죽어갔다.
그것으로 타락한 늪의 위험성은 이미 입증된 꼴이다.
“폐하께 고하여야 하오…….”
“전령에게 주작(불닭이)을 빌려주지. 지금 사태에 관해 소상히 알려야 할 거야.”
내 말에 조순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리아 여신은 중원의 존속으로 대가를 걸었다.
단순한 거래 내용이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감각에 적신호가 계속해서 들어온다.
오에돈의 행동은 너무 과감했고.
너무 간결할 정도였다.
놈은 나에 대해 파악하는 적이었고. 그만큼 대비를 했을 텐데.
고작 타락한 늪으로 해결이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차원의 힘을 다루며 다른 심연의 공주들을 타 차원으로 파견시키던 슬리지아는 죽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심연의 공주는 사실상 이실디 하나가 전부.
그 이상은 넘어올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기분이 드는 와중이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
공간을 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비릿한 피 냄새와 다급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