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8화
179. 악마종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열검을 지면에 내리꽂는다.
석실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주변의 석벽들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분간 불지옥이 될 거라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내가 이곳을 모조리 파괴해버리자 당황한 눈치들이었다.
“자…… 잠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신?!”
예현화가 놀라 소리쳤다.
“문제라도 있나?”
“이 지하에 아직 잡혀있는…….”
인질의 존재까지 모조리 죽일 작정이냐고.
그리 묻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어.”
내 대답에 예현화가 몸을 흠칫 떨었다.
“다…… 죽었다고?”
“제물로 희생된 수백 명. 대체 얼마나 오래 곪아있었던 건지 모르겠다만.”
“…….”
내 말에 예현화가 주먹을 빠득 소리 나게 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윤회에 들기 전이거나, 윤회에 들고 있는 영혼을 잠시 불러오는 짓은 자주 해봤지만 죽어버린 이를 부활시킬 여유는 없었다.
죽음은 아무리 힘을 다 되찾은 나로서도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령 마법으로 부활시키는 것?
강시에 강령술을 하는 것과 같이 잔재를 불러오는 것일 뿐 실질적인 부활은 아니라는 게 현실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사망.
교주를 추적하러 간 에나벨과는 별개로 메라몽은 내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지하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좀 전 보고가 들어왔다.
이놈들이 거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 수많은 생명의 목숨을 대가로 사용했고. 거대한 무언가를 깨웠다.
즉, 이 아래에 있는 것은 의식으로 눈을 뜬 거대한 괴물과.
스릉…….
카아앙!!!!!
눈앞에 있는 이 두 명의 여인이 전부였다.
마치 사신이 일어나듯 나타나 내게 거대한 낫을 휘두르는 무표정의 여인은 공격이 먹히지 않자 미련 없이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나는 손을 휘저어 워프 마법을 발현, 나의 공간을 격리시킨 후 그대로 발동시켜버렸다.
그러자 앗! 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그들이었다.
“환나라 황실이지만 월곤황제가 잘 보살펴줄 거다.”
“크흐, 여기까지 와버렸네?”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발을 한 여인과 무표정을 한 약간 음침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심연의 공주는 울드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대개 미형이 많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두 명의 심연의 공주는 미묘하게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화르륵…….
일대를 완전히 불지옥으로 바꿔버린 레바테인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하자 나는 청단이를 뽑아 들고 가볍게 검신을 쓸어 넣은 뒤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골골거리던 청단이의 힘이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했다.
청단이와 홍단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아이가 인간인 것은 아니니까.
인간의 기준에서 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청단이, 이제 괜찮지?”
[청다니 자, 잘 할 수 이써요…….]
부끄러운듯한 목소리로 청단이의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조용히 두 자루의 검을 응축시켰다.
쿠웅!!!
초단이를 유지하는 건 대량의 힘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심연의 공주를 상대로 힘을 아끼는 건 정말 미련한 짓인 만큼 나는 미련 없이 보석의 파손율을 감안했다.
콰직!!
보유한 보석에서 크게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 몸에서 방대한 힘이 몸속에서 고요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멜트, 어떻게 할 거야? 저 인간, 죽여?”
음침한 인상의 여인이 산발의 여인에게 물었다.
“죽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오에돈의 계략은 사실 어찌 되든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심연의 공주가 바라는 건 그저 혼란뿐이다.
울드를 포함한 세 자매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다른 어떤 심연의 공주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서로 피차 하하 떠들면서 이야기 나눌 사이는 아니지?”
“…… 조심해. 슬리지아를 죽인 자야.”
“아니, 그건 걱정 마. 오에돈 녀석의 말로는 그때 당시에 저놈이 기묘한 힘을 썼다는 모양이야. 지금에 와서는 사용 못 하는.”
“그럼…….”
“슬리지아를 상대할 때의 놈과는 다르게 지금 녀석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지? 그럼 문제가 없네.”
멜트의 이죽거림에 음침한 인상의 여인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델라라고 해. 넌?”
나를 향해 음침한 여인이 조용히 질문을 던져왔다.
“저승사자다 이년아.”
“…… 오만하네.”
짧게 중얼거린 그녀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잔상처럼 흩어지는 그녀의 전신으로 섬뜩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혼자 나설 거야?”
“내가 죽일게.”
싸늘하게 말한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멜트라 불린 산발의 심연의 공주는 흥미를 잃어버린 듯 한발 물러났다.
동시에.
오싹한 기운이 몰아치며 내 목에 무형의 냉기가 몰아닥쳤다.
스릉…….
그대로 홍단이와 청단이를 융합시켜 초단이로 변화시킨 내가 검을 휘두르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 속에서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낫이 튕겨 나갔다.
“날…… 감지해?”
기가 막힌다는 듯 그녀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하여 물러나는 그녀를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초단이를 내려 세우고 그녀에게 파고들자 그녀가 당황한 듯 한발 물러난다.
그리고.
초단이의 청적색 검기가 그대로 델라의 몸을 베어버리려던 그 순간.
나는 멜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공격을 유도한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델라를 베어버렸다.
촤아아악!!!
잔상처럼 흩어지던 그녀의 음침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순간 경악이 어린다.
“컥?!”
동시에 그녀를 베어버린 내 팔이 시꺼멓게 변질되기 시작했지만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델라의 몸을 두어 차례 더 베어 넘겨버렸다.
“크윽?!”
“가긴 어딜 가.”
[초 중검]
[그랜드 크레바스]
콰드드드득!!!
레바테인으로 인해 불지옥이 되어버린 일대 영역이 모조리 박살 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 틈 사이로 시뻘건 화염이 몰아쳐 올라왔고 그 열기들이 정확히 그녀들을 압박했다.
“쿨럭!”
완전히 사라졌다가 멜트의 옆에 나타난 델라가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다.
“저 인간…… 이상해. 슬리지아를 상대할 때의 힘은 없다며!!”
그녀의 외침에 멜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하지만 시간을 끌면 이쪽만 손해인 만큼 나는 그녀들이 나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전에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8서클 역회전]
[폭염계 파이어 볼]
[화이트 노바]
손바닥에 응축시킨 새하얀 도넛 같은 화염구가 머금어진다.
반사적으로 델라가 다시금 흩어지기 시작하고 멜트가 그대로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멜트와 델라. 둘 다 슬리지아나 울드 같은 말도 안 되는 하드웨어는 아니었다.
원거리 메이지 계열의 심연의 공주.
멜트는 그런 느낌이었고, 델라라 불린 저 사신의 형상을 드러내는 음침한 여인은 회피계 딜러 같은 느낌이었다.
“너희, 파티 조합 잘못 짰어 이것들아.”
콰아악!!
멜트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델라를 추적하자 내게서 거리를 벌리던 델라가 급히 손을 움직였다.
우우웅!!!!!!
동시에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검은 낫이 수 미터에서 수백 미터로 거대해진다.
[죽어라.]
싸늘한 일갈.
마치 오딘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던 워드 마법.
[파워 워드 킬] 마냥 의지가 담긴 힘이 내 몸을 순간 옥죄어 들어와 나를 멈추자 델라는 망설임 없이 거대한 낫에 검은 힘을 담아 내리그었다.
막을 수 있는 수준.
이에 초단이를 들고 다시 정면으로 파고들려던 찰나였다.
스스스스슥……
“염병.”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낫이 결국 지면에 내리그어졌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잔상을 남긴 거대한 낫은 불지옥도로 변해버린 일대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이제는 화염에 이어 화강암이 녹아 역류하고 마그마가 새어 나온다.
순간적인 합공에 나는 초단이를 가볍게 털어냈다.
처음 델라를 공격할 때 검게 변질되었던 피부가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곧 죽어도 심연의 공주라 이거지.
그녀들은 애초에 내게서 도망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즉,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는 의도였다.
정보가 좀 있으면 대처가 쉬울 텐데.
강한 힘으로 찍어누르는 걸 최대한 피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파손율이 급속도로 올라간다.
이후의 심연의 공주와의 싸움에도 써먹으려면, 절약이 필수인 상황에 낭비라니.
있을 수 없다.
델라는 손에 쥔 거대하고 반투명한 검은 낫을 자신의 입맛대로 크기를 바꿔가며 공격해왔다.
손바닥보다 작게 만들어 손에 쥔 다음 파고들어 그대로 크기를 키워 베어 넘기거나 크기를 키우는 것으로 순간적인 공격을 가해오는 등 솔직한 말로 말하자면 제법 전투 자체에 익숙해 보였다.
멜트의 경우 제대로 된 합공을 하고 있진 않지만 델라는 지금까지 본 어떤 심연의 공주보다도 전투 경험이 많아 보였다.
물론.
그것이 내가 히든카드를 꺼내 들기 전이었다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카앙!!
“읏?!”
회심의 공격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 함정이었음을 깨달았을까.
나를 향해 맹공을 펼치던 그녀의 거대한 낫이 초단이에게 튕겨 나가자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그리고. 공격이 쳐내지며 자세가 흐트러진 그녀를 향해 낮게 파고든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뻐끔거렸다.
이.
악물어.
츠츠츠츳!!!
[마왕 유르그 식(式) 절멸붕권]
[흉신악살]
퍼엉!!!!!!
마왕 유르그는 제압용 권법과 살상용 권법을 따로 만들어둔 괴짜 같은 마왕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발현한 붕권은 정확히 보옥의 힘없이 한 번만 환골탈태한 내 힘으론 구현이 불가능한.
그만큼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반응하기도 전에 델라의 심장을 뚫어버린 주먹을 뽑아낸 내가 그대로 그녀의 복부를 걷어차 날려버린다.
화르르륵!!!
동시에 내 발밑에서 거대한 늪이 생겨나며 보랏빛의 촉수 더미가 튀어나와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고생했어 델라.”
싸늘하게 말한 멜트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내 움직임을 막듯 더더욱 많은 촉수들이 내 몸을 옭아매자 그녀의 표정에 더욱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델라와 나는 하나야. 그리고, 델라의 특성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지.”
“거,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래?”
내 물음에 그녀가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굳이 내가 그걸 자세히 알려줄 필요가 있나?”
“질병이야. 네 몸엔 이미 수천 수억의 질병균이 침투했어. 내 근처에 있건, 나를 공격했건. 그 어떤 수단도 죽음 그 자체를 몰고 다니는 내 영역 안이니까.”
말을 하지 않는 멜트와는 반대로 치명상을 입은 채 내게서 물러난 심연의 공주 델라는 입이 싼 것처럼 모조리 불어버렸다.
이에 멜트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
말없이 검지와 엄지를 붙여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는 델라였다.
그러니까.
델라라는 저 심연의 공주는…….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일으키는 디버프 오오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 팔과 몸 곳곳이 검게 변색되어버린 것도 그 여파 때문이리라.
“처음엔 근육이 뒤틀리겠지. 지방이 녹아내리기 시작할 거고 머리가 빠질 거야.”
“뭐라고?!”
그녀의 외침에 내가 경악한 듯 소리쳤다.
그런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던 탓일까.
멜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휘리리릭!!!!
동시에 늪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내 몸을 더욱 끌어당겼다.
“이제 겁이라도 나나 봐?”
“내 머리카락은 소중하다. 그 누구도 못 뽑아가.”
‘그런 주제에 남의 머리에는 태양을 내려주고 말이야…….’
페르세르크의 딴지에 나는 입을 샐쭉 였다.
그놈들은 머리 위에 태양이 있어 아깝지 않은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벌써 무릎까지 부패시키는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몸은 아직 멀쩡하지만 지속해서 마나의 엄청난 소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멜트가 가진 부패도 보통 힘은 아니었다.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주제에 질병의 바람을 뿌린 다라…….”
짧게 중얼거린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희 둘은 평소에 같이 다니나?”
내 물음에 델라가 다시 한번 입이 싼 촉새처럼 조잘거렸다.
“응. 동족들도 내 힘을 싫어하니까.”
음침한 얼굴로 중얼거린 그녀가 멜트를 본다.
“멜트는 유일하게 내 힘에 영향을 받지 않아. 그녀의 힘이 내 질병을 모조리 불패시켜버리니까.”
그 말에 나는 말 없이 멜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몸이 계속!!!]
죽음의 질병이 시시각각 내 몸을 파고든다.
저주계통이 아닌 바이러스인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심연의 존재조차 꺼리는 심연의 공주.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는 부패의 심연의 공주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가슴팍까지 빨려 들어간 내 육신을 보며 승리에 젖어있던 멜트의 시선에 나는 조용히 빨려 들어간 팔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아직까진 멀쩡한 팔을 내 뻗으며 허공을 지면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촉수들이 나를 더욱 옭아매며 잡아당기기 시작했지만 나는 벌써 손을 쓴 후였다.
몸을 잠식하는 부패의 힘과 질병이라…….
보통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열이나 냉기에 약한 편이다.
[9서클 원소계]
[빙하기]
쩌저저저적!!!
동시에 내 몸을 기준으로 사방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완전히 박멸하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순 있다.
“저 녀석?! 냉기가 약점인 걸 어떻게?!”
“보통 바이러스나 질병 박테리아는 온도에 민감하다. 명심해라.”
퍼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촉수들이 일거에 잘려나갔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늪 속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정보 고맙다.”
질병이라. 참 거슬리네.
싸늘하게 일갈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멜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초단이를 불러 내리그어버렸다.
애초에 이실디도 아니고 보옥까지 준비된 마당에 눈앞에 있는 이 두 명의 심연의 공주에게 애를 먹을 이유는 없었다.