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3화
178. 진짜 무극
하계에선 신선들이 노니는 무릉도원이라고 부르는 선계.
그곳에서 현재 공주 민화는 자신의 앞에 앉은 노령의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상제.”
“…… 괜찮다.”
나긋나긋하며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항마봉사진에 이어…… 불왕의 옥새라…….”
갑자기 궁으로 찾아온 공주인 민화의 발언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현재 하계로 향하는 길이 아주 가늘게 열려있으며, 그곳에서 한 인간이 자신들에게 거래를 제시해왔다.
불왕의 옥새를 돌려줄 테니. 팔신시의 옥과 항마봉사진을 펼쳐라.
대체 하계의 존재가 이것을 어찌 아는가.
오랜 시간 전 천마라 불리는 자에 의해 선계와 하계는 완전히 그 중간 통로가 차단되어 어떤 교류도 할 수 없었다.
현 상제의 전대 상제는 그때 당시의 일을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현재에 와서 하계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사실상 그를 제외하고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들도 모른다.
외려 당사자인 선계의 존재들도 모르는데 하계의 존재가 안다?
그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능성이 있다면…….
1500여 년 전 선계와 하계의 경계를 직접 닫았던 존재. 천마라는 인간 본인이거나, 혹은 그에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
현 상제는 자신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불왕의 옥새가 거짓된 물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상제이시여.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감히 불왕의 옥새가 거짓이라 망언을 내뱉는 자를 어찌 그냥 두시옵니까.”
“그대들은 내가 가진 이 불왕의 옥새가 가짜 같소? 진짜 같소?”
그 질문에 좌중에서 침묵한다.
“말해보라. 천둥의 대신, 구름의 대신.”
천둥의 힘을 다루는 여성과 구름의 힘을 다루는 남성이 입을 다물었다.
“강의 대신과 초목의 대신은 어찌 생각하는가.”
“…… 그…… 그것이.”
“기회는 기회인 게지.”
상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민화는 들어라.”
“예…… 예! 상제!”
다급히 공주가 움찔거리며 예를 표했다.
“큰 공로를 세웠구나. 잘하였다.”
“아…….”
마치 이 칭찬 한마디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민화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주겠니?”
“예?”
당황한 민화가 고개를 든다.
“구름 대신과 천둥 대신, 그리고 비의 대신은 천하대장군과 함께 하계로 내려가라. 민화의 안내를 받아 그 발칙한 인간의 요구를 승낙한다.”
“사…… 상제?!”
놀란 대신들의 외침에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밝히도록 하지. 내가 가진 이 불왕의 옥새는.”
동시에 그의 손위로 붉은빛과 금빛이 섞인 정 사각형의 특이한 물체가 나타났다.
정교한 세공이 되어 만들어진 힘을 품은 물건이었다.
“가짜다.”
콰작!!
그 말과 함께 옥새를 박살 내버린 상제가 말한다.
“불왕의 옥새는 과거 전 상제께서 인간과의 내기에서 패배하시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선조의 과오를 되잡을 기회다. 비록 지금은 한발 뒤로 물러난다 하여 아쉬워 말라.”
그렇게 말한 그가 눈을 감았다.
“이번 일은 단순히 하계와 선계의 문제가 아닌 듯하니…….”
선계는 단 한 명의 의견에 모든 것이 조율된다.
데이비의 요청대로 모두가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스르르륵…….
갑작스레 상제가 있는 옥황궁의 어전 중앙에 화려하고 강대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상제! 물러나시옵소서!”
일순간 대신들이 자신들의 권능을 끌어내며 힘을 발현하려 한다.
갑작스런 이변에 모두가 긴장한 채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고열로 일그러진 듯한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눈부신 하얀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작은 청은발에 작은 체구를 가진 소녀, 바로 륀느였다.
개인적인 명령을 받아 따로 움직이던 륀느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그녀는 륀느가 맞는가 하나도 확실한 게 없는 현 상황에서 그녀는 특유의 빛으로 만들어진 가루를 주변에 흩뿌렸다.
그리고는 등허리에 난 날개를 반짝이고, 머리 위에 원반을 부드럽게 회전시키며 기이한 힘을 품은 무언가를 상제에게 내밀었다.
기이하게 생긴 보석 혹은 조각상이었다.
“누…… 누구시오.”
제아무리 선계를 모두 통괄하는 상제라 해도 본능적으로 경계를 느낄 정도로 신비로운 소녀의 등장에 모두가 침묵한다.
그리고.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상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것을 데이비에게. 그리고, 하나 더.”
소녀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 * *
심연에 잠식된 이들이 움직이면서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일반 민가를 습격해 대규모의 인간을 납치하기 시작한 악림문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악림문은 천마신공을 자신들만의 과격한 방식을 통해 구현하려 하는 단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망자가 된 소교주 태유천은 그런 방식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현 교주에게 있어서 결과만 맞다면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손을 잡음으로 인해 현 교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필요 이상으로 포악하고 잔혹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에돈이 사망하고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그가 심연에 잠식되었기 때문에?
아니었다.
천마신공에 도달하기 위해 손을 잡은 그들의 힘에 심취하기 시작해버린 것이다.
결국, 이제와서 그는 천마신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그저 심연의 힘에 심취해버린 괴인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악림문에서 순수하게 천마신공을 목표로 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지금 남은 건 교주와 함께 심연의 힘에 심취한 자들이 전부였다.
교주는 자신의 몸 곳곳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교주님. 그분들께서 빨리 의식을 진행하라 하십니다.”
“제물이 도착해야 할 수 있다 일렀거늘.”
가는 쇠 긁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교주가 걸음을 옮겼다.
이미 의식장에는 영혼을 잃은 육신들로 가득하고 피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났지만, 이것 만으론 부족했다.
아직 더욱더 산제물이 필요했다.
“그것들은 완성되었느냐.”
그렇게 말한 그가 손을 휘젓는다.
철컹!!!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다수의 장정이 거대한 관을 가지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붉은 머리칼의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여인이 나타났다.
바로 태초 마을에서 데이비에게 제압당했던 그 여인이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해선 안 될 것이다.”
교주의 곁에 있던 장로, 태상제의 말에 붉은 머리의 여인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인다.
“두 번 다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사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손뼉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검은 복장을 입은 사내 몇몇이 더 나오며 정신을 잃은 청년과 여인을 끌고 나왔다.
천열문의 후손이자 악림문에게 복수하겠다던 청년. 한자성.
태초 마을에서 붉은 머리 여성을 감시하던 벽염검성 곽도영과 그의 두 번째 손녀딸인 유화 선녀 곽효영 이었다.
그 외에도 사천당가의 자제였고 태유천에게 복수심의 이를 갈던 여인인 당유린이나 데이비 덕분에 목숨을 구했었던 흑도무림맹의 삼화녀, 현화 공주 예현화 등등.
무림의 뛰어난 자질을 지닌 이들이 다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들을 이렇게 동시에 납치해 올 수 있었는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태자의 죽음 이후 전 중원이 정신없이 흔들린 것은 물론, 흑도무림맹과 백도무림맹 안에서도 배신자들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천열문주의 여식을 데려왔다면 좋았겠지만…….”
“송구합니다. 그 년의 곁에 기이한 존재가 버티고 있는지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그분들이 분노하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렇게 말한 교주는 피투성이가 된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백염검성 곽도영. 꼴이 좋구나.”
“아 더러운 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더냐.”
초췌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교주를 향해 역정을 내는 그였다.
“무슨 짓을 하느냐라. 힘을 추구하는 마교의 교주가 하는 짓이 뻔한 것 아니겠나.”
“도가 지나쳤다!! 악림문 교주!!”
“그 도를 정하는 건 너희들인가? 아니면, 힘이 있는 나인가.”
싸늘하게 웃어 보인 교주는 사내들이 가져온 관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 진실의 편린도 보지 못한 늙은이 따위가 내게 조언하지 마라.”
싸늘하게 말한 그가 거친 손놀림으로 관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끔찍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현재 이 무림은 너무도 퇴화해있다. 서책에서 본 과거의 무인들은 지금보다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끝없이 강해졌고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지.”
그렇게 말한 교주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내가 공포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 무림의 숨통을 조이고 무림 전체를 과거의 그 영광을 되찾으리라.”
“네놈 혼자서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담담하게 말한 그가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관속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 강시는…….”
“만령 강시. 은하검성 유길태.”
교주의 말에 주변에서 침묵하고 경악한다. 은하검성 유길태라는 이름이 가져오는 여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그그그그극!!
뒤이어 다른 관도 열리기 시작했다.
“만령 강시, 적수도룡 학중성.”
“무슨?!!”
“만령 강시 빙검신녀 화옥란.”
세 명의 존재를 이 무림에서 모르는 이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세 명의 무인은 다름 아닌 천마 독고준을 이겼다고 알려진 무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인에게 있어선 전설과도 같은 존재가.
지금 만령 강시로 일어난 것이다.
뒤이어 계속해서 일어나는 만령 강시들의 존재에 곽도영의 얼굴이 경악성이 어렸다.
“그뿐만 아니지. 현재는 사망한 절대 오성들이다.”
뒤이어 나머지 관들이 열리며 3명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명은 곽도영도 이미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천열문주이자 천열신공을 극성으로 익혀 수많은 무인들의 존경을 샀던 절대 오성중 하나 천금 또한 보였다.
“악림교주!! 네놈이 천열문을 공격한 이유가 설마!”
“설마, 본 목적은 아니었다지만 이토록 귀한 강시의 재료를 그냥 버릴 수 없었을 뿐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 강시들.
하나하나 일어난 그들의 존재는 교주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듯 끔찍할 정도로 묵직한 내공을 품고 있었다.
“이들을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수십, 수백 년은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게 말한 교주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생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다시 태어난 절대 오성중 일부와 3명의 무신이다. 제아무리 잘난 환나라와 유나라라고 해도 이젠 끝일지니.”
“미친놈!”
곽도영이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중원을 구한 영웅들에게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란 말인가.
그런 곽도영의 말에 섬뜩한 칼 울림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웅…… 영웅이라. 크흐흐흐흐. 그래. 영웅이지. 압도적인 힘을 지닌 강자. 그들의 생이 어떠했던 승리자들이니까.”
담담하게 말한 그가 손짓하자 6명의 강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시작해보자! 대 격변의 시간이다!!!”
그렇게 외치는 그를 보며 곽도영은 마치 빙의라도 한 것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그를 포박하고 있는 사내를 쳐내고 도를 뽑아 베어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이며 교주와 6명의 강시의 앞을 막아섰다.
만령 강시.
진짜 만령 강시이건 아니건 세 명의 영웅과 절대 오성중 셋이라면 곽도영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으리라.
“절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네놈의 야망은!!! 이 평화로워진 중원에서 날뛰어도 될 야망이 아니다!!”
“중원이 평화롭다는 건 모순이다. 백염검성.”
“사람이 평화를 바라는 게 무엇이 잘못이더냐!!! 검은 지키고자 함이니! 누군가를 헤치기 위해서 쥔 검이 아니다!”
그의 절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교주는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어디 그 잘난 신념을 밀고 가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교주가 손을 휘젓는다.
동시에 유길태의 강시가 검을 뽑고 학중성의 강시가 그의 애도였던 적룡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빙검신녀 화옥란은 새하얀 빛을 머금은 만년백철로 만들어진 비도를 꺼내 들었다.
“멀쩡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몸이니. 몇 합이나 버틸지 모르겠군.”
교주의 비웃음에 그를 따르는 다른 장로들의 미소가 어렸다.
“절대! 절대 이 중원의 평화를 깰 순 없다! 비록 방식은 달랐다 할지라도!!! 백도와 흑도는 피와 철을 대신하여 경쟁과 협력을 키워왔다! 그런 선조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성싶으냐!!”
그의 절박한 외침에 강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크윽?!”
당연히 몸이 망가진 곽도영이 버텨낼 리 만무한 공격이다.
빠아악!!!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곽도영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어르신!! 제가 가세하겠습니다!!”
자신의 몸 안에서 깨어난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깨워내며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한자성이 검을 뽑아 든 것이다.
“네놈의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스승님의 원수!! 감히 스승님의 육신으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내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라!!”
한자성의 갑작스런 난입에 곽도영이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다. 그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자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찮은 기세에 눈을 부릅떴다.
처음 봤을 때.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약자였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너무도 남달랐다.
힘을 숨긴 것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모든 힘이 깨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성…… 자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은인을 만났습니다.”
짧게 말하며 한자성은 자신의 검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분에게 제게 있던 진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도요.”
비록 멀고 험하며, 어쩌면 모두의 적이 될 수도 있지만.
“제 할아버지의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 또 제 아버지나 다름없던 스승님의 억울한 원혼을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시밭길을 걸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한자성의 주변으로 너무도 청명한 흑청색의 기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도가 되었건 정도가 되었건. 그 끝은 모두 하나로 이어지리라.”
우직하게 중얼거린 한자성의 검 끝이 번뜩인다.
“흐……흐흐흐!! 천마신공! 천마신공이로구나!! 네놈! 설마 네놈이 진짜 천마의 후예였더냐! 역시 나의 눈은 틀리지 않았음이니!!”
그런 자성의 행동에 교주가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하자 자성의 표정이 굳었다.
이윽고, 기절해있던 당유린이나 곽효영 등등 다른 이들도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래 한자성보다 경지가 훨씬 높던 이들보다 회복이 빠른 건 확실히 비정상이었다.
이들은 모른 듯하지만.
사실 한자성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데이비가 거짓말을 했을 뿐.
그동안의 노력은 그의 몸과 정신에 고스란히 축적되었고.
데이비에 의해 그 문이 열리면서 모조리 경험치로 변한 것이다.
즉.
현재의 한자성은 본인이 생각한 것 아득히 이상으로 강해져 있었다.
그것이 천혼지체.
세 가지 신체 중 압도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육신이었다.
“하…… 할아버님!”
이윽고 곽효영이 비명 섞인 외침을 냈고, 그 뒤를 이어 당유린이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안돼! 효영아 도망치거라!!”
“하지만 할아버님!”
그 말에 곽도영은 몸을 일으킨 효영의 구속구를 박살 내버리곤 소리쳤다.
“무극을 상대로는 나조차 일초지적이 될 수 없다!! 가거라!! 가! 가서 이 사실을 전해라!! 아니! 그 청년에게 도움을 청해!!”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그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그를 토벌하기 위해 양국의 연합군이 출정했다가 모종의 이유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그 후 꽤 오랜 시간 기절해있었으니 아마 시간으로 치면 며칠 정도 소요가 되었으리라.
그동안 소문에 따르면 그가 선계의 왕자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았다.
“가!! 가라! 그를 찾아!!”
그리 외친 곽도영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천금 문주!! 제발 정신을 차리시오!!”
망자의 시신으로 만들어낸 강시에 바랄게 무에 있을까.
아무리 외쳐본들.
돌아오는 건 없었다.
“하하하하하! 무극이라 자칭하던 천마조차 이긴 세 명의 영웅이다! 이들이 진짜 무극이니라!!”
촤아악!!!
그리고.
곽도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파고든 은하검성 유길태가 마치 은하수를 뿌리는 듯한 검기를 내며 곽도영을 베어 넘겨버렸다.
“꺄아아아아악!! 할아버님!!”
피를 뿌리는 그 모습에 교주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교주, 저들은 어찌할까요.”
“어차피 남은 제물이 모여야 뭘 할 수 있소. 백염검성은 실험용 대상으로 쓰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오.”
그렇게 말하자 사방에서 광기에 침식된 교단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자 포로는 음마굴로 데려가라. 제법 뛰어난 무인들이니 음기를 뽑아내면 제법 많은 양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거다.”
태상제의 말에 당유린과 곽효영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린다.
장로 태상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어두운 지하 석실.
구하러 올 이는 없으며 앞에는 세 명의 영웅과 절대 오성중 세 명이 버티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유린은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 치며 눈물을 흘렸고 곽효영은 이를 악물고 공포를 이겨내려 애썼다.
“움직여.”
이윽고 곽도영을 향해 다시 은하검성 유길태가 움직이려 했다.
“꺄아아악!!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충분히 저항이 가능해야 할 텐데.
좀 전 곽도영이 당해버린 모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버린 곽효영은 비명을 지르며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거친 손길이 그녀를 잡아 끌고 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동작 그만.”
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해 상황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